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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28화 (29/61)

28화

“다른 요수들은 어떤데?”

“흐음…. 정확히 어떤 질문이신가요?”

“근황!”

“잘들 지냅니다.”

“…….”

근황이라는 게 무엇인가. 요즈음의 상황이니 잘 지내고 있다는 자오의 답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자오는 동백이 던진 애매한 질문에 그와 비슷한 애매한 답변으로 돌려준 것뿐이었다.

짜증 날 듯 말 듯 신경을 살살 긁는 솜씨가 아주 대단한 놈이다. 속내를 말하지 않아도 먼저 알아차리는 건 태상과 같은데 이놈은 그걸 이용해서 시망스럽게 구는 재주가 탁월했다.

“됐어. 요수놈들 생각이야 다 똑같지.”

어둑서니가 세운동에 자리를 잡았으니 자신들도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놈들이 천지이리라. 덤벼드는 놈들이야 어둑서니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처리할 것이고 아니면 호범에게 맡겨도 되었다.

동백은 몸을 숙여 호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호범은 도취한 듯 눈을 감고 긴 울음소리를 냈다.

“호범아.”

제 이름이 불리자 영민한 범은 하얀 반점이 새겨진 까만 귀를 팔락이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앞으로 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침입자들을 잡으렴.”

호범의 시선이 대번에 자오에게 닿았다. ‘저놈은요?’라고 묻는 것 같은 시선에 동백은 잠시 고민하다 명쾌한 정답을 찾아냈다.

“저놈은 등을 맡길 수 없는 동료거든.”

이보다 더 정확한 설명이 있을까. 동백은 스스로 뿌듯함을 느꼈다.

“캬응!”

“그래, 좀 재수 없고 음흉한 데다가 심지어 요수지만 일단은 유용하게 써먹고 있으니 곁에 두고 있는 거야.”

당사자를 뒤에 두고도 가차 없이 폄하하던 동백은 마지막으로 호범에게 한 가지를 더 당부했다.

“혹시 수상한 놈이 보이면 조심해야 한다.”

상대는 동백에 대해 과할 정도로 잘 알고 있으나 동백은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 항시 주의해야 했다. 다행히 동백이 자리를 비운 동안 놈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 어찌 될진 아무도 몰랐다.

“크응?”

“수상한 놈을 어찌 아냐고?”

“킁!”

“딱 보면 알 거다.”

어둑서니가 말하기로 놈은 선기도 사기도 느껴지지 않으며 그렇다고 인간 같지도 않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태상의 손에 자라 영물이 된 호범 또한 놈을 마주치면 대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동백이 마지막으로 호범을 다시 한번 더 쓰다듬어 주자 호범은 범다운 날랜 몸짓으로 길 위를 달려나갔다. 위풍당당하게 바짝 세운 꼬리가 자신감이 넘쳤다.

“저러다 길고양이에게 맞고 다니면 꼴이 볼만하겠군요.”

끝까지 호범에게 악담 아닌 악담을 던지는 자오를 삐죽한 눈으로 노려보던 동백은 그를 무시하며 고시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 동백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며 자오는 지난 한 달간의 무료했던 시간을 떨쳐내듯 연신 말을 걸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선경은 여전하던가요?”

“제가 곁에 없어 적적하진 않으셨나요?”

선경의 시간이 지상보다 빠르다는 건 동백도 알고 자오도 알았다. 실제로 동백이 느끼는 체감 시간은 박물관에 다녀온 시점부터 고작 몇 시간이 지났을 뿐이었다. 게다가 선경이 여전하냐니, 이것도 물론 개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애초에 선경이 바뀔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가장 최고의 헛소리는 마지막 질문이었지만 말이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죄다 들어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지라 동백은 계단을 오르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왜, 너는 내가 없어서 꽤 적적했던 모양이지?”

동백은 이기죽거릴 요량으로 한 말이었건만 자오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냉큼 답했다.

“네.”

“…….”

“어찌 그리 제 마음을 잘 아시는지요?”

그러면서 동백의 소맷자락을 슬쩍 잡는 것이 여간 요망한 게 아니었다. 진정 까마귀가 아니라 여우로 태어났다면 한 시대를 제 손에 넣고 주물럭거렸을 희대의 호색가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아마 선인님이 동백이기 때문에 저를 홀리셔서일지도 모르겠네요.”

동백은 자오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교묘한 말솜씨는 마치 자오가 동백에게 애틋한 감정이라도 품은 듯 보이게 만들지만, 실상은 말장난에 불과했다.

향기가 없어 벌이 꼬이지 않는 조매화인 동백꽃은 새를 불러들여 제 꿀을 내어주고 꽃가루를 여기저기 옮겼다. 그런 동백꽃과 새의 관계를 그들에게 대입해 그럴듯하게 꾸며낸 자오에게 동백은 똑같이 그럴듯한 대답을 돌려줬다.

“네놈의 부리는 크고 뭉툭해서 꿀은커녕 꽃을 다 망치겠구나.”

“꼭 부리만 꿀을 맛볼 수 있는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제겐 부리 말고도 좋은 도구가 하나 더 있거든요.”

말 속에 스며든 은근한 희롱에 동백이 정색하며 자오를 걷어찼다. 겨우 한 사람만 지날 수 있는 계단이기에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걷어차였던 자오는 손을 뻗어 거두어지는 다리를 냉큼 붙잡았다.

“야! 안 놔?!”

동백이 기겁해 붙잡힌 다리를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자오는 커다란 손으로 새의 발톱처럼 단단히 동백의 종아리를 움켜쥐고 바짝 들러붙었다.

“궁금하시다면 직접 사용해 보시는 건 어떠신지?”

“하나도 안 궁금하니까 꺼져!”

감정이 격해져 저도 모르게 커진 목소리가 좁은 계단에 짜랑짜랑 울렸다. 조용하던 고시원 안쪽까지 들렸을 목소리에 동백은 지레 놀라 입을 합, 다물었다.

그리고.

“형! 돌아왔구나!”

동백의 목소리를 들은 이호영이 안쪽에서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뛰쳐나왔다. 눈에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한달음에 동백에게 달려온 호영은 등 뒤에서 동백을 와락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앞에는 자오, 뒤는 호영에게 둘러싸인 동백이 팔로 벽을 짚어 균형을 잡으며 으르렁거렸다.

“이 망할 놈들 당장 이거 놔!”

탁―!

짜증이 깃든 거친 손길이 물기가 맺힌 맥주캔을 테이블 위로 내리꽂다시피 내려두었다. 꽤 큰 소리에 호영의 어깨가 움찔, 움츠러들었다. 표정엔 사뭇 억울함이 가득했다. 동백은 그런 호영을 바라보다 다시금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켠 후에야 입을 열었다.

“많이 걱정했냐.”

덤덤한 물음에 이호영의 눈에서 다시금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미 발갛게 부어오른 눈가는 내일이 되면 개구리처럼 부어오를 게 분명해 보이는데도 호영은 쉬이 눈물을 그치지 못하고 훌쩍댔다.

“내…가아 얼마나…걱정했는데!”

그리곤 호영은 뒤에 울음으로 얼룩져 알아듣기 힘든 웅얼거림을 연신 내뱉었다. 동백은 언뜻언뜻 또렷하게 들리는 단어로 호영이 말하는 내용을 유추했다.

그러니까 한 달이나 자리를 비우는데 그걸 자신에겐 말도 없이 간 게 서럽다 그건가.

동백은 미간을 모았다. 그가 요수를 처리하기 위해 자리를 비울 때 딱히 호영에게 먼저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다. 그저 동백이 며칠 자리를 비우고 돌아오면 호영은 그런 동백을 아무렇지도 않게 반겨주곤 했었다.

이번엔 뭐가 달랐던 걸까.

기간이 좀 길었나?

그럴 수도 있겠다.

한 달은 좀 길긴 했지.

홀로 머릿속으로 추측해 보던 동백은 이어진 호영의 말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다음엔 나한테도 말해 줘. 한아 형이 친구라는 건 알지만…, 나도 형이랑 2년이나 알고 지냈으니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잖아.”

“아….”

너는.

호영이 젖은 눈가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입술을 삐죽였다. 단단히 토라진 듯 보이지만 귓가가 부끄러운 듯 붉었다.

내게 서운했던 거로구나.

한 번도 제게는 알려준 적 없는 동향을 자오는 알고 있었다는 점에 서운해하며, 영원히 동백보다 어릴 작은 아이는 토달거렸다.

“형, 듣고 있는 거지?”

“응.”

“다음엔 꼭 말해주고 가는 거다?”

“그래. 그럴게.”

고작 한마디의 약속에 우울하게 어깨를 늘어트렸던 호영이 금방 환한 미소를 되찾았다. 어린 종달새가 조잘거리듯 동백이 자리를 비운 사이 제게 일어난 일들을 하나하나 늘어두던 호영은 문득 말을 멈추고 입술 끝을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말았다.

“있지, 엄청난 소식도 있어.”

일부러 기대감을 고양하듯 뜸을 들이던 호영은 자오를 향해 입술 위로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저를 빼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동백은 호영이 느꼈을 소외감을 잠깐 맛봤다.

“뭔데?”

“이거 들으면 무조건 내 부탁 하나 들어줘야 해.”

“무조건?”

“응, 무조건.”

무조건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모르고.

말이 지니는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아이를 향해 이리저리 말을 얹어봤자 우스워지는 것은 자신이라, 동백은 입을 꾹 다문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 줄 테니 말해 봐.”

신선에게 무엇이든 얻어낼 수 있는 약조를 얻은 줄도 모르고 호영은 동백의 대답에 세상에서 가장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나 저번에 본 오디션 붙었어.”

“잘했네.”

이미 오디션에 붙을 걸 예상한 동백이지만, 여기까지 오기 위해 애쓴 호영의 노력을 알기에 그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 공연 첫날에 무조건 와줘야 해?”

누군가는 주역도 아닌 고작 단역에 불과한데 설레발을 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작은 행운에도 일희일비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그들이 보지 못하는 빛을 내며 자신을 불태웠다.

“티켓이나 주고 말해.”

“당연히 줘야지. 내가 안 주면 형은 티켓 사는 법을 몰라서 못 올 거 아니야.”

“그 말도 맞네요. 인터넷 사용할 줄은 아십니까?”

“…….”

두 사람의 말에 동백은 웃으며 쥐고 있던 캔을 악력만으로 우그러트렸다. 반절 이상 남은 맥주를 왈칵 토해낸 캔은 더는 캔으로 불리기도 민망할 정도로 찌그러졌다.

“뭐라고?”

“당연히 내가 안 줘도 형은 예매해서 올 거란 소리였어.”

“제가 너무 당연한 걸 물었군요. 선인님은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시는 건데.”

두 사람은 재빠르게 장단을 맞춰 너스레를 떨었다. 변죽을 올리는 게 어찌나 잘 맞는지 동백은 마치 먼저 짜인 개그 프로그램의 콩트를 듣는 기분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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