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맞아요, 형은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거니까요.”
“선인님이 직접 나서면 다른 사람이 예매할 기회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쉬이 나서지 않으시는 거지요.”
“그런 깊은 뜻이.”
연습을 나가며 연기에 물이 오른 호영이 감명받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만두면 통통 튀는 고무공처럼 튀어 나가 어디까지 갈 줄 모르겠는 대화에 동백은 젖은 손을 휴지에 대충 문질러 닦으며 불퉁하게 대꾸했다.
“됐어. 나 인터넷 못하는 거 맞아. 그러니 그만해. 하지만 살면서 인터넷 같은 건 안 써도 충분하잖아.”
길 찾는 건 한 번씩 갱신되는 <전국지도> 책을 사면 충분했고 요수를 잡는 건 악질적인 놈들은 이런 시대라도 으레 소문이 들려오곤 했다.
동백의 투덜거림에 호영이 할 말을 잊은 듯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답지 않게 단호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건 아냐.”
호영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동백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냉큼 덧붙였다.
“잘됐다. 말 나온 김에 형 핸드폰도 하나 만들자.”
“…어?”
“이번 일도 핸드폰만 가지고 있었으면 한 달이나 연락 두절 상태는 아니었을 거 아냐.”
아냐, 그래도 연락 두절 상태였을 걸…?
선경에서 핸드폰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리가 없지 않은가. 거기에 기지국이 있을 리도 만무하고, 세운다고 한들 아예 차원 자체가 다른 셈인데.
“난, 핸드폰 같은 거 필요 없….”
“내가 필요해서 그래.”
쉬이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기세에 동백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대체 뭐라고 해야 포기하고 물러날지 도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곤란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버벅대는 동백을 조용히 지켜보던 자오는 가볍게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려 소리를 냈다.
툭, 툭.
작은 소리였으나 시선을 모으기는 충분한 소리였다.
“선인님, 필요 없는 게 아니라 못 만드시는 거지 않습니까.”
“…못 만들어? 왜?”
자오의 말에 호영이 사뭇 이해되지 않는지 두 눈을 느리게 깜박이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경악했다.
“형, 설마….”
점차 벌어지는 입술과 둥그렇게 뜨인 눈이 크게 흔들렸다.
동백은 호영의 작은 머릿속에서 벌어지고 있을 난리를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저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처럼 긴장한 채 호영의 입을 주시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동백과 다르게 호영은 제가 낸 결론이 스스로 믿기지 않는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불법체류자야…?”
“―!”
부, 불법 체류….
“아, 아하하하! 하하하하―!”
지금껏 그 어떤 웃음보다도 경쾌하게 자오가 웃어젖혔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조용한 거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배를 잡고 웃어대는 자오와 여전히 진지하게 동백이 불법체류자라 믿고 있는 호영의 콜라보에 동백은 제 이마를 부여잡았다.
어쩐지 두통이 지끈지끈 몰려왔다.
“괘, 괜찮아!”
넌 또 뭐가 괜찮다는 거니.
동백은 이제 퀭해진 눈으로 호영을 멀거니 바라봤다. 호영은 주변을 의식한 듯 커졌던 목소리를 최대한으로 줄여 속삭였다.
“난, 형이 그…거라도 이해해.”
호영의 말에 다시 한번 자오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젠 숫제 온몸을 부들거리며 떠는 것을 보니 조만간 한 번 검과 진한 데이트를 즐기게 해 줘야 할 모양이라고, 동백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생각했다.
“혹시, 내가 도와줄 게 있으면 얼마든지….”
“그만!”
동백이 더 듣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너도! 좋은 말 할 때 그만 웃어라?”
으르렁. 목을 울리는 경고에 자오가 애써 웃음을 삼켰으나 여전히 어깨는 때때로 들썩거렸다. 긴 눈시울이 소리 없이 초승달을 그리며 휘어졌다.
확, 저걸 죽일 수도 없고.
끓어오르는 분을 삭이며 동백은 여전히 비장한 얼굴을 한 호영을 부드럽게 얼렀다.
“호영아. 형 그런…거 아니야.”
그런 거라고 하니 좀 어감이 이상하긴 하지만 동백은 불법체류자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긴 싫었다.
불법체류자라니!
자신보다 이 땅에 오래 산 존재가 없거늘!
심지어 저 망할 까마귀도 동백보다 어렸다. 이쯤 살다 보면 이십 년이나 삼십 년이나 백 단위가 아니면 나이를 가늠하진 않지만 그래도! 어린 건 어린 거지!
“그럼…?”
“어….”
뭐가 적절하지?
동백이 도화이던 시절 그는 옛 오호에서 태어나 권세를 누리던 귀족 집안의 장남으로 전쟁터에 나서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그 과정에서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을 테니 따지자면….
“주민등록말소.”
이보다 적절한 단어가 또 없었다.
어떻게든 답을 찾아냈다는 것에 뿌듯해하는 동백과 다르게 호영의 얼굴은 더 새하얗게 질렸다.
“혀, 형….”
부잣집 도련님인 이호영이 아는 주민등록말소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경우는.
“내가 꼭 돈 많이 벌어서 도와줄게.”
개인이 빚을 감당할 수 없기에 주민등록을 말소시키고 도망쳐다니는 경우였다.
“큭.”
자오가 다시금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를 삐죽한 눈으로 노려본 동백은 깊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무슨 변명을 해도 긍정적인 결과를 얻기 힘들다면 적절히 타협해야 하는 법이라.
“그래, 돈 많이 벌어.”
동백이 할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핸드폰은 포기하겠지.
주민등록말소자에 개통 자체가 불가능하다는데 설마 고집을 부리려고.
“그럼, 핸드폰은 내 이름으로 하나 개통하자.”
부리는구나.
동백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예부터 보증을 서면 삼대가 망하고, 명의를 빌려주면 자신도 모르게 사기꾼이 되어 있을 수 있다 하였거늘. 정녕 자신이 핸드폰이라는 것을 가져야만 끝나는 일이라면 차라리 이호영이 아니라―
“야. 까마귀.”
“부르셨습니까?”
“네 이름으로 만들어 와.”
삼대가 망해도 이놈이 망해야 하고, 사기꾼이 되어도 이놈이 되어야 했다.
“그러죠.”
조금의 거절도 없이 흔쾌히 동백의 명령을 받아들인 자오는 “그럼 핸드폰 기종과 번호는 제 마음대로 할까요?”라고 되물었다. 기종이든 번호든 어찌 되었든 제 기능만 하면 그만인지라 동백은 모든 걸 자오에게 위임했다.
“알아서 해.”
“그럼, 지금은 시간이 늦었으니 날이 밝고 준비해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드디어 형도 핸드폰이 생기는구나!”
기쁨에 호들갑을 떠는 이호영을 상대하느라 동백은 말을 마치며 슬그머니 올라가는 자오의 입꼬리를 보지 못했다.
“그렇게 좋냐.”
“이제 이 답답한 생활도 끝날 거 아냐.”
호영을 향해 잔잔한 미소를 내보이는 동백을 지켜보며 까마귀는 손으로 입가를 가려 제 음흉함을 감추었다.
◆
동백은 기지개를 쭉 켰다.
스프링이 고장 난 오래된 매트리스가 동백이 움직이는 대로 삐걱거리는 비명을 토해냈다. 창문이 없어 빛이 들지 않는 작은 방은 밖이 사(巳)시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편안함보다는 불편함이 더 큰 매트리스에 밤새 시달린 찌뿌드드한 몸을 이리저리 뻗으며 동백은 제 방을 나섰다.
한 달 하고도 일주일 만에 돌아온 고시원은 여전했다.
크게 변한 게 없어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 퀴퀴한 곳이 변하지 않는 것에 슬퍼해야 할지 모를 이중적인 감정을 느끼며 동백은 공용 공간으로 나왔다. 그러자 자리를 떡 하니 차지한 호영이 동백을 발견하고 팔을 흔들었다.
“연습 안 갔어?”
“응, 오늘은 쉬는 날.”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동백이 돌아온 날과 호영의 쉬는 날이 적절하게 맞물린 모양이었다.
홀로 아임튜브를 시청하던 호영은 동백이 다가오자 핸드폰을 내려두고 두 눈을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한아 형은 언제 돌아올까?”
“글쎄다. 때 되면 알아서 돌아오겠지. 오지 말라고 해도 올 놈이니.”
동백의 시큰둥한 대답에 호영은 테이블에 턱을 괴고 동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어찌나 집요한지 적당히 무시하려던 동백은 결국 항복 깃발을 들어 올렸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있지, 한아 형이랑 진짜 친구 맞아?”
“아니.”
칼같이 떨어진 동백의 대답에 호영의 표정이 좀 더 오묘하게 변했다.
“…그래?”
“그런데, 그건 왜?”
요즘 까마귀 놈과 좀 붙어 다녔다고 친밀해 보였나?
그렇다면 당장 거리를 둘 생각으로 동백이 묻자 호영은 ‘음….’하고 목을 울렸다. 뭔가 고민스럽기도 하고 망설이는 모습에 동백이 눈썹을 바짝 치켜들고 채근했다.
“내가 그놈하고 친해 보여?”
“솔직히 말해도 돼?”
“한 치의 거짓도 섞지 말고 말해 봐.”
호영은 잠깐 고민하더니 곧 마음을 다잡았는지 속내를 줄줄 쏟아냈다.
“솔직히 말해서, 친해 보인다기보다 서로 콘셉트를 맞춘 거 같이 보여.”
“…….”
“대화하는 걸 들으면 무슨 한 편의 연극 무대 같달까? 선인이니 까마귀니 서로 부르는 호칭도 그렇고. 그 형 입고 다니는 옷도 범상치 않잖아. 형도 모형 칼 하나 들고 다니고.”
잠깐 말을 멈춘 호영은 동백의 표정을 슬그머니 살피고는 마지막 쐐기를 쿡 박아넣었다.
“무슨 코스프레 동호회 같아.”
코스프레.
동백도 코스프레가 뭔지는 알았다.
그러니까 만화나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의 옷을 입는 거라는 걸.
이건 모두 다 까마귀 때문이다. 지금 시대에 어느 누가 그런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다닌단 말인가. 놈이 돌아오면 당장 환복을 요구할 생각이었던 동백은 다시 이어지는 호영의 말에 집중했다.
“근데 뭐 이건 개인 취미니까 넘어가고. 내가 진짜 말하고 싶은 건….”
말하고 싶은 건?
저도 모르게 동백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형 자리 비웠을 때. 한아 형이 매일 고시원 앞에서 기다리더라고. 친구 사이라도 그런 건 쉽지 않잖아. 그래서….”
호영은 뒷말을 흐렸으나, 동백은 그 흐려진 말이 무엇인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동백이 아니더라도 지금 호영의 표정을 본다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이기도 했다.
한아 형이 형을 좋아하는 줄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