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동백의 두 눈이 서서히 크게 부릅떠졌다. 까만 눈동자에 서슬 퍼런 노기가 일렁이며 번들거렸다.
“절대!”
호영이 깜짝 놀랄 만치 큰 소리로 동백이 소리쳤다.
“놈과 나는 절대로 그런 사이가 될 수 없는 관계야!”
“무슨 관계 말입니까?”
타이밍 좋게 자오가 고시원의 문을 열고 들어오며 습관처럼 미소지었다. 그는 들고 온 쇼핑백을 테이블 위에 내려두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이야기꾼처럼 호영과 동백의 표정을 기웃거리며 살폈다.
“그게….”
“내가 네놈과 손잡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관계 말이야.”
재빨리 호영의 말을 가로막은 동백이 코웃음 쳤다. 까마귀 놈에게 조금이라도 흥밋거리를 던져주고 싶지 않았다. 이 주제로 놈이 매끄러운 혀를 얼마나 놀려댈지, 생각만 해도 귀찮고 짜증 나는 상황이 좌르륵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손 말고 다른 걸 잡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 검 손잡이 같은 거 말이지?”
“매정하시긴.”
말로는 매정하다 하나 전혀 타격 따위 받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자오는 쇼핑백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헉, 이거 일주일 전에 나온 신상 아니에요?”
시큰둥한 얼굴을 한 동백과 다르게 호영은 자오가 가져온 핸드폰의 기종을 알아보고 자신이 더 신나 조잘거렸다.
“형, 이거 반으로 접히는 모델이야. 요기 앞에 작은 화면에 원하는 문구도 넣을 수 있다?”
동백은 영 내키지 않는 얼굴로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전체적으로 로즈골드 색상의 핸드폰은 퍽 우아해 보였다. 크기도 적당해서 나쁘진 않지만….
묘하게 찝찝하단 말이지.
자꾸 뒤통수가 간질간질한 것이 분명 까마귀가 뭔가 수작을 부려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이런 기계를 잘 다루지 못했다.
써볼 기회도 없었거니와 딱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만들지도 않았었으니까. 그러니 지금 동백의 이 찝찝함을 가시게 해줄 상대는 딱 한 명뿐이었다.
“호영아.”
“응?”
“나 대신 핸드폰 좀 확인해 봐.”
“엉?”
얼결에 핸드폰을 받아든 호영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눈을 끔벅였다.
“뭘 확인해?”
“이상한 거 없는지 확인해줘.”
동백이 아무리 이런 기계에 약하다 해도 살면서 알음알음 들었던 건 있는지라 의심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음흉함이 도를 넘어선 까마귀가 순순히 핸드폰만 구해다 줄 리 없지 않은가.
“이…상한 거?”
당사자를 앞에 두고 이래도 되나 싶어 호영이 슬그머니 자오의 눈치를 봤다.
“저 녀석 신경 쓰지 마. 내가 이겨.”
“선인님이 그렇다고 하시네요.”
자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상관없단 가벼운 태도에 호영은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살폈다.
‘일단 화면은 기본 화면이고.’
아무것도 설정되지 않은 화면은 처음 핸드폰을 살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깔린 앱들도 마찬가지라 이상한 점을 전혀 찾을 수 없던 호영은 연락처에 먼저 등록되어 있던 번호 하나를 찾아냈다.
“이상한 건 없고 이것만 있는데?”
동백은 호영이 보여주는 화면을 살폈다.
<등을 맡길 수 없는 동료>
사진이나 다른 건 일절 등록되어 있지 않은데도 동백은 저장된 번호가 자오의 것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도 그럴 게 아예 저장된 이름부터 동백이 호범에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가져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거 말고 다른 건 없단 거지?”
“응, 딱히 없어.”
호영의 보장에도 동백은 여전히 가시지 않는 찝찝함에 혀를 찼다. 의심을 받는데도 속 좋아 보이게 웃고 있는 자오가 몹시 거슬렸다. 분명 뭔가가 있는데 알 수가 없어 답답한 와중에도 호영은 야무지게 제 이름 뒤에 하트까지 붙여 번호를 저장했다.
<호영♡>
흡족한 얼굴로 감상을 마친 호영은 동백을 돌아보며 물었다.
“형, 다른 번호는 저장할 거 없어?”
“딱히.”
“응, 그럴 줄 알았어. 그럼 이제 초콜릿톡 깔자. 내가 단톡방 만들게!”
그럴 줄 알았다니…. 호영아…?
옆얼굴에서 동백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질 텐데도 바지런히 손가락을 움직이는 호영은 꿋꿋했다. 뭐가 잘 안 되는지 인상을 썼다가도 금방 답을 찾았는지 헤실헤실 웃으며 한참을 핸드폰을 붙잡고 있던 호영이 동백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형, 치즈해. 치즈~”
“치즈?”
찰칵!
호영의 손길 아래 동백의 어리둥절한 얼굴이 그대로 사진으로 남겨졌다. 호영은 마지막으로 그 사진으로 프로필 설정까지 마치고 나서야 동백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동백은 뭔가가 변해 돌아온 핸드폰을 어색하게 만지작거렸다.
“단톡방도 만들었으니 나중에 확인해 봐!”
쾌활하게 외친 호영은 뒤에 약속이 있다며 쪼르르 나가 버렸다. 자오 또한 핸드폰을 전해주러 잠시 들른 거였는지 자리를 비운 탓에 동백은 핸드폰에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했다.
분명 그랬는데….
초톡!
초톡!
쉴새 없이 울리는 알람이 요란했다.
오랜만에 생긴 혼자만의 시간에 가만히 앉아 명상이나 해 볼까 했던 동백은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소리에 책상 구석에 처박아뒀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이걸 어찌 소리가 안 나게 만들 수도 있었던 것 같은데.
동백은 한참 핸드폰을 이리저리 살폈다. 사람들이 쓰는 것만 봤지 직접 써보는 건 처음이라 대충 기능들은 알겠는데 그게 어디 붙어있는지 찾기가 어려웠다. 그 와중에도 연신 울어대는 핸드폰은 자기주장이 너무도 강했다.
결국, 어찌어찌 핸드폰을 진동 상태로 바꾸는 것에 성공한 동백이 이마에 배어난 진땀을 손으로 훔쳤다. 차라리 요수를 상대하는 게 더 쉽게 느껴졌다.
그래도 쓰다 보면 금방 적응하겠지.
아직 익숙하지 않을 뿐이지 배움이 느리진 않았다. 개나 소나 다 쓰는 이깟 물건 따위에 쩔쩔맬 자신이 아니었다. 심지어 까마귀도 하는데 동백 자신이 못 한다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동백은 본격적으로 핸드폰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초콜릿톡이었다.
<형형, 모해?>
<혀어엉~>
<똑똑, 김동백씨?>
호영이 보낸 메시지가 어느새 제법 많이 쌓여 있었다. 동백은 느리지만 신중하게 자판을 톡톡 두드렸다.
< 모해가 아니라 뭐해.>
< 그리고 내 이름은 그냥 동백이야.>
호영이 녀석 맞춤법이 엉망이네.
혀를 쯧쯧 찬 동백이 다시 신중하게 타자를 쳤다.
< 그리고 문장의 시작은 들여쓰기해야지.>
< 맞습니다. 선인님. 맞춤법은 중요하지요.>
까마귀 녀석에게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한 가지 있을 줄이야.
< 너무 늦게 다니지 말고. 일찍 일찍 다녀라.>
호영이 조용한 게 이상하긴 하지만 동백은 마지막 당부의 말까지 꼼꼼하게 적어 전송 버튼을 눌렀다.
이 정도면 완벽했다.
그 후 핸드폰은 무척이나 잠잠해져서 동백은 조용히 명상을 즐겼다. 동백의 당부대로 일찍 돌아온 호영은 잠시 말을 잃은 듯 동백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별안간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앞으로 그냥 전화할게 형.”
“음? 그러던지.”
어쩐지 축 늘어진 어깨에 동백은 호영의 등 뒤로 자못 걱정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그런 동백과 다르게 힘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온 호영은 그 누구도 들을 수 없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꼰백….’
아무래도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
동백은 무료함을 떨쳐내기 위해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선경과 지상의 시간이 다르니 태상이 뭔가 정보를 물어오기까지 적어도 몇 달은 걸릴 거라고 예상하던 바였다. 보통 그렇게 시간이 비면 다른 도시를 돌아다니며 뭔가 문제가 없는지 살피곤 했던 동백이지만, 이번엔 달랐다.
『안녕하심까! 형님, 누님들 고스트슈터 김 촨~식임돠.』
며칠 전 호영에게 부탁해 아임튜브를 깔고 가장 먼저 이 촐싹거리는 남자의 동영상을 볼 수 있게 설정해두니 아주 편했다. 화면 안에서 쾌활하게 떠드는 김 촨~식이 주는 정보 대부분은 허무맹랑한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가끔 오! 하게 만드는 이야기들도 몇 개 있었다.
그렇게 그의 영상을 몇 개 보니 또 다른 영상을 알아서 재생해 주고 또 재생해 주고, 끝나지 않는 영상 재생을 겪으며 동백은 요수보다 무서운 것이 바로 이 작은 기계덩이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감히 어느 요수도 그를 홀릴 수 없는데 이 작은 기계는 너무도 쉽게 동백의 시간을 빼앗았다. 마치 요물처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이런 것 따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 여겼건만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다더니 이젠 없으면 허전했다.
오늘도 신나게 떠는 김~촨식의 영상을 보던 동백은 목소리 사이로 섞여든 알림에 이젠 제법 익숙하게 메시지를 확인했다.
< 선인님, 혹시 지금 방에 계십니까?>
만든 첫날 빼고 조용하게 죽어있던 단톡방에 오랜만에 올라온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