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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31화 (32/61)

31화

까마귀가 보낸 거라는 게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이미 메시지 옆 숫자가 사라져 안 읽은 척하기도 모호했다.

< 왜?>

글자에 퉁명스러움을 담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글자 대신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움직이는 그림이 있다던데 나중에 호영에게 물어 방법을 좀 알아봐야겠다.

< 다행입니다. 제가 오늘 주주총회에 필요한 자료가 든 USB를 그만 방에 두고 왔지 뭡니까.>

자오는 동백이 방에 있다고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당연히 그럴 거라고 예상한 모양이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전혀 나가지 않았으니 당연한 반응이긴 하지만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 직접 가지러 오든가. 아니면 비서 시켜.>

이게 누굴 시켜 먹으려고.

동백의 눈썹이 삐죽 솟았다. 조금 편해졌다고 자신을 종처럼 부려 먹으려는 까마귀가 괘씸했다. 말 잘 듣는 비서도 있으니 비서에게 시키면 될 텐데 굳이 자신에게?

< 저도 그러고 싶지만, 명현 씨는 오늘 휴가입니다. 아무리 돈이라도 아픈 사람을 부릴 순 없는 노릇이지요.>

사뭇 곤란해 보이나 동백은 자오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 내가 네 놈을 도울 성싶으냐.>

오히려 자오가 곤란해하는 꼴을 보니 속이 시원했다. 조금 더 골려줄까 생각하던 동백은 대화방에 올라온 호영의 메시지에 깊게 미간을 접었다.

<형, 일주일 동안 한 번도 안 나갔지? 이번 기회에 바람 쐬면 되겠네.>

동백이 거절의 말을 완성하기도 전에 다시금 호영의 메시지가 대화창을 채웠다.

<후딱 일어나서 다녀오자. 방에 처박혀서 아임튜브만 보면 사람이 피폐해져서 안 돼요. 사람이 밖에도 나오고 그래야지.>

자신보다 한참 어린 호영에게 훈계 아닌 훈계를 들은 동백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존재가 호영 말고 또 있겠는가. 이 또한 걱정에서 우러나온 말이라는 걸 알기에 화도 나지 않았다.

< 까마귀, 네놈이 부탁해서 해주는 게 아니야. 호영의 의견이 맞다고 여겨 해주는 것이니 감읍하게 여기도록 해.>

혹시라도 자오가 착각하지 않도록 부탁을 들어주는 이유를 정확히 명시해 메시지에 남긴 동백은 바로 옆 방인 자오의 방으로 향했다.

덜컥, 덜컥.

손잡이가 돌아가다 막히는 걸 보니 잠겨있는 것 같은데, 동백에게 큰 문젠 아니었다.

그냥.

빠각!

부수면 되니까.

검집으로 손잡이를 쳐 깔끔하게 날려 버린 동백은 힘없이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동백의 방과 마찬가지로 아주 좁은 방안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사실 정돈되었다기보다 거의 텅텅 비어 있다고 칭하는 게 더 옳았다. 옷가지는 하나도 없고 있는 것이라곤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 하나가 전부였다.

노트북에 꽂혀 있는 USB를 챙긴 동백은 제대로 닫히지 않는 문을 그대로 두고 고시원을 나섰다. 딱히 씻지 않아도 더럽혀지지 않고 노폐물이 쌓이지 않는 몸이라는 건 어찌나 편리한지 스쳐 지나가는 그 누구도 동백이 일주일 동안이나 방에서 씻지도 않고 굴러다녔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앞서 한 번 가 보았으니 자오의 회사를 찾는 건 쉬웠다. 동백은 한 번에 가는 버스를 타고 최대한 느긋한 걸음으로 거대한 빌딩 앞에 도착했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이었다.

동백은 삐딱하게 서서 높은 건물을 올려보았다.

엔터 사업이라니.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까마귀이니 어울린다면 어울렸다.

어디 반짝이는 게 고작 금은보화에 그치겠는가. 인간 또한 그리 빛날 수 있는 것을.

“저….”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동백은 옆에서 들리는 낯선 목소리에 힐끗 시선을 주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짙은 회색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였다. 그는 동백이 고개를 돌리자 더 감탄했는데, 두 눈이 마치 별이라도 만난 듯 반짝거렸다.

“학생 몇 살이야? 혹시 아이돌 지망생인가?”

남자가 건넨 한마디 말엔 맞는 게 하나도 없었다.

동백은 학생도 아니었고 남 앞에서 가무를 하기 위한 지망생도 아니었다. 그러나 한 가지 흥미가 동백의 걸음을 붙잡았다.

별일도 다 있군.

보통 사람들은 동백이 이곳에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기 마련이건만 이 남자는 정확히 동백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끔 귀한 것을 알아보는 안목이 유독 뛰어난 이들이 종종 있는데, 동백은 그런 자들을 ‘눈이 열린 자’나 ‘영안(靈眼)을 지닌 자’라고 불렀다. 보아하니 이 남자 또한 그러한 재능을 지닌 듯싶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백의 시선에 그는 뒤늦게 자신이 꽤 이상해 보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허겁지겁 품에서 작은 명함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아! 나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고 이런 사람이야.”

J.O Entertainment

Management. 기획실장

주윤오

그가 보여준 작은 명함엔 익숙한 회사 이름이 찍혀 있었다. 저런 재능을 가지고 까마귀 아래서 일하는 걸 보니 안타까웠다.

도를 닦았다면 능히 선경에 오를 인재이거늘. 시대가 이러하여 그저 이용만 당하는구나.

그 또한 남자의 운명이라 동백은 가여움을 지우고 의연하게 상대했다.

“나는 학생도 아니고 가무를 지향하는 자도 아닙니다.”

“……어?”

“그럼, 이만.”

동백은 주윤오가 당황스러워하는 사이 재게 다리를 놀려 그에게서 벗어났다.

건물 밖과 안에는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 경비원이 다수 있었으나 동백을 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외부인을 막는 게이트까지 넘어온 동백은 그곳에 서서 잠시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무릇 정보란 흘러가는 말에서부터 시작되는 법.

지금이야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블랙홀이 모든 정보를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고 있으나 기본적인 것은 모두 구전으로 전해지는 법이었다.

“오늘 점심은 뭐 먹을까?”

“주총 오늘이라며. 10층에서 하는 거 맞지? 그 층은 피해 다녀야겠다.”

“대표이사님, 오랜만에 봐도 진짜 잘생겼더라. 평소엔 뭐 하고 지내시는지 몰라도 자주 보이면 회사 생활도 할 만할 텐데.”

동백은 그들의 대화를 모두 귀담아들었다. 물처럼 흐르는 말에서 그는 낚시꾼처럼 필요한 정보를 쏙쏙 낚아 올렸다.

주주총회. 10층. 대표이사 잘생김.

아, 이건 필요 없지.

대표이사가 잘생겼다는 정보를 머리에서 지운 동백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으로 올라와 자오의 기척을 쫓았다. 수많은 기척이 모인 커다란 홀은 조용하면서도 이상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올해 상반기 실적은….”

그래프가 그려진 커다란 화면을 일제히 응시한 시선들이 몹시 뜨거웠다. 동백은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정확히 자오를 찾아냈다.

평소 입던 치렁치렁한 복장은 어디로 갔는지 그는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가장 놀라운 점은 허리를 넘어 허벅지 중간에서 살랑거리던 긴 머리가 목덜미에서 깔끔하게 잘려있었다는 거다.

저런 멀쩡한 모습도 할 줄 아는 놈이 내 옆에선 그러고 다녔던 거야?

가장 상석에 앉아 화면을 응시하던 자오 또한 동백의 기척을 느꼈는지 그린 듯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왔다.

‘선인님.’

모양 좋은 입술이 소리 없이 벙긋거렸다.

망할 자식.

동백은 주머니에서 USB를 꺼내 자오에게 던져주었다. 가볍게 USB를 낚아챈 자오는 목소리가 아닌 술법으로 돌아 나가려던 동백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앞으로 한 식경 정도면 끝날 것 같은데, 오신 김에 조금 기다리시는 건 어떻습니까?」

“내가 미쳤냐.”

「제게 감읍할 기회를 주시면 기쁠 것 같아서요.」

누누이 생각하지만, 저 망할 까마귀 놈은 항상 말은 끝내주게 잘했다. 이 핑계 저 핑계 가져와 척척 붙이는 게 혓바닥에 기름도 바르고 풀칠도 한 게 틀림없었다.

“그러던가.”

바로 돌아가려던 생각을 고쳐먹은 동백은 빈자리에 앉아 지루하기 그지없는 시간을 견뎌냈다.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지 당최 알아먹기도 힘든 것을 자오는 가만히 경청하고 있었다.

동백은 숫자가 잔뜩 적힌 커다란 화면의 그래프를 보는 대신 자오를 가만히 관찰했다.

전에 자오에게 못생겼다 헐뜯긴 했어도 그의 외양이 그럭저럭 괜찮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아래로 내리깔린 속눈썹은 가지런하면서도 길었고 다리를 꼰 무릎에 올려진 손가락은 곧고 예뻤다. 키는 나란히 섰을 때 동백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걸 보아하니 6자 3치 정도는 되어 보였다. 피부는 희지 않으나 그것 또한 특유의 매력이라 퇴폐적인 느낌이 돋보였다.

화면에 집중하던 자오는 문득 시선을 느꼈는지 정확히 동백을 바라보았다. 빤히 쳐다보던 걸 들켰으나 동백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뭐, 어쩌라고.’라는 의미가 다소 포함된 건들거리는 눈빛을 보내며 자오 못지않은 뻔뻔함을 뽐냈다.

의도치 않게 눈싸움을 이어가던 두 사람을 중재한 건 길고 길던 주주총회의 마지막을 알리는 목소리였다.

“이로써 제이오 엔터테인먼트 하반기 주주총회를 마칩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께 썰물처럼 사람들이 커다란 홀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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