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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32화 (33/61)

32화

몇몇 사람들은 자리를 지키는 자오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대표님, 시간 괜찮으시면 식사라도 하시면서….”

“죄송합니다. 선약이 있어서요.”

칼 같은 거절에도 아쉬움을 놓지 못하고 맴도는 이들을 뒤로한 자오는 동백에게 다가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절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셔서 기쁩니다.”

“오냐.”

“그럼 식사부터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저부터?”

“그게 널 다져버리고 싶냐고 묻는 거라면 ‘그렇다.’인데 어때?”

“떡갈비 드시러 가시죠.”

호영이도 그렇고 왜들 이렇게 내 식사를 못 챙겨서 안달이지?

동백은 자오와 함께 홀을 벗어나며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호영이는 그렇다 쳐도 넌 내가 안 먹어도 된다는 거 알지 않아?”

“비록 모든 것을 초월한 신선이라 하여도 미식을 즐길 수 있고 바람을 피할 곳이 필요하며 수치를 가려 줄 옷이 필요하지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의식주를 읊으며 자오는 동백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두 사람의 거리는 이제 한쪽 팔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외양은 동백이 알던 것과 달랐지만 여전히 자오에게선 벽도화 향이 짙게 풍겼다.

“또한, 가장 환심을 얻기 쉬운 것은 무릇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 아닙니까.”

“그게 별 효과는 없을 것 같은데.”

“그야 두고 봐야 알 일이죠.”

어쩐지 자신만만한 자오의 답에 동백의 표정이 대번에 불퉁해졌다. 두고 보면 알긴 뭘 안단 말인가. 세상엔 굳이 결과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10층을 빠져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1층으로 내려온 두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데면데면하게 걸었다. 누군가 본다면 모르는 사이라고 여길 정도로 메마른 동행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이 정도의 거리감을 당연히 여겼다.

“저, 저기요! 잠시만요!”

그런 그들을 막아선 건 허무하게 동백을 놓쳤던 제이오 엔터의 주윤오 기획실장이었다. 정말 아주 잠시 멍해졌던 것뿐인데 그는 순식간에 동백의 행적을 놓쳤다.

조금 전까지 눈앞에 있던 상대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에 그 자리를 맴돌던 그는 회사 내 타고난 미남으로 명성이 자자한 대표이사와 나란히 선 동백을 발견하고 부리나케 달려온 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그리고 그쪽은 아까 나 기억하죠?”

흘러간 시간이라 해봐야 고작 사십 분 남짓이니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던 동백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깐 너무 경황이 없었는데, 정말 생각 없어요?”

“무슨 생각 말입니까?”

자오의 물음에 주윤오의 눈이 어둠에서 광명이라도 찾은 듯 번쩍 빛났다.

“이사님! 제이오 엔터에서 근무 중인 매니지먼트 기획실장 주윤오라고 합니다!”

제 회사에 근무하는 모든 사람의 인적 사항을 꿰고 있는 까마귀는 그가 자신을 소개하기 전부터 이름과 소속된 팀, 지위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내색을 하지 않고 사뭇 반갑게 대꾸했다.

“아, 주윤오 기획실장님이셨군요. 이번에 기획하신 그룹은 잘 되어 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대표이사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던 주윤오는 곧 자신의 목표인 동백을 다시금 두 눈에 가득 담았다. 자신의 눈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아까는 아쉽게 놓쳤지만, 이렇게 다시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다는 건 분명히 이 남자를 연예계에 데뷔시켜야 한다는 운명이라 굳게 믿었다.

“이사님과 아시는 분이라니 더 잘 됐습니다! 제가 아까 이분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할 참이었거든요.”

“제안?”

“혹시 아이돌 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 페이스와 피지컬을 가지고 일반인으로 산다는 건 아름다운 걸 사랑하는 소녀와 여인들의 크나큰 손실 아니겠습니까!”

열성적으로 내뱉는 주윤오의 말에 대한 동백의 평가는 이러했다.

누가 까마귀네 회사 직원 아니랄까 봐 대표나 직원이나 똑같이 혀는 잘 굴리는구나. 아까 분명히 제 의사를 전했던 것 같은데 포기를 모르는 남자였다. 이것 또한 대표나 직원이나 똑같았다.

주윤오는 본격적으로 동백에게 찹찹 침을 발랐다.

“피부는 어떻게 관리하시는지요? 어떻게 이렇게 눈처럼 하얗죠? 콧대도 오뚝하고, 입술 모양도 좋고. 눈도 속쌍꺼풀인 게 모양이 아주 예쁘네요. 키는 한 173 정도 되시죠? 조금 작은 감이 있긴 하지만 워낙 비율이 좋아서 작아 보이지도 않고 옷발도 잘 받고. 근데 다니면서 고양이 닮았다는 소리 안 들어요? 분명 들어봤을 텐데? 근데 또 웃으면 강아지 닮았을 것 같기도 하고.”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칭찬에 동백은 차라리 귀를 막고 싶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외모를 콕콕 집어 칭찬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그럭저럭 괜찮게는 생겼지’라고 생각하던 외모는 주윤오의 입에선 마치 절세미인이라도 된 양 부풀려졌다.

게다가 자오는 이 곤란한 상황이 퍽 재미있는지 벌써 입가를 씰룩이고 있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두 눈이 흥미롭게 반짝이는 걸 보니 또 놈에게 혀를 놀릴 소재 거리 하나를 던져준 것 같았다.

“지인이니까 이미 알겠지만, 우리 제이오 엔터가 업계 최고잖아요! 어딜 가든 우리가 해주는 만큼은 못 받는 거 알죠?”

까마귀 놈의 회사가 업계 최고든, 최하든 동백에겐 하등 상관이 없었다. 자오는 주윤오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슬그머니 머리를 들이밀었다.

“선인님, 노래 잘하십니까?”

묻는 말투가 아주 오묘했다. 분명 잘하느냐고 묻는데 ‘네가 잘하겠어?’라는 별다른 기대감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는 동백의 드높은 자존심을 살살 긁어놓기에 충분했다.

“옛적엔 내 가곡 한 곡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섰다.”

동백이 시에 음률을 붙여 노래를 부르듯 읊으면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비록 한때의 취미로 끝났지만, 동백은 자신이 노래를 못 부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그럼 춤은 잘 추십니까?”

이번에도 똑같았다. 동백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자오를 똑바로 응시하며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먹듯 내뱉었다.

“내 검무 한 번이면 선경의 신선들 또한 넋을 잃고 바라봤지.”

“하여튼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신다는 거죠?”

주윤오가 기회라도 잡은 양 다시 냉큼 끼어들었다. 말투가 좀 특이하긴 해도 요즘엔 이런 것 또한 셀링 포인트로 활용하기 좋았다. 그의 머릿속엔 이미 동백을 필두로 한 남자 아이돌 그룹 하나가 뚝딱 완성되어 있었다.

“그럼 아이돌이 딱이네!”

당장 계약서라도 내밀 것 같이 구는 주윤오를 동백은 질린 눈으로 쳐다봤다. 무슨 말을 해도 들어먹을 것 같지 않았다. 자오에게 ‘네 직원이니 어떻게든 해결해라.’라고 눈치를 줘도 그는 옆에서 오히려 “선인님 잘 어울리시네요!”라고 주윤오를 부추기기 바빴다.

망할 놈.

“이봐요.”

제법 근엄한 목소리가 동백으로부터 흘러나왔다. 목소리에 은은한 선기를 실어 위엄을 담았으니 주눅이 드는 것이 마땅하건만 주윤오는 멀쩡했다.

동백은 그 이유를 금방 알아차렸다. 자오의 눈꼬리에 웃음이 조롱조롱 달려 있었다. 제 사기로 동백의 선기를 틀어막은 까마귀의 행태에 신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검파를 꾹 움켜쥐었다.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들던 자오는 그 즉시 사기를 거두어들였다. 동백을 골려 먹는 게 좋은 거지 도심 한복판에서 칼부림을 당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동백에게 잘 보이려는 노력과 비례해 이런 점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점수를 더 깎아 먹는다는 걸 알지만 이런 짓궂음은 본능이라 자제하기가 힘들었다.

자오가 물러선 것을 확인한 동백은 그를 잠시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노려보다가 주윤오를 응시했다. 세월만큼 깊어진 눈동자와 스스로를 깊이 탐구하여 빚어진 오만함이 주는 무게감이 묵직하게 주윤오의 어깨를 짓눌렀다.

“다시 말하지만 난 가무에 뜻이 없으니 다른 사람을 알아보는 게 좋을 겁니다.”

무릇 위엄이란 두려움과 공존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존재 자체의 격이라. 주윤오는 그 순간 동백에게서 범접할 수 없는 경애를 느꼈다.

“…네.”

주윤오에게서 다소 힘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 대답엔 그가 느끼는 애달픈 아쉬움, 착잡함이 다소 섞여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친 동백은 그 누구보다 반짝이고 빛나고 있었다. 저 반짝임을 누구나 볼 수 있어야 하건만 그러지 못하는 게 못내 애틋했다.

완전히 혼이 빠진 주윤오를 두고 자오는 동백에게 이리 말했다.

“선인님도 사람 좀 많이 홀려보신 모양이군요.”

“부러우면 너도 홀려주랴?”

“이미 홀린 것처럼 보이지 않나요?”

퍽이나 그리 보이겠다. 육시랄 놈.

코웃음을 친 동백이 여전히 넋을 놓은 주윤오의 눈앞에 손을 가볍게 흔들어 주의를 끌었다.

“아해야. 정신 차리고 가서 일해야지.”

그러나 주윤호는 여전히 멍하니 동백의 얼굴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위엄을 드러내서 조절을 잘 못했나?

쉬이 정신을 차리질 못하니 조금 걱정되긴 했다. 이쯤 되면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하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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