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주윤오는 동백의 걱정이 조금 더 깊어지고 나서야 제정신을 차렸다. 이걸 제정신이라고 봐야 하나 잠시 고민했던 동백은 점차 나아지는 모습에 안도했다. 여전히 말도 버벅거리고 멍해 보였지만 움직이긴 하니 차차 정신이 들 터였다.
“제가…. 제가 감히 성함을 여쭈어도 될까요?”
처음엔 반말이었다가 다음은 존댓말 이제는 극존칭으로 변화한 주윤오의 극진한 말투가 참으로 극적이었다. 이름을 알려주지 않으면 당장 드러누워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질 기세에 동백은 귀찮은 거머리를 떼어내듯 성의 없이 툭 내뱉었다.
“동백.”
“동백…. 동백…. 알겠습니다. 동백 님.”
여전히 제정신이 아닌 듯 보이는 주윤오의 모습에 자오가 허리를 숙여 동백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거 괜찮은 겁니까?”
“괜찮아. 그냥 좀 홀린 거야.”
본디 눈이 열린 자들은 삿된 것에 홀리기도 쉽고 반대로 길한 것에 홀리기도 쉬웠다. 저건 좀 약발이 과하게 들어간 것뿐이니 문제 될 건 없었다.
길어봤자 일주일?
그 정도면 아마 제정신을 차릴 테니 동백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 사이에 무슨 사고를 치겠는가.
“이제 가자. 오늘은 이상하게 운수가 좋지 않으니 바로 고시원으로 돌아가야겠다.”
떡갈비고 뭐고 이런 날엔 방 안에 콕 틀어박혀 있는 게 최고였다.
“식사는….”
“됐어! 안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호영 군이 그리 좋아하진 않을 텐데요.”
“여기서 갑자기 호영이가 왜 나와?”
자오의 입에서 대뜸 언급된 호영의 이름에 동백이 예민하게 눈을 치떴다. 망할 까마귀 놈이 제 입맛대로 호영의 이름을 휘둘러 쓰는 게 언짢기 그지없었다. 동백이 불편한 기색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얼굴을 쿡쿡 찌르는 시선이 제법 따끔할 텐데도 자오는 생긋 웃으며 뻔뻔하게 말했다.
“호영 군이 제게 부탁했으니까요.”
“허?”
자오는 핸드폰을 꺼내어 호영에게 온 메시지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또박또박 읽었다.
“‘형, 동백 형 식사 좀 챙겨줘요. 안 먹는다고 하면 직접 떠먹여서라도 먹여야 해요.’라는군요. 저는 마음이 관대한지라 이런 부탁을 쉬이 거절하지 못하겠더라고요.”
“거짓말! 그런 내용은 없는데!”
동백 또한 핸드폰을 꺼내 초콜릿톡을 확인했다. 마지막 대화는 자신이 보냈던 메시지가 끝이었다. 자오가 읊었던 내용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눈에 불을 켜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동백에게 자오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개인톡입니다. 선인님.”
호영이가 이럴 수가.
동백이 망연자실하게 고개를 푹 숙였다. 부탁할 놈이 없어서 까마귀에게 그런 부탁을 한단 말인가.
“일주일 내내 방에 처박혀서 제대로 식사도 안 하시니 인과로 돌아오신 겁니다.”
자오는 주머니 안에서 동백이 가져다주었던 USB를 꺼내어 놀리듯 던졌다 받았다. 그러고 보니 주주총회에 저게 필요하다고 해 놓고 쓰는 꼴을 보지 못했다.
동백은 뒤늦게 두 눈을 부릅떴다.
이건….
이건, 처음부터 함정이었던 거다.
이 함정을 판 것이 호영인지 아니면 자신의 옆에서 얄밉게 웃고 있는 까마귀인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다만 명확한 건 그들의 목적이 일치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럼, 식사하러 가실까요?”
자오의 손에서 다시금 동백이 참패했다는 증거인 USB가 높게 퉁겨졌다.
◆
동백의 밥그릇 위로 가시를 바른 두툼한 생선 살 하나가 가지런히 놓였다.
잔가시마저 어찌나 섬세하게 발라냈는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모양새가 꼭 생선을 그대로 옮겨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너무 크지도 않은 것이 한입에 먹기 좋은 크기였다. 그러나 동백은 삐뚜름한 눈으로 능청맞게 구는 자오를 노려보았다.
“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선인님께선 생선은 안 좋아하시나요? 그래도 드셔 보세요. 비리지도 않고 간도 적당해서 여기 가자미는 모두가 좋아하더라고요.”
자오의 긴 손가락이 우아하게 젓가락을 움직이며 작은 가시들을 골라냈다. 그저 지금은 동백의 식사를 수발드는 게 제 할 일이라는 듯 까마귀는 다음엔 잘 구워진 떡갈비를 가져와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다.
동백은 잠시 고민했다.
자오의 회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정식집은 기단과 주춧돌을 쌓아 올리고 그 위로 기둥을 세워 지은 전통 양식의 한옥이었다. 마침 그들이 있는 곳은 개별로 지어진 별채라 외부와 차단된 곳이니 이 건방진 놈의 머리에 젓가락을 박아도 괜찮지 않을까.
그동안 사람들 사이에 숨어 깐죽거리던 자오의 모습이 동백의 머릿속으로 마치 영화 필름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세 번의 질문이고 뭐고 그냥 깔끔하게 죽여버리면 고민거리도 사라지는 거 아닌가?
고민의 바늘이 거의 ‘공격하자’에 기울어갈 때쯤 심상찮은 동백의 기색을 읽어낸 것처럼 자오가 타이밍 좋게 입을 열었다.
“그보다 박물관에서 눈여겨보셨던 물건들 말입니다.”
“…….”
“제가 샀습니다.”
샀다고?
동백의 눈이 당혹으로 둥그렇게 뜨였다. 아무리 사립이라 해도 박물관에 전시된 물건을 사사로이 구매할 수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들었다.
“아, 정확히는 그 물건들만 산 게 아니라 박물관을 운영하는 도화 재단 자체를 인수했다고 해야 할까요? 구석진 곳에 있는 데다가 입장료는 무료에 후원금만으로 운영되던 곳이니 아무래도 좀 벅찼던 모양입니다. 제가 구매 의사를 밝히니 후다닥 팔아치운 걸 보면.”
이거 진짜 미친놈인가?
“지금 미친놈이라고 생각하셨죠?”
정확히 동백의 생각을 읽어낸 자오는 잔웃음을 흘렸다.
“선인님과 달리 저는 꽤 욕심이 많아서 갖고 싶은 건 뭐든지 가져야 성이 차거든요.”
“그래서 박물관도 샀냐?”
“이 정도는 필요에 의한 작은 지출이지 않겠습니까.”
살아온 세월이 기니 자오가 쌓아온 부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는 건 예상했었다. 동백은 금방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축하라도 해주랴?”
“하하, 아뇨. 고작 돈으로 산 것으로 선인님의 축하를 받을 순 없죠. 그저…말씀드리고 싶었달까요.”
달콤한 말과 달리 뱃속엔 칼을 품고, 상냥하고 친절한 웃음 속엔 날카로운 칼날을 드리웠구나.
칼자루를 쥐고 이리저리 휘두르고 싶어 안달이 난 꼴을 보아하니 이 또한, 동백의 반응을 떠보기 위함이라. 동백은 친절 속에 숨겨진 독을 한껏 집어삼키며 싱긋 웃었다.
“기왕 샀으니 잘 운영해 보던가.”
그 독에 내가 죽을 일은 없을 테니.
“그래야지요.”
동백은 앞에 놓인 음식이 자오라도 되는 양 꼭꼭 씹어 삼켰다. 음식의 맛은 몹시 뛰어났으나 모래라도 씹는 것처럼 버석거렸다.
“선인님께선 식사하시고 나서 바로 고시원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 또한 새가 들으니 그리하여야지.”
“그 새에겐 참으로 복된 상황이로군요.”
하여튼, 한 마디도 안 지려 들지.
적당히 음식을 비운 동백은 수저를 내려놨다. 어차피 배를 채우려 먹는 것이 아니라 맛을 느끼려 먹는 것인데, 입이 껄끄러워 더 먹기가 힘들었다.
“더 안 드십니까?”
“됐어. 이 정도도 과해.”
정작 제 놈은 하나도 안 먹어놓곤.
동백은 제 앞에 수북하게 쌓인 음식을 확인하곤 짧게 혀를 찼다. 바지런히 먹이를 물어다 나르는 어미 새처럼 자오가 제 앞에 쌓아둔 음식이었다.
마지막으로 따뜻한 차 한 잔을 비운 동백이 일어날 채비를 하자 자오는 냉큼 먼저 밖으로 나와 동백의 신을 챙겼다. 비싼 옷이 더럽혀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 앉아 신겨주겠다는 듯 준비하고 있는 모양새에 동백은 기가 차 짧은 숨을 토해냈다.
“의외로 종노릇이 꽤 적성에 맞나 보지?”
“저도 몰랐는데, 그런 모양입니다.”
동백이 마루 끝에 걸터앉자 자오는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조심스레 동백의 발목을 붙잡았다. 약간 짧은 바짓단 아래로 복사뼈가 소담스레 드러나 있었다.
그것을 엄지로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자오는 새 신부에게 준비한 꽃신을 신기듯 남루한 운동화를 신겼다. 동백은 처음으로 자신의 시야보다 아래에 있는 자오의 정수리를 응시하며 피부에 닿는 그의 체온을 느꼈다.
계단에서 종아리를 쥐고 매달렸던 때에도 느낀 거지만 이 까마귀 놈은 유독 손이 뜨거웠다. 서늘한 피부를 지닌 자신이기에 더 그리 느끼는 것일 수도 있을 터. 그러나 분명 낮은 체온은 아니었다.
“다 됐습니다.”
끝을 고하는 자오의 말에 동백은 냉큼 그의 손아귀 안에서 벗어났다. 이상하게 살이 맞닿았던 발목이 화인이라도 새겨진 듯 화끈거렸다.
“불편한 곳은 없으신지요?”
마지막까지 동백을 챙기던 자오는 멀리서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한 여인을 발견하곤 반가운 이를 만난 것처럼 느른하게 입가를 끌어올렸다.
“식사는 맛있게 하셨나요?”
머리 위로 새하얀 눈이 내린 그녀는 푸른빛의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있었다. 세월이 공들여 새긴 주름은 그녀가 지나온 일흔의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언제나처럼 잘 먹었네.”
자오의 대답에 그녀는 작은 웃음을 흘렸다.
“그런 것치고는 거의 드시지 않지요?”
그들이 나온 별채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안다는 듯 자오와 시선을 맞추며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가던 여인은 이번엔 동백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가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몹시 놀란 듯 흔들리던 두 눈은 이내 옆에 선 자오와 동백을 번갈아 살피다 차분해졌다.
“…두 분은 친구이신가 봅니다.”
“친구 아닙니다.”
앞으로 그와 마주칠 일이 거의 없는 사람일지라도 까마귀와 친구로 한데 묶여 기억되는 건 사양이었다. 동백은 자오가 먼저 입을 놀리기 전에 재빨리 단호하게 잘라냈다.
그런 동백을 무례할 정도로 빤히 바라보던 여인은 곧 세상의 모든 근심을 덜어내듯 환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식사는 입맛에 맞으셨나 모르겠네요.”
“맛있었습니다.”
“다행이네요.”
자부심이 느껴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동백은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한 삼십오 년 전쯤이었나?
재능은 있으나 돈이 없어 그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는 여인을 도운 적이 있었다.
그녀가 동백과 가까운 사이였느냐?
전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