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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34화 (35/61)

34화

동백은 그녀의 이름도, 나이도 심지어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적도 없었다. 그저 스치듯 지나가는 이웃이라는 위치가 동백과 그녀의 접점의 전부였다. 나눈 대화라고는 “안녕하세요.”가 전부인 사이였을 뿐인데, 동백은 그녀가 지닌 반짝임에 주목했다. 그대로 시들어 스러지기에 그녀가 지닌 희망과 꿈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안타까웠다.

고작 돈이라는 것이 없어 세상에서 빛 한 번 내보지 못하고 사라지는 게. 이대로 시들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동백은 그가 지닌 모든 금을 팔아 만든 돈을 그녀에게 주었다.

사실 ‘주었다’라는 단어는 좀 어폐가 있긴 했다.

동백은 돈을 강제로 떠넘기고 야반도주했다.

그래, 이 문장이 더 잘 어울렸다. 받지 않으려 들 게 뻔하기에 편지 한 장과 함께 떠넘기곤 그녀가 자신을 찾지 못하도록 바로 도망쳤다.

당시엔 조금 충동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주 오랜만에 본 반짝임에 홀려 모든 걸 다 내어주고도 아깝지 않았었으니까.

그 뒤로 오 년을 밤이슬을 이불 삼아 지냈어도 후회하진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감사합니다.”

목이 멘 듯 조금 뒤늦게 나온 그녀의 감사 인사에 동백이 고개를 기울였다.

“별말씀을요. 기회가 된다면 또 올게요.”

외따로 떨어진 별채서부터 거대한 대문까지 그들을 배웅한 여인은 자오와 동백을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부디 자주 뵙길 바랍니다.”

과할 정도로 정중한 인사였다. 그녀는 다시금 허리를 곧게 펴고 동백과 시선을 마주했다. 주름진 눈가와 달리 그녀의 눈은 무척이나 맑게 빛나고 있었다. 동백은 그 눈빛에서 묘한 익숙함을 느꼈다.

그가 도왔던 그녀의 나이는 모르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흐른 시간을 따져보면….

…아?

뒤늦은 깨달음을 얻은 동백이 다시금 여인을 지그시 응시했다. 지금의 얼굴 위로 동백이 기억하고 있던 아주 오래전 모습이 덧씌워졌다.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구나.

그가 비료를 주고 키우려 애썼던 꽃은 이미 활짝 피어 사방에 반짝임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 빛에 이끌려 온 것이 사람뿐만 아니라 요수도 있다는 게 통탄할 만한 일이긴 해도 어쩌겠는가.

그게 바로 세상의 이치인 것을.

동백은 거대한 대문을 지나며 제 옆에 선 자오를 힐끔 올려다봤다.

이곳의 주인이 자신과 연이 닿아 있다는 걸 알고서 데려온 건가 싶어도 자오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분명히 주인의 반응을 봤을 텐데.

기민한 놈이니 이상함을 느껴도 이상치 않은데, 조용한 게 오히려 더 수상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 설레발을 치고 싶지도 않고.

“선인님, 가실까요?”

그사이 택시를 잡은 자오의 부름에 동백은 그를 유심히 관찰하며 택시에 올랐다.

그 여인을 도왔다는 게 자오에게 알려진다고 하여 동백이 어떠한 피해를 보는 건 아니었다. 다소 충동적으로 인간 하나를 도운 것뿐이니까.

하지만, 이번이 두 번째였다.

인과 연이라는 것은 아주 오묘하여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지라도 과거에 어떤 연이 닿아 있는지 몰랐다. 그런 것이 인연일 진데, 동백과 자오의 인연은 과거부터 시작해 현재로 맞닿아 있었다.

그가 이름을 버리며 만든 무덤을 파헤쳤던 어린 까마귀는 신선으로서 동백이 도운 여인을 다시 도왔다.

대체 나는 어떠한 흐름에 휘말린 것인가.

그저 흘러가게 두어 도착한 종착지가 과연 비극일지 희극일지 그는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지금은 그저 이 까마귀의 엉큼한 속내를 파헤쳐 보는 게 먼저였다.

동백이 그녀와 관계가 있다는 걸 알고서 그곳으로 데려간 것인지 아니면 그저 우연인지.

“알고 있어?”

일부러 떠보듯 던져진, 주어가 정확히 지칭되지 않은 물음에 정면을 느른히 응시하던 자오가 동백을 곁눈질했다.

“저와 스무고개라도 하고 싶으신 건가요?”

뻔뻔하게 시치미를 떼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건지 모호한 반응이었다.

자오가 정면을 향해있던 몸을 동백 쪽으로 틀어 앉자, 깊이가 가늠되지 않아 감정을 쉬이 알아차리기 힘든 까만 눈동자 가득 동백의 모습이 비쳤다.

“아니. 넌 묻는 말에 대답만 해.”

“세 번의 기회를 사용하진 않으시는 거고요?”

“그냥 간단한 질문이야.”

이리저리 가늠하며 툭, 툭 시트를 가볍게 두드리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멎었다.

“좋습니다. 제게 뭘 묻고 싶으신가요?”

자오의 허락에 동백은 대수롭지 않은 질문을 던지듯 가볍게 말했다.

“주인과 아는 사이처럼 보이던데.”

“주인이라면…. 아, 한정식집에서 마주쳤던 인간 말이군요.”

동백이 작은 눈짓으로 긍정했다.

“회사에서도 가깝고 누군가를 데리고 가기도 좋은 곳이니 자주 가는 편입니다. …라는 대답을 바라고 물으신 건 아니시겠죠?”

동백이 그에게 물은 건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낸 ‘한아’가 아니라 그의 본질에 조금 더 가까운 ‘자오’로서 그녀를 알고 있냐는 물음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우스갯소리를 먼저 지껄인 까마귀는 기어이 살포시 일그러지는 동백의 미간을 확인하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하여튼, 육갑 떨기는.

찌푸렸던 미간을 겨우 다시 편 동백이 이어지는 자오의 말을 조용히 경청했다.

“선인님께서는 인간에게 가장 독이 되는 감정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답을 바라지 않는 질문을 던진 자오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으면서도 가장 은밀하게 죽음으로 내모는 두 얼굴의 살인마.”

희망이군.

“희망이죠.”

가장 역설적이며, 벼랑 끝에 내몰린 인간이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끈. 그게 썩은 동아줄일지 아니면 정말 그 인간을 구원할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 채 아등바등 붙잡는 마지막 절망.

동백은 저도 모르게 쓰게 웃었다.

자신 또한 오지 않을 날을 꿈꾸며 지금껏 그 동아줄을 붙잡고 버티고 있기에.

“어중간한 희망만큼 절망스러운 것이 있을까요. 그녀는 조용한 절망에 조금씩 갉아 먹히며 자신이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미련하게 나아가던 여인이었습니다.”

자오의 말이 동백의 가슴을 날카롭게 할퀴었다.

동백이 그녀에게 베푼 것은 선의였으나 동시에 어중간한 희망이었다. 어쩌면 오만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동백의 낯이 어두워졌다.

“그래도….”

그런 동백을 향해 자오는 마치 위로하듯 다정하게 읊조렸다.

“그녀는 처음 자신을 도와주었던 사람에게 깊이 감사한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이 있어서 제가 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고.”

“…….”

“제가 드린 답이 선인님이 원하셨던 답인가요?”

원하던 답이냐고?

동백의 눈이 대번에 삐죽해졌다.

오냐, 아주 빙빙 돌려 말하느라 고생했다.

자신도 직설적으로 묻지 않았지만 이놈은 더했다. 세상의 모든 까마귀 요수가 이런 건지 아니면 이놈이 특히 성격이 나쁜 건지 잘 모르겠다. 그가 본 까마귀 요수는 자오 하나뿐이니.

이 성격 나쁜 놈이 제 이야기를 목적 없이 술술 늘어두었을 리 없었다.

아마 그냥 대답했다면 ‘제게 은혜를 입은 사람.’ 정도로만 답했겠지.

이미 동백이 그녀를 도와주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이야기를 꺼내며 은근히 반응을 살피는 게 음흉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사이 택시는 목적지에 다다라 정차했다.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고 내린 동백은 택시비를 치르고 뒤따라 내린 자오를 쏘아봤다.

그가 자신의 뒤를 캐고 다닐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뭐 이런 것까지 시시콜콜 알고 있단 말인가.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의 집착과 집념이었다.

“전 선인님이 이렇게나 궁금한데….”

까마귀는 느린 걸음으로 동백에게 다가섰다.

“선인님은 아직도 제게 궁금한 게 없으신가요?”

세 번의 질문 기회.

동백은 아직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채였다.

오래전 충동적으로 이름 모를 여인을 도왔듯, 동백의 입술이 달싹였다.

“대체 넌 뭐야.”

명확하지 않은 동백의 질문에 자오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본질을 묻는 것인가.

그렇다면 까마귀라 답하면 되었다.

이름을 묻는 것인가.

그렇다면 자오라 답하면 되었다.

하지만 동백의 물음은 근원을 묻는 것에 가까웠다.

자오는 자신에게 던져진 첫 번째 질문에 그 무엇도 답할 수 없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는 까마귀였다.

처음 폐허가 된 마을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그는 자신이 까마귀라는 본질을 알았다.

또한, 그는 영물이면서도 요수이고 요수이면서도 요괴였다.

그럼 자신은 대체 무엇인가.

까마귀는 자신을 칭할 수 있는 모든 단어를 알아냈지만, 그 무엇도 온전히 자신을 나타낼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어딘가 텅 비어버린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지금껏 살아왔고, 이제야 그 실마리를 붙잡을 수 있었다.

“그 질문은….”

부쩍 차가워진 바람이 어느새 길어진 자오의 머리칼을 손톱으로 할퀴듯 헤집어두었다.

짤랑― 짤랑―

허리춤에 매달린 노리개 또한 그 바람에 흔들리며 맑은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제가 답을 찾은 이후에 말씀드려도 될까요?”

인간들 앞에 서기 위해 만들어 낸 모습이 아닌, 조금 더 본질에 가까운 모습으로 동백과 마주한 자오의 발아래 한쪽 날개가 잘린 새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제 손으로 날개를 잘라낸 까마귀는 자신에게 독이 될지 모르는 희망을 들이켜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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