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四. 귓가에 속삭이는 원망.
“흐에엥~! 신선님 저 좀 살려주세요!”
호흡에 훌쩍임이 섞여든 엄살이 자오의 고막을 강타했다. 키보드를 가볍게 두드리던 손가락이 우뚝 멈췄다.
아무리 그라도 한 가지 일에 몰두하다 보면 주변에서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였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이란 건 회사 외적인 일도 중요하지만 결국 회사에 속한 아티스트들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그가 지시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큰 틀은 잡아주어야 하기에 메일 작성에 몰두하던 자오는 다시금 울려 퍼지는 비명에 노트북을 덮었다.
일하긴 글렀군.
요즘 동백과 어울려 다니느라 미뤄두었던 일을 처리하려 했건만. 오늘도 그른 모양이었다.
아직도 문고리가 부서져 있는 자신의 고시원 방을 나온 그는 밖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따라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자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동백은 몸선이 참으로 예뻤다. 무인으로서 오랜 시간 동안 지낸 탓도 있겠지만, 애초에 타고난 몸 자체가 비율이 바르고 어디 하나 모난 곳이 없었다.
대충 자른 듯한 거친 머리카락 아래 보이는 뽀얀 목덜미는 사내든 여인이든 음심을 자극할 만한 묘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본인은 청초한 학처럼 구니 적당히 문란하게 살아온 자오로선 어느 쪽으로든 흥미가 동했다.
수백의 요수를 베어 넘기면서도 차가운 이성을 잃지 않는 살인귀이며 때로는 하찮게 틱틱대는 고양이 같은 신선이라.
다시 동백을 만났을 때 했던 말처럼 정말 아쉬웠다.
진즉에 만났다면 이 무료한 생이 조금 더 즐거웠을 것을.
울며불며 머리를 끌어안고 매달린 어둑서니를 귀찮아하면서도 동백은 차마 녀석을 떼어내지 못했다. 발치엔 호범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아 무슨 일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리 싫으면 제게 하는 것처럼 검이라도 뽑아 들어 단번에 베어내면 될 텐데. 동백은 그러지 않았다. 분명 짜증스러워하는 건 맞는데 이상하게 손속이 매섭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고고한 신선님께선 인내심이 깊은 편이었다.
자신을 감당하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그랬다.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들며 얄밉게 굴고 있으니 검을 뽑아도 수십 번은 뽑아야 했을 텐데, 동백은 짜증만 냈을 뿐 그를 공격하진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신선은 묘하게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 짜증은 났는데 어쩔 줄 모르는 듯 어중간하게 들린 양손이 그랬다. 눈가를 찌푸린 채 이리저리 구르던 짙은 적갈색 눈동자가 비로소 자오를 발견하고 살짝 크게 뜨였다.
“야! 왔으면 구경만 하지 말고 이놈 당장 떼어내!”
방금 반가워하지 않았나?
찰나에 스쳐 지나간 감정은 금방 짜증으로 변질하여 거친 말투를 우르르 쏟아냈다. 자오는 제게 더 불똥이 튀기 전에 동백에게서 어둑서니를 떼어내 저 멀리 던졌다. 가차 없는 손길에 어둑서니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 뒤를 호범이 쏜살같이 뒤따랐다.
“흐에에에에!”
호범의 작은 앞발이 어둑서니를 퍽퍽 내리쳤다. 울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며 어둑서니는 애처로울 정도로 벌벌 떨었다.
“호범아.”
동백의 부름에 어둑서니를 쥐잡듯 잡던 호범이 냉큼 발치로 달려와 몸을 비벼댔다. 동백의 영역에서 어슬렁거리던 요괴를 잡았다고 칭찬을 바라는 몸짓에 가까웠다.
그런 호범을 가볍게 쓰다듬어 준 동백은 여전히 귀가 쟁쟁 울리는지 붉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네놈, 왔으면 재깍재깍 튀어와서 도울 것이지 뭐 좋다고 구경이나 하고 있어?”
확실히 자신도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이 고양이 같은 신선께서도 성격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게 유독 자신에게 더 그런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선인님께서 요괴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지금 아니면 또 언제 보겠습니까.”
“누가 쩔쩔맸다고.”
쩔쩔맸는데.
자오는 굳이 그 사실을 다시 짚어주지 않았다. 뭐든 깐죽거릴 땐 분위기와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하는 법이라. 지금은 동백의 심기가 불편하니 굳이 벌집을 들쑤셔 놓을 필욘 없었다.
대신 그는 주제를 돌려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도했다.
“새로 들여온 고양이가 집 지키던 쥐를 잡았군요.”
자오의 말에 호범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하악거렸다. 동백이 그를 공격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어도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동백을 등에 업은 어린 호랑이 새끼의 호가호위에 자오는 픽, 작은 웃음을 흘렸다. 평소의 그라면 벌써 저 건방진 놈의 몸을 반으로 찢어두었을 테지만 이곳에서 자오의 서열은 호범보다도 낮았다.
“읏차, 호범아.”
의기양양하게 꼬리를 세운 호범을 안아 든 동백이 여전히 세상이 떠나가라 울고 있는 어둑서니를 가리키며 잠시 고민했다.
“저놈은….”
또 마땅한 호칭을 고르고 있는 모양인지 침묵이 꽤 길었다.
동백 왈 ‘등을 맡길 수 없는 동료’인 자오는 과연 어둑서니가 어찌 불릴지 약간의 기대감을 지닌 채 고대했다.
“유용한 경비 친구이니 때리면 안 돼.”
“…….”
‘유용한 경비 친구’
유용한?
자오의 이마에서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세운동에서 놀고먹고 있는 저놈이 자신보다 더 유용하다는 말인 건가 지금?
동백이 너는 자존심도 없냐고 물었을 때보다도 더 자존심이 상했다. 지금껏 제가 동백에게 해준 것만 해도 저놈보단 유용하다고 자부할 수 있건만, 어째서 자신은 ‘등을 맡길 수 없는 동료’이고 저놈은 ‘유용한 경비 친구’란 말인가.
“알겠지?”
동백은 호범에게 다정하게 일러주며 저 멀리 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는 어둑서니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자 둘이 화해하자.”
자신을 상대할 때와는 퍽 다른 상냥한 어조였다. 표정도 누글누글 풀어진 것이 매섭던 눈가가 강아지처럼 순했다.
동백이 눈물, 콧물 게다가 바닥의 흙먼지가 섞여 엉망이 된 어둑서니를 제법 능숙하게 토닥였다.
“너도, 호범이가 미안하대. 뚝 그치자.”
“히잉….”
저놈은 요괴라서 그런 건가? 아니면 어린애 모습이라서?
동백의 적대감은 주로 요수에게 쏠려 있었다. 요수나 요괴 모두 가리지 않고 죽였다곤 하지만, 주로 동백이 사냥한 것은 요수였다.
그가 선경에 간 한 달간 자오도 그저 멍하게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바지런히 움직이며 동백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 하는 요수나 요괴들을 찾아가 조곤조곤 을러 모든 걸 토해내게 했다.
가끔 뭘 믿고 버티는지 모를 놈들은 살포시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모은 정보들은 꽤 흥미로웠다. 산발적으로 흩어져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던 정보들을 모아두니 그가 살아왔던 시간이 어렴풋하게 비쳤다.
그것도 악명 쪽으로.
하나같이 동백의 이름을 꺼내면 먼저 나오는 단어가 ‘미친 신선’이었으니 오죽할까. 동백의 악명을 재확인하는 시간이었으나 한가지 성과도 거둔 듯했다.
‘그 미친 신선? 흠…내가 알기론 애들을 좋아해. 안 믿기지?’
처음 들었을 땐 헛소리인 줄 알았는데 그나마 건진 진실이었다니.
자오는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움직임에 긴 머리칼이 부드럽게 흩어졌다.
그렇다면 동백이 지금 어둑서니에게 한결 유한 것은 저놈이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인가. 아니면, 그가 요수가 아닌 요괴라서인가.
알아보려면 실험해보는 수밖엔 없나?
그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건장한 성인 남성의 몸은 여러모로 편리했기에 자오는 오랫동안 이 모습을 유지했다.
정해진 형체가 없는 요괴와 달리 요수들이 모습을 바꾸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머리카락을 조절하는 정도야 쉽지만, 온몸의 뼈를 뒤틀고 다시 짜 맞추는 일이 간단하게 이루어질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한 번 모습을 바꾸면 적어도 한 달은 그 모습으로 다녀야 할 텐데, 자신은 벌여놓은 일도 있었고 아이의 몸이라는 건 여러모로 불편했다.
“어차피 하는 일도 같은데 서로 친하게 지내자. 자 악수~”
어둑서니의 한 손과 호범의 앞발 하나를 쥐고 강제로 화해의 장을 열던 동백이 자오의 시선을 느끼고 털을 잔뜩 세운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으르렁거렸다.
“넌 뭘 봐. 구경났냐!”
…한 달.
투자가치는 충분했다.
◆
뭐야, 까마귀 놈 외박이야?
잠에서 깬 동백은 옆방의 기척을 확인했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오의 기척은 희미하지만 그가 못 느낄 정돈 아니었다.
애초에 자오는 고시원에서 기척을 따로 숨기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놈의 심장 소리도 거슬리고 숨소리도 거슬리고 심지어는 놈에게 짙게 밴 벽도화 향기도 거슬렸을 터.
눈앞에서 알짱거려도 거슬리고 안 보여도 거슬린다니.
제 근원을 물어도 답도 못 하는 반푼이 녀석은 동백의 심기를 거스르기 위해 태어난 게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