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어제 어둑서니와 호범에게 신경 쓰느라 잠시 한눈판 사이 사라진 놈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동백은 묘한 짜증을 느꼈다.
뒤로 또 무슨 짓을 하고 다닐지 가늠이 안 돼서 그런가.
음…. 연락해볼까.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린 동백은 부정한 것이라도 만진 듯 화들짝 놀랐다. 까마귀가 안 보이면 좋아해야지 연락할 생각을 하다니. 아무래도 단단히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핸드폰을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동백은 검을 챙겨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근래 흐트러진 정신상태를 좀 다듬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마침 묘시에 맞춰 일어났으니 가볍게 몸이나 풀 생각으로 동백은 고시원을 나서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산을 오르면 더 좋겠으나 이 근처엔 마땅히 오를 산이 없었다. 차선책으로 선택한 이른 아침의 공원은 운동을 나온 몇몇 노인과 출근길을 서두르는 이들만이 스쳐 지나갔다.
스르릉―
동백의 손길에 상앗빛 검집에서 끌려 나온 검은 오랜만의 차가운 공기에 기분 좋게 몸을 울렸다.
동백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바람이 제법 매서워져 있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이빨이 닥닥 부딪힐 정도로 차가워지리라.
그러나 지금은 상쾌하고 개운했다.
텁텁한 도시의 매연을 밀어내듯 검 끝이 부드럽게 허공을 유영했다. 물에 노니는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검로를 그리면서도 때론 먹잇감을 낚아채듯 매서웠다.
그는 악명높은 혈화로서 아주 오랫동안 패도(霸道)의 검술을 사용해 왔다. 압도적인 힘으로 몰아붙이는 검술은 항상 동백이 승리를 거머쥐게 도와주었다.
하지만, 까마귀 놈은 다르지.
동백의 감긴 눈꺼풀 아래로 익숙한 형상이 새겨졌다.
바람에 나풀거리며 흔들리는 긴 머리칼, 여유만만한 능글맞은 표정, 그놈이 움직일 때마다 울리는 맑은 노리개 소리, 가벼우면서도 땅을 박차는 묵직한 몸의 움직임.
모든 게 선연했다.
투갑을 낀 자오는 상상 속에서도 얄밉도록 침착하게 그를 응시했다.
신체 조건은 동백보다 자오가 훨씬 뛰어났다. 까마귀는 자신보다 약 6치 정도 컸다. 키가 크니 팔도 길고 그만큼 공격 범위도 넓었다.
그래봤자 검이 더 길지 않느냐고?
동백은 첫 격돌을 떠올렸다. 놈의 손아귀에 검을 붙잡히면 끝이었다. 억지로 벗어나려 하면 검이 부러질 것이다.
그를 경계하듯 검을 세운 동백을 향해 상상 속 자오가 비죽 웃었다. 어째 상상인데도 뒤통수를 때려주고 싶은 얄미움이 묻어났다.
확 그냥.
자오는 동백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뎌 도약하자 자연스레 옆으로 비켜서며 손을 뻗어왔다. 가까스로 공격을 막아내도 검과 달리 손은 두 개라 다른 손이 단숨에 동백의 목덜미를 꿰뚫을 듯 쇄도했다. 오히려 자오의 품으로 파고든 동백은 정확히 오른쪽 어깨를 노렸다.
단번에 잘라내지 못하면 죽는다.
그러나 상상 속에서도 동백은 자오의 팔을 한 번에 날려 버리지 못했다. 살짝 몸을 비틀어 벗어난 상상 속 자오는 지금껏 동백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잔혹함을 드러내며 그의 목을 꺾었다.
참패였다.
“졌네….”
상상 속 자오와 겨룬 것은 오 분도 되지 않건만 짧은 사이 땀이 비가 오듯 흘렀다. 대충 상의를 끌어와 이마를 닦은 동백은 검을 정리하고 거칠어진 숨을 차분하게 되돌렸다.
짧게라도 몸을 움직이니 머리가 맑았다.
조금만 더 하고 돌아갈까.
잠시 고민에 빠졌던 동백은 저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익숙한 기척에 입술 끝을 비뚜름히 올렸다.
외박한 탕아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동백은 점차 가까워지는 기척에 공원 입구를 흘긋거렸다. 놈이 오든 말든 그대로 무시할 생각이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발소리가 가벼워…?”
평소 자오의 걸음은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선인님, 여기 계셨군요?”
동백의 눈이 천천히 크게 뜨였다. 서서히 벌어지는 입은 소리 없는 경악을 내질렀다.
맙소사.
정말, 이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세상에 맙소사.
“고시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인데도 꽤 오래 걸리네요.”
타박, 타박.
아이 특유의 가벼운 발소리가 적막한 공원을 울렸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자오는 동백을 한껏 올려다보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좋, 은 아침?”
자오의 덤덤한 인사에 동백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저 무슨 망측한 짓이란 말인가.
나이는 먹을 대로 먹은 놈이 수치도 모르고!
“네놈 꼴을 보고 좋은 아침이란 소리가 나오겠냐?”
동백의 비난에 자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진무구하게 보이는 까만 눈이 물끄러미 동백을 응시했다.
“나오죠. 귀엽지 않습니까. 인사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으신가요?”
간악한 요수는 제 모습이 상대에게 어떻게 보일지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젖살이 통통하게 남은 뺨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충분히 호감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게다가 그 속에 든 것은 묵어도 한참 오래 묵은 노괴로 충분히 ‘귀여워 보이는 몸짓’을 연기할 줄도 알았다.
“들겠냐고.”
하지만 동백은 저 순진무구해 보이는 아이의 탈을 쓴 놈이 사실 덩치는 자신보다 크고 나이는 비슷하게 먹은 놈이라는 걸 알고 있는 상태였다.
오히려 질색하면 했지 쪼그리고 앉아 자오에게 ‘아이고 너 참 귀엽구나.’라고 말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저놈이 갑자기 뭘 잘못 처먹었나?
여름이었다면 더위를 먹고 회까닥 해버렸구나, 라고 생각할 텐데 지금은 막 상강(霜降)을 지나 겨울의 초입이었다. 추위에 얼어 죽은 놈은 봤어도 돌아버린 놈은 못 봤는데.
“흐음….”
동백은 뾰로통해진 자오의 표정에 이마를 짚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뾰로통’이라는 귀여운 단어가 저놈에게 쓰일 줄은 몰랐다.
“변태 같은 짓거리 그만하고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그래?”
지금 모습으론 한 대 때려주고 싶어도 차마 주먹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모습을 돌리면 당장 검집으로 후려쳐 줄 생각을 하고 있던 동백은 곧 이어진 자오의 말에 아주아주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타깝게도 당장은 무리입니다. 아무리 저라도 모습을 바꾸는 건 꽤 부담스러운 일이거든요. 적어도 한 달 정도는 지나야 합니다.”
그 무리인 걸 왜 했냐고!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외모는 어려졌어도 저 망할 주둥이는 그대로일 텐데 차마 때리지도 못하고 한 달 동안 시달릴 걸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미친놈의 생각은 종잡을 수 없다더니.
까마귀와 똑같이 미친놈으로 취급받는 신선은 다른 미친놈을 향해 혀를 찼다.
“그래서, 갑자기 그 모습은 왜 했는데?”
“저도 ‘유용한’ 동료라는 걸 보여드리려고요.”
자오가 ‘유용한’이란 단어에 유독 강세를 두며 짧은 양팔을 활짝 벌렸다.
“이제 저도 유용하지만 등을 맡길 수 없는 동료 정도는 되었습니까?”
“아니, 쓸모없고 등도 못 맡기는 애물단지 정도는 된 것 같은데.”
동백은 어느새 제 다리에 철썩 들러붙은 자오를 떼어내려 다리를 슬슬 흔들었다.
악!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보지 마!
“제가 비록 몸은 어려졌어도 두뇌는 그대로이니 방해가 되진 않을 겁니다.”
“네가 무슨 탐정인 줄 알아?!”
게다가 그놈은 가는 곳마다 살인사건이 일어나잖아!
불길한 소리도 작작 해야지!
살살 흔들어서는 꿈쩍도 안 하겠다 싶어 강제로 자오를 떼어내려던 동백은 뻗던 손을 우뚝 멈출 수밖에 없었다.
“우웅! 싫어, 싫어요! 떨어지기 싫어!”
손이 닿지도 않았는데 자오는 머리를 동백의 다리에 푹 파묻곤 마구 고개를 저어댔다. 말투 또한 보통 어린아이가 할 법할 말투인지라,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돋으면서도 마치 자신이 못된 놈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미친….”
“자오는 선인님이랑 계속 붙어 있을래요!”
“아악! 미쳐버리겠네!”
온갖 감정이 섞인 동백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공원을 울렸다.
차라리 단번에 죽여버리는 거였다면 눈 질끈 감고 해치워 버리겠는데 그럴 수도 없고!
다시금 자오를 떼어내려 손을 들었던 동백은 한참을 망설이다 팔을 축 늘어트렸다.
그는 그 망설임의 원인을 알았다.
언젠가 자신의 큰 약점이 될 거라고 여기고 있으면서도 바뀌지 않을 영원한 족쇄가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아저씨, 이것 봐요. 제가 만들었어요.’
손재주라고는 없으면서 나무토막을 가져다가 이것저것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동백의 귓가를 쟁쟁하게 울렸다.
동백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밀어두었던 기억은 한 번 둑이 터지자 홍수가 되어 동백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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