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동백의 다리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자오는 제 뺨 위로 떨어진 물방울에 위를 쳐다보았다. 처음엔 비가 오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곧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팔을 뻗었다.
그러나 동백보다 작아진 몸은 젖은 그의 뺨에 닿지 못하고 허공을 맴돌았다.
역시 작은 몸은 불편해.
모습을 바꾼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불편한 점을 하나 찾아낸 자오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 와중에도 동백의 발치엔 동그란 물방울의 흔적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까치발을 하고 팔을 쭉 뻗어도 닿지 않고 주변엔 뭔가를 밟고 올라갈 만한 것도 없었다.
날개만 멀쩡했다면.
뒤늦게 스스로 잘라낸 몸 일부가 아쉬웠으나 자오는 그 아쉬움을 금방 지워냈다.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일을 후회하는 건 시간 낭비였다. 대신 그는 새로운 방법을 고심했다.
어쩐다?
자오는 팔짱을 끼고 동백을 올려다보았다. 항상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봐 몰랐는데, 이 신선님께서는 아래에서 봐도 참 예쁘게 생겼다.
잠시 딴생각으로 빠졌던 자오는 다시금 본래 목적을 상기했다. 예쁘게 생긴 건 생긴 거고 일단 찍소리도 안 내고 우는 걸 좀 달래줄 생각이었다.
차라리 소리 내 엉엉 울었다면 골려 먹을 텐데 저리 울어버리니 아무리 뻔뻔한 그라도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선인님.”
자오의 작은 부름에도 동백은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뚝뚝 눈물만 흘렸다.
단순히 자신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하는 건지, 아니면….
심마인지.
심마라는 건 거창한 게 아니었다. 모든 이들의 마음속엔 심마가 존재했고 그것은 언제나 자신을 담은 그릇을 찢어버리길 원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숨을 죽이고 으르렁거리는 짐승은 예기치 못할 때 기어 나와 활개 쳤다.
하지만 동백은 저래 봬도 선경에 오른 신선이니 곧 떨쳐내고 눈을 뜰 터였다.
근데 그럼 너무 아깝지 않나?
동백이 이리 약해져 있는 기회는 흔히 오지 않았다. 그가 목을 매고 있는 신선은 지나치게 단단했고 틈이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술법에 걸려든 게 신기할 정도로 말이다.
자오는 다시금 동백의 다리를 꾹 끌어안았다.
손아귀로 굴러들어온 기회를 걷어차 버리기에 까마귀는 지나치게 음사했다.
◆
내리쬐는 뜨거운 열기가 정수리를 달궜다. 햇볕이 어찌나 뜨거운지 살갗이 따끔거렸다.
자오는 목구멍 안쪽까지 바짝 말라붙게 만드는 퍼석퍼석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숨이 턱 막힐 정도의 더위가 팔다리를 흐물흐물 늘어지게 했다.
그는 눈을 뜨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렇게 말라버린 잎사귀들이 특유의 생기를 잃은 채 시들시들 죽어가고 있었다. 산이 품고 있던 작은 개울은 이미 바짝 말라붙어 더이상 산짐승들의 목을 축여주지 못했다.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면서도 낯선 장소였다.
까마귀는 다음엔 제 몸을 살폈다. 제 손을 내려다보니 작고 여린 손이 그의 의지대로 꼼질꼼질 움직였다.
“성공인가?”
동백의 방어벽이 약해진 틈을 타 성공적으로 기억 속으로 파고든 까마귀가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은 비록 주변에 아무것도 없지만, 근처에 동백이 있을 테니 바지런히 찾아야 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겠지.
길어봤자 한 식경 정도면 제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튕겨낼 터였다. 그전에 조금이라도 기억을 훔쳐볼 요량이었다.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놀려 가파른 산을 오르던 자오는 곧 산의 중턱에서 진법이 쳐진 작은 초막 한 채를 발견했다. 집을 감싼 진법이 어찌나 섬세한지 어지간한 놈들은 발견조차 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동백의 기억을 토대로 자오의 술법이 만들어 낸 세계인지라 자오의 눈에는 그 초막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숙련된 기술자가 아닌 초보자가 지어 올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집은 야트막한 담장을 그럴듯하게 쌓아 올리니 얼추 괜찮아 보였다.
그는 담장으로 쪼르르 달려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어 그 너머를 살폈다. 집 안에서는 어느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마루 위에 덩그러니 놓인 작은 칼과 기괴한 형상을 한 나뭇조각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참으로 이상하게 생긴 조각이군. 곰인가?
동백이 만든 것이라면 조각에는 재능이 없으니 당장 때려치우라고 조언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자오는 다시금 눈을 굴려 작은 마당을 살폈다. 마당엔 햇볕에 말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고기 조각 몇 개와 먹어도 괜찮은 건지 의심이 드는 말라비틀어진 배추 하나가 신줏단지 모시듯 놓여 있었다.
이리 지독한 흉년이 들었을 때라면 동백이 등선하기도 전의 기억이란 소리다.
좋아, 그럼 가장 중요한 선인님은 대체 어디 계신 거지?
까치발을 들고 담에 매달렸던 자오는 아래로 내려와 작게 목을 울렸다.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데 이리 까먹으니 참으로 아까웠다.
주변을 돌아볼지 말지 짧게 고민하던 자오는 익숙한 기척에 휙 고개를 틀었다. 저 멀리서 이 더운 여름에도 단정한 옷차림을 한 동백이 손에 축 늘어진 쥐 한 마리를 들고 돌아오고 있었다.
상투를 튼 머리와 허리춤에 매달린 익숙한 검, 등에 멘 활이 그의 움직임에 잘그락거리는 작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뜨거운 햇볕에 단단히 농락이라도 당한 듯 붉게 달아오른 흰 피부가 제법 색정적으로 느껴질 법도 하건만, 그의 얼굴이 유독 맑아 감히 그러한 생각을 떠올릴 수 없었다.
약간 피곤한 낯을 하고 있던 동백은 누군가를 발견하자 환히 웃었다. 자오가 아는 웃는 얼굴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동백아.”
“……?”
“햇볕이 이리도 따가운데 어찌 나와 있느냐.”
자오는 반사적으로 집을 돌아보았다. 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초라한 집은 여전히 고요했다. 그런데 동백은 대체 누굴 보며 말을 걸고 있단 말인가.
게다가 동백이란 이름은….
“어이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자오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햇빛을 등지고 선 동백의 얼굴 위로 의아함이 떠올라 있었다. 정확히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은 또렷하고 맑았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니?”
천천히 몸을 숙여 자오와 시선을 맞춘 동백의 손이 그의 이마를 짚었다. 서늘한 손은 더위를 몰아내듯 부드럽고 상냥하게 자오의 이마와 뺨을 훑었다.
“어서 들어가자꾸나. 여기 더 있다간 네가 바보라도 되겠어.”
읏차.
작은 기합과 함께 동백이 자오를 안아 올렸다. 얼결에 팔을 뻗어 동백의 목을 안은 자오는 이상한 조각이 놓여 있던 마루에 앉혀졌다. 가까이서 보니 조각은 곰치고는 이상하게 귀가 길었다.
자오는 그 조각을 가져다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가까이서 봐도 이것을 만든 이는 조각에는 영 재능이 없어 보였다.
그 사이 동백은 잡아 온 쥐의 배를 갈라 내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가뭄이 들어 물이 귀한지라 물동이에 길어둔 물을 쥐 오줌만큼 쓰며 능숙하게 고기를 발라냈다.
“선ㅇ….”
자연스럽게 그를 ‘선인님’이라 부르려던 자오는 합, 하고 제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술법이 온전하지 못하여 동백의 기억 속 대상이 자신에게 덧씌워진 것 같은데, 현실의 호칭을 쓰면 그가 더 빨리 깨어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 대체 뭐라 불러야 하지?
이게 등선 전의 기억이라면 자신이 덧씌워진 상대가 바로 과거의 ‘동백’일 테고 지금 그의 이름은 따로 있을 터였다.
온갖 호칭을 입안에서 굴려보며 잠시 고민하던 자오는 불쑥 떠오른 호칭에 눈가를 찌푸렸다. 뭘 대입해 봐도 어색하게 느껴졌는데 이 호칭만큼은 입에 착착 달라붙는 듯했다.
“아저씨.”
웅얼거리듯 작은 목소리였는데도 동백은 그를 돌아보았다. 여상한 동백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그가 정답을 때려 맞춘 모양이었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나요?”
자오의 질문에 동백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무언가 이상한 듯 슬쩍 기울어진 고개는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
그러면서도 또 대답은 착실한 것이 자오는 동백이 어지간히도 이 아이를 아꼈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저씨는 이름이 뭐예요?”
그 딴에는 단순한 호기심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동백이 버린 이름을 알아내봤자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행적을 추적할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가볍게 물은 것뿐이었는데.
동백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얼어붙었다. 눈가에 감돌던 다정함은 몰아치는 서릿바람에 몸서리치며 사라졌고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던 입술은 일자로 꾹 다물렸다.
…….
……….
두 사람 사이로 영원보다 길게 느껴지는 침묵이 흘렀다.
“야.”
“…….”
먼저 침묵을 깬 건 동백이었다. 무척 짤막한 부름이었으나 자오는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였다.
“뒤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