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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38화 (39/61)

38화

저승을 지키는 파수꾼보다도 험악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동백을 향해 자오는 저의 뻔뻔함을 발휘해 양팔을 활짝 펼쳐 도리어 그를 반겼다.

“선인님! 다행입니다!”

자오의 환대에 검파에 손을 얹던 동백이 멈칫했다.

“정신을 차리셨군요.”

“지랄하지 마라.”

눈에 뻔히 보이는 개수작에 동백의 눈썹이 치솟았다. 그럼에도 자오는 꿋꿋하게 뻔뻔함을 고수했다.

“전 순수하게 선인님을 모시러 온 것뿐인데 절 보고 동백이라 하시니 오히려 제가 더 곤란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억울함을 모아 피력하자 동백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자오의 어설픈 변명이 통했다기보다 아직 그의 모습이 동백이 사랑했던 아이의 모습이라 그런 듯했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동백이 두통이 이는지 관자놀이를 꾹꾹 손으로 짓눌렀다. 그는 자오를 한 번 지그시 노려보다가 가볍게 쿵! 발을 굴렀다.

으드득, 계란 껍질이 깨지듯 하늘이 갈라졌다. 깨어진 거울에 세상을 비춰보듯 일그러진 주변이 하나둘씩 무너져 내렸다.

“넌 깨서 보자 개자식아.”

동백은 순간 어찔한 머리에 몸을 휘청였다.

젠장.

절로 욕설이 잇새로 튀어나왔다. 까마귀를 죽여버리지 않고는 분이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눈앞이 어지러운 와중에도 그는 검파를 꾹 움켜쥐었다.

어디 있어 이 새끼.

형형한 살기가 감도는 눈이 번들거리며 주변을 훑었다. 술법을 걸었으니 분명 주변에 있었을 텐데, 도통 보이지 않았다. 씩씩거리는 거친 숨이 훅 뿜어졌다.

그는 감각을 넓게 펼쳐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도망쳤다 하더라도 아직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라고 예상한 대로였다.

찾았다.

쿵!

짧은 도약에 동백의 몸이 순식간에 앞으로 퉁겨나갔다. 강한 힘을 견디지 못한 땅이 비명을 내질렀다.

드드득!

거친 소음과 함께 아스팔트 덩어리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동백이 지나간 곳마다 족적이 깊게 남았다. 동백의 눈이 손에 들린 검이 반사하는 빛처럼 스산하게 빛났다.

동백은 바짝 가까워진 작은 뒤통수를 향해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수백 수천의 피를 머금은 검날이 탐욕스럽게 연약해 보이는 아이의 몸뚱이 위로 쇄도했다.

정확히 몸의 정중앙을 노리는 검로에 기겁하며 자오가 몸을 뒤틀었다. 아슬하게 스친 검날이 그의 옷깃을 베었다.

자오는 바짝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적셨다.

모습을 바꾸는 건 단순히 외양만 바꾸는 게 아니었다. 그를 이루는 근육 하나, 뼈대 하나를 모두 바꾸는 작업인지라 자오의 근력은 평소의 삼분지 일도 되지 않았다. 그 상태로 동백의 검을 막아낸다면 막는 게 아니라 그대로 검에 짓눌려 반으로 잘린 채 바닥에 나뒹굴었으리라.

여기서 좀 무리를 하더라도 모습을 바꾸고 대항한다?

스스로 죽여달라 검에 목을 들이미는 꼴이었다.

까마귀는 한시가 촉박한 와중에도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는 살아오며 수많은 고비를 만났고 그중 대부분은 그의 목숨을 경각에 달하게 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때마다 그를 살린 것은 그가 지닌 힘이 아니라 영악한 머리였다. 요리조리 몸을 틀어 검을 피하면서도 자오는 입을 놀리는 걸 잊지 않았다.

“폭력 반대! 저는 비폭력을 지지합니다!”

“오냐 그래. 나는 BE 폭력주의다. 순순히 항복한다면 아프지 않게 죽여주마.”

먼저 다리를 노리기 위해 동백이 몸을 바짝 숙였다.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주둥이를 벌리는 뱀처럼 검이 위협적인 파공음을 내며 공간을 갈랐다.

촤악!

“크읏!”

꽤 깊게 베인 자오의 허벅지에서 붉은 진주가 비산했다. 그중 몇 개는 동백의 흰 피부에 붉은 연지처럼 긴 흔적을 남기며 미끄러졌다. 동백이 내뱉는 뜨거운 숨에 희게 섞인 서리가 마치 한겨울 홀로 선 나무의 잎사귀처럼 아롱지게 흩어지며 피어났다.

자오는 그 순간 어찌하여 동백이 요수들에게 ‘혈화’로 불리는지 진정으로 깨달았다.

그저 붉게 물들어 핀 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나무가 되어 피로 이루어진 수백 수천의 붉은 꽃을 피워내기에 혈화인 것이었다. 등줄기를 타고 전율이 일었다.

이토록 두려우면서도 아름다운 꽃이 또 어디 있을까.

격렬한 움직임에도 흔들리지 않는 호흡이 두 사람을 따라 길게 이어지며 그들이 지나온 길을 그렸다.

그 긴 길은 고시원 앞까지 당도해서야 가까스로 멈췄다. 자오의 목을 노리던 동백의 검이 그의 코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영악한 새끼.”

“제가 좀 그런 편이지요.”

자오가 흘긋 고시원을 살폈다. 그가 느끼는 기척을 동백 또한 느끼고 있을 것이다.

시간은 이제 막 묘시를 지나 진시로 접어들고 있었다. 슬슬 이호영이 고시원을 나올 시간이었다. 누구나 그를 자연스럽게 느끼게 하는 동백의 능력에서 유일한 예외자. 자오의 목숨을 부지해 줄 마지막 조각이 금방이라도 나오려는 듯 입구 근처를 서성였다.

자오를 단번에 죽여버릴 수 있다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좀 곤란했다. 호영은 동백이 검을 차고 다니는 걸 알아도 장식품처럼 여기지 그게 진검이라고 생각하진 않으니까.

동백이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으드득 이를 갈았다.

“나이가 들면 치아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 하더군요. 선인님도 나이가 적지 않으니 미리미리 관리해 두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끝까지 동백의 신경줄을 벅벅 긁은 자오는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발소리에 냉큼 동백의 다리에 들러붙었다.

“이거 놔!”

낮은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는 동백을 깨끗이 무시한 그는 호영이 들으라는 듯 되레 크게 소리쳤다.

“우웅! 아저씨 싫어요! 자오 괴롭히지 마세요!”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조용하던 골목길을 쩌렁쩌렁 울렸다. 느긋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던 호영 또한 놀랐는지 잠시 멈칫하다 거의 구르듯 뛰어 내려와 소리쳤다.

“납치범이야!”

호영의 두 손이 사뭇 전투적으로 올라와 있었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으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호영은 자오를 다리에 매달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동백을 발견하곤 바람이 빠지듯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허….”

꽉 쥐었던 두 손은 이미 풀린지 오래였다. 오히려 호영의 두 손은 허공에서 방황하며 오갈 곳을 찾지 못했다.

“형…? 뭐해…?”

다소 당황스러운 듯 호영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의 시선이 다리에 얼굴을 파묻고 들러붙은 자오와 동백의 얼굴을 번갈아 오갔다.

동백은 그 물음에 진심으로 답했다.

“나도 모르겠다.”

이 미친놈이 대체 나랑 뭘 하자는 건지 모르겠어.

관심이 가든 말든 그냥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내가 미쳤던 거지.

쯧.

꽉 틀어막혀 답답한 속내를 말할 수도 없으니 동백은 짧게 혀를 찼다.

“그 애는 누구고….”

당연히 할만한 질문이었으나 동백은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어물 말을 흐렸다.

“그…으……게….”

‘이 쪼끄만 쥐방울이 네가 형님으로 모시는 그놈이다’라고 차마 말하지 못한 동백이 삐죽해진 눈으로 자오를 노려봤다. 그 시선은 ‘네놈이 저지른 짓이니 네놈이 해결해라!’라는 시선에 가까웠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능력이 탁월한 까마귀는 일부러 호영에게 제 얼굴이 잘 보이도록 몸을 틀었다.

“야!”

그 행동에 동백이 기함하여 녀석을 다시 가렸으나 이미 호영의 두 눈은 찢어질 것처럼 크게 벌어졌다. 벌레라도 들어가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쩍 벌린 입이 경악을 내뱉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으에에에엑―?!”

비명과도 같은 호영의 경악에 동백이 이마를 짚었다. 작은 자오는 누가 봐도 큰 자오와 판박이였다. 허리께 넘게 기른 긴 머리카락과 차려입은 옷차림 또한 마찬가지여서 누가 봐도 그냥 자오였다.

그나마 다행인건….

동백이 힐긋 자오의 허벅지를 살폈다. 긴 옷자락이 내려와 다행히 상처를 가려주고 있는 데다가 피도 금방 멎어 티가 나지 않았다.

“혀, 형…. 그…, 그 애….”

버퍼링이 걸린 듯 삐걱대던 호영은 멍한 얼굴로 제 얼굴을 한번 퍽 후려치곤 곧 어느 때보다도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건 동백이 이해하기엔 사뭇 이상한 광경이었다.

“형, 이렇게 귀여운 손님을 데리고 올 거면 진작 말하지. 너무 귀여워서 놀랐잖아.”

순식간에 사근사근해진 호영의 말투가 아이를 어르듯 부드러웠다. 몸을 숙여 자오에게 다가온 그는 시선을 맞추며 주머니를 뒤적거려 작은 사탕 하나를 꺼냈다.

“안녕, 이름이 뭐야? 혹시 사탕 좋아하니?”

“…….”

“형 이상한 사람 아니야. 요기 이 형하고 친한 동생이야.”

자오에게 동백과 친한 사람임을 강조하던 호영은 자오가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자 ‘나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무해한 사람.’ 같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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