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꽤 추우니까 일단 우리 들어가서 마저 이야기할까?”
호영은 동백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뭐 임마!
반쯤 호영의 손에 떠밀려 자오를 다리에 매단 채 어기적어기적 고시원으로 밀려 들어온 동백은 이 상황이 영 못마땅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형, 표정.”
그런 동백을 주의시키듯 낮게 읊조린 호영은 유독 높고 쾌활한 목소리를 내며 자오를 살살 어르기 시작했다.
“음, 있지. 잠깐만 여기서 사탕 먹으면서 기다려주면 안 될까? 형이 저 형하고 할 이야기가 좀 있거든.”
자오는 가만히 호영을 바라보다 동백의 다리를 놓았다. 그는 아이답게 호영이 내민 사탕을 바로 까서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끔찍할 정도의 단맛이 까마귀의 혀를 괴롭혔다.
“착하다. 잘 기다리면 하나 더 줄게.”
쓱쓱.
머리를 스치는 손길에 자오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이 건방진.’
슬쩍 비틀려 올라간 자오의 입꼬리를 보지 못한 호영은 여전히 불퉁한 얼굴을 한 동백을 마구잡이로 밀어 좁은 방 안으로 몰아넣었다.
버티고자 하면 한 발짝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동백은 순순히 그 손길에 떠밀려 방 안으로 들어왔다.
탁.
속이 텅텅 빈 나무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상냥한 낯을 유지하던 호영이 순식간에 헐떡헐떡 숨을 몰아쉬며 이리저리 발을 굴렀다.
“으으으으으…!”
어떠한 단어도 되지 못한 앓는 소리를 내던 호영은 오 분쯤 지나자 진정했는지 자꾸만 닫힌 문을 힐끔거렸다.
“그래서 무슨 얘길 하자고?”
그냥 놔두면 밤새도록 저러고 있을 것 같아 결국, 동백이 먼저 말문을 텄다.
“혀, 혀엉….”
울먹울먹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호영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양팔을 휘적휘적 흔들었다.
“…….”
동백은 그런 호영을 차분하게 기다려주었다. 때로 호영의 머릿속은 아주 재미있는 상상들로 넘쳐났는데, 바로 지금이 그 순간인 듯했다.
“저 애….”
목소리를 한껏 낮춘 호영이 동백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그래봤자 밖에 앉은 놈은 옆에서 말하듯 훤히 듣고 있겠지만 말이다.
“한아 형 아들이야?”
아, 그래 이건 좀 정상적인 생각이군.
동백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걸 본 호영의 안색이 조금 더 창백해졌다.
호영의 집은 아니지만 다른 집안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 어느 날 뜬금없이 집으로 찾아온 사람이 그 집 회장님의 사생아였다는 이야기는 꽤 오랜 시간 동안 회자 되었다.
그만큼 개판이었단 소리다.
“…그 형이 프로필엔 미혼으로 적혀 있거든?”
차마 혼외자식이라는 단어를 말하지 못한 호영은 두 눈을 꾹 감았다.
조카라던가 친척이라던가 하는 선택지는 없었던 거니 호영아.
푹 숙인 동그란 머리를 오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동백은 몹쓸 상상을 끊기 위해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를 냈다.
“그런데 너 연습 안 가냐?”
침대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핸드폰을 확인하니 평소 호영이 고시원을 나서는 시간보다 훌쩍 넘어 있었다. 지금 출발해 봤자 지각을 면하기는 힘든 시간이었다.
“그게 지금 중요한 게…. 중요한 거 맞구나.”
“쟨 내가 알아서 챙길 테니까 일단 연습부터 갔다 와.”
우선 호영을 보내고 자오는 알아서 잘 다져둘 생각으로 동백은 호영을 재촉했다.
“이러다가 너 지각한다?”
지금 출발해도 지각할 테지만 동백은 일부러 불안감이 잘 타도록 옆에서 훌훌 부채질해댔다. 그러나 호영은 제 꼬랑지에 붙은 불안이라는 불에도 꿋꿋하게 버텼다.
“일단 늦는다고 연락할 거니까 조금은 괜찮아.”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던 호영은 문득 무슨 생각을 했는지 비딱하게 선 동백에게 날카롭게 말했다.
“혹시라도 나 없는 사이 애 앞에서 혼…외자식이니 사생아니 하는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고.”
호영은 아이에겐 그게 아주 큰 상처가 된다며 지루한 얼굴을 한 동백에게 반복해 주입했다. 그러면서도 손으로는 바쁘게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동백이 예상하기론 아마 좀 늦을 것 같다는 말을 전하고 있는 듯했다.
“애들이 아무것도 모를 것 같아도 은근 눈치가 빨라. 자기가 불청객인지 아닌지 안단 말이야. 그러니까 표정 풀고 잘 대해 줘.”
그럴 필요가 하등 없는 놈이라고 말하고 싶어도 그랬다가는 동백 자신만 나쁜 놈이 되는지라 그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웃으면서 나가는 거야. 알았지?”
억지로 끌어 올린 동백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호영이 간 후 반드시 까마귀를 조져놓겠다는 다짐이 한층 두텁게 동백의 마음에 쌓였다.
이제 잔소리는 다 끝났나 싶던 동백은 깜박했다는 듯 작은 탄성을 내는 호영의 모습에 폭,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너무 착해도 문제고 오지랖이 너무 넓어도 문제였다. 이번엔 부잣집 도련님으로 태어났으니 싹수를 좀 상실해도 되었을 텐데. 이런 점은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도 변하질 않는 걸 보니 좀 안타까웠다.
“그러고 보니 애 아빠는?
“응?”
“한아 형 말이야. 애만 형한테 맡겨두고 어디 간 거야?”
참 변명해야 할 것도 많다고 여기며 동백은 대강 그럴듯한 대답을 찾아냈다.
“출장.”
“……아. 그럼, 그때까지 형이 봐주는 거고?”
“그…으런 셈이지?”
“얼마나?”
“…한 달?”
동백에게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내던 호영이 입을 딱 다물었다. 아래로 내려간 입매와 슬슬 위로 들썩이는 눈썹이 심상찮았다.
“한 달?!”
순식간에 버럭 커진 목소리에 지레 놀란 호영이 양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여전히 표정은 심각하기만 했다.
“기간이 문제야?”
“당연하지! 대체 형의 뭘 믿고 어린애를 맡긴 거지?”
“…….”
“혼자서는 밥도 제대로 안 챙겨 먹는 사람한테 한창 성장기인 아이를 맡기다니…. 그만큼 형을 신뢰하고 있다는 건가?”
아니, 등쳐먹을 생각만 하고 있다는 거다.
그보다 그게 문제인 거냐고.
동백의 미간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하여튼 나 진짜 연습 다녀올게. 애 굶기지 말고.”
호영은 조금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그는 공용 공간에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얌전히 앉아있는 자오를 발견하곤 쪼르르 달려가 시선을 맞췄다.
“우리 어린이는 이름이 뭐예요?”
“…….”
“수줍음이 많은가 보구나? 아까 형이 사탕 주기로 했었는데, 당장 가지고 있는 게 없어서 저녁때 많이 사서 올게. 저기 동백 형이랑 식사 거르지 말고 꼭꼭 챙겨 먹고. 알았지?”
말을 마치며 자연스럽게 머리로 향한 호영의 손을 자오는 고개를 틀어 피했다. 그것에 호영은 조금 머쓱하게 웃었다.
“그럼 다녀올 테니까 저녁까지 잘 챙겨 먹여!”
마지막까지 동백에게 잔소리를 잊지 않은 호영이 반쯤 뛰다시피 고시원을 나갔다. 계단을 두어 개씩 겅중겅중 넘어가는 발소리에 동백이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저러다가 넘어지면 어쩌려고.
점차 멀어지는 기척을 마지막까지 확인한 동백이 시치미를 뚝 떼고 얌전한 아이인 척 굴고 있는 자오의 의자를 퍽 걷어찼다.
쿠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간 의자 위로 어느새 몸을 피했던 자오는 가뿐히 내려섰다.
“호영 군이 간 지 오 분도 되지 않았습니다만?”
“넌 지금 내 손에 안 죽는 걸 천운으로 여겨.”
한 달이 아니라 오늘 점심까지만 봐준다고 하고 죽여버릴걸.
후회해봤자 이미 떠나간 기차는 돌아오지 않고 내뱉어진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어차피 시간을 돌릴 수 있어도 동백은 자신이 똑같이 말했을 거란 걸 알았다.
쉬이 내뱉은 말은 거짓말이 되고 지키지 못한 약속이 되어버렸다.
그의 동생에게도.
자신을 믿고 홀로 눈밭을 달려갔던 작은 아이에게도 모두.
그런 말은 차라리 하지 않으니만 못했다.
동백의 으름장에 자오는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아침에 잠깐 봐주는 거라고 하셨으면 절 바로 죽이실 수 있었을 텐데요.”
“시끄러.”
“그러지 못하여 참 아쉬우시겠습니다.”
“그 주둥이 좀 닥치면 안 되냐?”
자오는 동백의 요청에 합, 하고 입을 꾹 다물더니 돌을 던져 남의 장독을 깨고 돌아다니던 악동같이 씨익 웃었다.
「그럼 이리 말할까요?」
주둥이를 닥치랬더니 입을 다물고 술법으로 말을 걸어온다.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자오를 노려보던 동백은 그를 무시하고 다소 힘없는 발걸음을 돌렸다. 굳이 자오를 상대하느니 차라리 상종하지 않는 게 훨 나았다.
이대로 무시하고 방에 들어가 심신 안정을 위해 아임튜브를 한 편 찾아보는 거다. 보니 사그락거리는 소리를 녹음해 둔 걸 올리기도 하던데 은근히 귀가 간질간질하니 듣기가 좋았다.
「선인님, 선인님.」
자오는 그런 동백의 뒤를 갓 태어난 병아리가 어미를 쫓듯 졸졸 따랐다. 동백이 한 걸음 걸으면 짧은 다리로는 세 걸음을 걸어야 하건만 그는 뒤처지지 않았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자오를 힐끔 곁눈질한 동백은 그가 들어오지 못하게 잽싸게 문을 닫았다.
쿵!
“윽!”
당연하다는 듯 방으로 따라 들어오려던 자오가 머리를 박았는지 제법 큰 소리가 났다. 문까지 야무지게 잠근 동백은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길게 심호흡했다.
오늘은 저녁까지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을 테다.
아임튜브를 보기 전에 잠깐 명상을 해 들끓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던 동백은….
쿵쿵쿵!
쿵쿵쿵쿵!
“선인님! 들여보내 주세요!”
요란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