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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41화 (42/61)

41화

끼익-

침대 스프링이 가벼운 무게에도 비명을 지르며 힘겨움을 토해냈다.

“여기보다 더 좋은 곳으로 옮길 생각은 없으신 겁니까?”

생각보다 더 열악한 매트리스에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물음이었다. 동백은 책상 의자를 끌어내 앉으며 시큰둥하게 답했다.

“굳이?”

씻는 게 좀 불편하긴 해도 썩 나쁜 곳은….

자오가 작은 손으로 매트리스를 이리저리 눌러댔다.

끼익- 끽, 끼긱-

솔직히 그리 시설이 좋진 않다는 건 인정한다. 씻는 것도 불편하고 기본 비품도 형편없고. 하지만, 장점은 그만큼 한 달 월세가 싸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호영이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거고.

“그럼 매트리스라도 바꾸시죠. 허리 다 상합니다.”

잠깐 휴전한 적 주제에 걱정해주는 게 가당키나 하냐.

동백이 흥, 코웃음을 치며 다리를 올려 침대에 걸쳤다.

“내 허리 걱정하기 전에 네 허리나 걱정하지 그래. 내가 반으로 접어버릴 거니까.”

순수한 협박이었으나 자오는 일부러 놀란 듯 짧을 감탄사를 내뱉으며 동백을 은근한 눈빛으로 훑었다.

“선인님은 꽤 거친 플레이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전 그런 취향은 아니지만, 원하신다면 기꺼이 어울려 드릴 순 있으니 말씀만 하세요.”

“이….”

동백의 귓가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파렴치하고! 음흉하고! 음란한 놈!”

어째서 무슨 말만 하면 죄다 그런 쪽으로 연결된단 말인가. 그동안 얼마나 음탕하게 놀아났으면 머릿속에 죄다 그런 것만 가득 차 있냐!

노성을 내지르며 불같이 화를 내는 동백에게 자오는 일부러 미안함을 가득 담은 얼굴을 꾸며냈다.

“아, 이런…실례. 일단 경험이 있는지부터 여쭤야 했던 건가요?”

“…….”

“경험은… 뭐, 당연히 없으시겠죠.”

너무 당연한 걸 물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자오는 덧붙여 “그럼 허리 걱정하실 필요도 없겠네요. 그냥 계속 쓰세요.”라고 말했다.

“……거야.”

“예?”

“바꿀 거라고!”

동백은 자신이 자오가 말하는 그런 음탕한 경험을 하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육욕을 참는 것 또한 그가 지나온 수련 중 하나였으니까.

동백의 입장에선 경험이 없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렇지도 않아야 하는데, 그런데…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흐응? 누구랑 하시려고 허리 관리를 하십니까?”

“네놈이 알 것 없잖아!”

매번 저놈의 술수에 넘어가는 걸 알면서도 가슴 깊이 우러나오는 이 북받치는 짜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존심과 신경을 살살 긁어대는 말보다 압권은 저놈의 시선과 표정이었다.

직접 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 얄미운 표정과 상대를 업신여기는 것 같은 시선이란.

동백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자오의 악명엔 분명 저 망할 주둥이도 한몫했으리라.

“조만간, 같이 사러 갈까요?”

“내가 너랑 침대 매트리스를?”

저와 자오, 침대를 순서대로 손으로 가리키며 동백이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렸다.

무슨 집 꾸미는 신혼부부도 아니고.

생각만 해도 소름이 오싹 돋았다. 신혼부부라니, 저놈과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조합이었다.

“으.”

동백은 속이 매스꺼워 인상을 찌푸렸다. 질색하며 웩웩거려도 자오는 제 할 말을 계속 내뱉었다.

“아니면 차라리 제집으로 오시죠?”

“미쳤니?”

“남는 방 많습니다. 호영 군도 같이 오면 되는 일 아닙니까.”

확실히 환경적인 면에서는 자오의 제안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으나 손수 짐을 싸 들고 호랑이 굴로 들어가 잠을 자는 사냥꾼이 세상천지 어디 있단 말인가.

동백이 찌푸린 낯을 추스르며 으르렁 목을 울렸다.

“네놈 수작에 더는 안 넘어가.”

“압니다. 그래도 욕심 좀 부려 봤습니다.”

자오는 개운한 표정으로 미련을 떨쳐냈다. 문제가 많은 낡은 매트리스는 바꾸게 했으니 이번엔 뭘 물어뜯어 볼까, 라고 속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그는 이번에는 침대 머리맡에 가지런히 놓인 검을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다.

상아색 검집엔 자잘한 흠집들이 가득했는데, 특히 검집의 하단에는 큰 흠집들이 즐비했다. 자오는 언젠가 제 목숨을 노릴 검을 유심히 살피다가 곧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활은 더는 안 쓰시는 겁니까?”

“네놈들이 화살 한 방에 죽어준다면야 다시 쓰겠지.”

“효율 문제로군요.”

“최대한 짧은 시간에 많이 죽이는 덴 검이 편해.”

경험이 우러난 동백의 대답에 자오는 처음 동백을 마주했을 때를 떠올렸다.

처음엔 그저 작은 흥미였건만, 이리 얽히게 될 줄은 그 또한 예상하지 못하였다.

이 성격 나쁜 신선님은 자신이 누굴 구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붉은 하늘이 비통함으로 울부짖었다.

까마귀는 텅텅 빈 곡식 단지를 끌어안고 저 멀리 지평선 끝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젠 익숙해진 광경 중 하나였다.

한오를 벗어나 이름을 가지지 못한 까마귀는 서쪽으로 향했다. 요수들의 공격이 특히 심한 지역이었다. 모두 동쪽으로 도망쳤으나 그는 그 물결을 거슬렀다.

모두 죽으러 가는 사람을 보듯 소년을 바라보았지만, 소년은 개의치 않았다. 그저 그곳으로 가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사흘 밤낮을 걸어 도착한 마을은 아주 작았다.

이미 한차례 요수들이 휩쓸고 지나간 듯 그곳엔 소년이 깨어난 마을처럼 시신이 즐비했다.

피와 눈이 섞여 철벅이는 길을 무감하게 걷던 소년은 반대편에 있는 마을의 끝에 다다라 작은 봉분을 보았다. 아무런 표시도, 풀도 자라지 않은 흙 봉분은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보였다.

파볼까?

고민했던 소년은 단지를 내려두고 봉긋하게 쌓인 흙을 파헤쳤다. 그러나 깨어났던 마을에서와 마찬가지로 봉분 아래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상도 하지.

있는 것이라곤 시체 썩는 냄새와 지독한 지옥밖에 없거늘. 누가 이런 무덤을 만들고 다니는 걸까.

이곳에서 살아남은 이가 만들었다기엔 소년은 자신이 깨어난 마을에서도 같은 흙 봉분을 본 적이 있었다.

그렇게 소년은 폐허가 된 마을 다섯 개를 지났는데, 그 마을엔 모두 그러한 흙 봉분이 마을 어귀를 차지했다. 그는 봉분 5개를 모두 파헤쳐 그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길을 떠났다.

죽음의 땅이라 불리는 서쪽은 모든 게 황폐해 먹을 것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배를 곯으면서도 꿋꿋하게 본능이 시키는 대로 향하던 소년은 비로소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마을 하나를 발견했다.

그곳엔 성인보다 아이들의 수가 더 많았다. 도망치며 자식을 내버리는 일은 흔한 일이었기에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소년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토록 오길 원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던가.

소년은 작은 마을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대도시인 한오와 그리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버려진 아이들은 비쩍 곯아 배만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고 이미 죽어가는 아이들도 즐비했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이곳에는 마을을 지켜주는 남자가 한 명 있었다. 허리춤에 검을 차고 등에는 활을 맨 남자는 요수들이 몰려올 때마다 가장 앞에 나가 그들을 상대했다.

소년은 그 남자를 가까이서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항상 맨 앞에 있었고 모든 걸 홀로 짊어지려는 듯 결코 물러서는 일이 없었으니까.

그를 가까이 본 적은 단 한 번뿐이었다.

“이 망할 자식! 감히 음식을 훔쳐!”

음식을 훔쳤다고 매서운 매질을 당하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소년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훔친 음식을 먹었다. 세상은 부조리하고 약한 자들은 죽어가는 시대였으니 딱히 가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만두시오. 값은 내가 치를 테니.”

하지만 마을을 지키는 남자는 달랐는지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된 아이를 추슬러 안았다. 흉터가 가득한 그의 얼굴엔 연민과 알 수 없는 죄책감이 가득했다.

자신이 한 일도 아니면서.

“괜찮니?”

털가죽으로 만든 옷에 파묻힌 남자의 얼굴이 유독 희었다. 보듬는 손길은 다정했으나 아이는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아마 이틀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소년의 예상대로 아이는 이틀을 넘기지 못했다. 아이를 묻으면서도 그의 표정은 덤덤했다. 너무 많은 죽음을 겪고 너무 많은 이별을 견뎌낸 자의 표정일까. 아니면 견뎌내다 못해 깎여나가 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의 표정인지. 소년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저 홀로 짐작할 뿐.

그리고 그날 저녁.

조금씩 간을 보듯 마을을 공격하던 요수들이 밀어닥쳤다.

지평선 너머 끝없이 요수들이 몰려들었다. 기괴한 괴성과 비명이 뒤섞인 공간은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사방에서 울부짖으며 희망을 찾았으나 마지막 희망은 홀로 버티고 서 있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도망치지 못한 아이들의 죽음을 예견한 울부짖음이 비통했다.

“허억…. 허억…….”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남자는 검집을 지지대 삼아 버티고 또 버텼다.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고 스러질 듯 스러지지 않으니 그야말로 겨울에 피어난 꽃이라.

얼굴을 알아볼 수도 없게 뒤덮은 피를 손등으로 훔치던 그는 소년과 시선이 마주치자 놀란 듯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자신을 보고 놀란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야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제 살길을 찾아 도망간 지 오래였으니까. 하지만 소년은 남자가 다급한 손길로 활을 꺼내 시위에 활을 거는 모습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쉬이익―

어느새 기척 없이 다가온 거대한 뱀이 아가리를 쩍 벌린 채 소년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피할 틈이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죽는 건가?

죽음을 예감하던 소년은 그 순간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날아온 화살이 뱀의 몸통에 꽂히는 걸 목격했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뱀이 물러서자 득달같이 달려온 남자가 소년을 옆구리에 끼고 필사적으로 달렸다. 도망치지 않고 모든 걸 감내하던 남자는 소년을 구하기 위해 도망쳤다.

한참이나 내달리던 남자는 제법 떨어진 곳에 다다라서야 소년을 내려주었다. 그는 자신이 달려온 방향을 바라보며 차갑게 일렀다.

“도망치렴.”

그게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소년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는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멀어졌다. 한참이나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소년은 다시 동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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