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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42화 (43/61)

42화

“궁금한 건 이제 끝났냐? 그럼 이제 좀 나가지?”

홀로 오래된 기억을 더듬던 자오는 고막을 찌르듯 날카로운 동백의 목소리에 현실로 끌려왔다.

이 신선은 자신이 누굴 구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때 동백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자오도 존재하지 않았다. 뱀의 배 속에서 알차게 소화되어 놈의 피와 살이 되었겠지.

처음엔 동백에게 그가 자신을 구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그가 원하는 방식대로 은혜를 갚을 생각이었지만, 생각은 달라졌다.

동백과 자신은 꽤 많은 인연으로 묶여 있었다. 지금껏 이렇게 만나지 못한 것이 신기할 만큼.

그렇다면 분명 자신이 태어난 이유 또한 동백이 쥐고 있을 거란 희망이 차올랐다. 영원히 알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메마른 강바닥 위로 다시금 비가 내리고 작은 물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게 그를 죽일 독약인지 아니면 목을 축일 물인지 모르지만 일단 마시기 시작한 이상 멈출 수 없었다.

자오는 팔을 뻗었다. 그때는 붙잡을 수 없던 뒷모습이건만 이젠 이리도 쉽게 잡혔다.

침대에 올려진 동백의 다리를 꾹 끌어안자 서늘한 체온이 느껴졌다. 자신이 유독 체온이 높아 더 서늘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아니면 이름답게 겨울을 몸에 품은 것인지.

“갑자기 왜 들러붙고 지랄이야?”

질색하며 싫어하면서도 동백은 다리를 흔들어 자오를 떼어내진 않았다. 본래 모습으로 이리 매달렸으면 검부터 뽑혀 나왔을 텐데 확실히 아이 모습에 약하긴 약한 모양이었다.

“그냥, 갑자기 졸려서요.”

슬그머니 눈을 감으며 자오는 정강이에 뺨을 비비적댔다. 동백에게서는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았다.

“여기서 잠들면 문밖으로 집어 던질 거다.”

“으음….”

“난 경고했어?”

동백의 서늘한 경고에도 자오는 몸에서 힘을 쭉 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정말 잘 생각은 없었는데 이상하게 잠이 솔솔 쏟아졌다.

이것도 몸이 어려진 영향인가. 아니면 엉망이 된 몸의 상태 때문인가.

자오의 숨이 점차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잠이 들기 전 희미하게 동백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따끈따끈해.

동백은 잠결에 품에 안은 말랑하고 보드라운 것을 꾹 끌어안았다. 마치 난로를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따뜻한 것이 그 움직임에 윽, 하고 짧은 신음을 냈다.

베개가 소리를 내던가.

잠결에 멍하니 생각하던 동백은 서서히 또렷해지는 정신에 번쩍 눈을 떴다.

분명, 잠들기 전까지 아임튜브를 보고 있었는데?

막무가내로 자신의 방에서 잠든 까마귀를 복도로 집어 던지려다가 차마 그러지 못해 제 옆에 얌전히 뉘어놓고 동영상을 보고 있었건만, 깜박 잠이 든 모양이었다.

“깨셨군요.”

동백의 품에 구겨지듯 안긴 자오가 힘없이 인사를 건넸다. 강하게 옥죄는 힘에 오래 시달린 듯 목소리가 진이 빠져있었다. 동백은 품에 안고 있던 자오를 쓰레기라도 내버리듯 냉큼 떼어냈다.

자오는 잔뜩 구겨진 옷가지를 손으로 쭉쭉 펴며 동백에게 “안고 잘 수 있는 베개를 선물해 드릴까요?”라고 여상하게 물었다.

“됐어.”

“요즘엔 말랑말랑한 것들도 많으니….”

“아 됐다고.”

민망함에 절로 날카로운 말이 툭 튀어나왔다. 어느새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모두 정돈한 자오를 괜히 삐죽하게 노려보던 동백은 문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움에 ‘음?’하고 짧게 목을 울렸다.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섞여 들리긴 하지만 그 안엔 이호영의 목소리도 있었다. 시간을 가늠해 보니 술시의 초입이라 호영이 돌아올 시간이긴 했다.

“아까부터 밖이 소란스럽더군요.”

동백이 신경 쓰고 있는 게 무엇인지 기민하게 알아챈 자오가 냉큼 고했다. 그 또한 문밖 소란스러움의 이유가 궁금한데도 동백의 품에 붙잡혀 나가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무슨 일이지?”

워낙 많은 소리가 뒤엉킨 탓에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 고시원에서 지내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공용공간에 몰려 있는 것도 처음이었기에 동백은 바로 방을 나섰다.

“형 방에 있었네?”

다른 사람과 심각한 이야기 중이던 호영이 동백을 발견하고 반가운 기색을 내비쳤다가 곧바로 우울한 낯을 했다.

“무슨 일이야?”

호영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하나같이 초상집에 온 듯 죽상을 하고 서성거리는 것이 썩 좋은 소식은 아닌 듯 보였다.

“그게….”

잠시 망설이던 호영이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준우 씨가 갑자기 쓰러졌대.”

“응…?”

준우?

처음 듣는 이름에 동백이 멀뚱멀뚱 쳐다보자 호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매일 아침 일찍 나가는 분 말이야. 형하고도 몇 번 마주쳐서 아임튜브도 같이 봤다며.”

“아.”

그자를 말하는 것이로군.

매일 아침 이른 시간에 고시원을 나가던 사람.

몸에서 짙은 흙내음과 텁텁한 먼지 냄새가 공존하던 그자.

이름은 모르지만, 얼굴은 기억하고 있었기에 동백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하고 같이 아임튜브를 봤어?”

“그쪽이 보여준 거야.”

물론, 동백이 관심을 보이니 호의로 보여준 것이긴 했다. 기본적인 심성이 나쁜 인간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갑자기 쓰러졌다니.

“사고라도 난 거야?”

동백의 물음에 호영의 표정이 조금은 묘해졌다.

“사고라면 사고겠는데….”

사고면 사고지 뭐란 말인가. 모호한 대답에 동백의 눈썹이 삐죽 솟았다.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쓰러졌대.”

“이상이 없는데 쓰러졌다고?”

“응. 게다가 쓰러진 지 3일째인데 아직도 혼수상태라고 하더라. 연락받고 병원에 다녀온 고시원 식구가 전혀 깨어날 기미도 안 보인다고 했어.”

동백이 반사적으로 자오를 힐끔 바라보았다. 자오 또한 동백과 같은 생각인 듯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현대 의학이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건 아니더라도 옛날의 의술을 생각해 보면 많이 발전한 상태긴 했다. 지금 시대 사람들이 들으면 아마 기함하지 않을까 싶은 것들도 참 많았으니.

적어도 지금 의학에서 아무런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한 번쯤은 직접 확인해 보는 게 나았다.

“병원에 다녀온 사람이 누구야?”

분명 몰린 사람 사이 있을 것이라 직감한 동백이 묻자 호영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 사람을 향했다. 다른 사람과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는 남자 한 명.

“저기 저 사람이 안준우 씨랑 그나마 제일 가깝게 지내던 분이야.”

호영이 말하기도 전에 이미 그를 지켜보고 있던 동백은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어.”

“준우 씨 관련해서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자신에게 말을 걸 줄은 몰랐다는 듯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동백을 멍하게 바라보던 그는 안준우의 이름이 나오자 금방 우울한 낯으로 되돌아갔다.

“준우를 도와주시려고요?”

그러고 보니 주변에서 유독 ‘병원비’라는 단어가 많이 들렸다. 이렇게 알린 것도 조금이라도 병원비를 지원받기 위해서였나.

고시원에서 지내는 사람들의 형편이란 거의 다 비슷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니 병원비를 전부 부담하긴 힘들 터.

동백은 태상에게 받은 금을 미리 돈으로 바꿔두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짧은 인사였으나 진심이 담긴 인사였다. 동백은 제 옆에서 얌전빼고 있는 자오를 힐끔 내려다보곤 뒤이어 말했다.

“제 옆방 놈도 흔쾌히 돕겠다고 할 겁니다.”

“옆방이라면…. 그 친구분 말씀이군요.”

“친구 아닙니다.”

왜 하나같이 친구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네.

쯧.

속으로 혀를 찬 동백과 다르게 남자는 한결 안도하는 표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들 도와주신다고 하셔서 그래도 한시름 놨네요.”

마땅히 도움을 청할 곳도 없어 고작 같은 고시원에 사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청년의 눈시울이 조금 붉게 물들었다.

“혹시 병원에 직접 찾아가 봐도 되나요?”

“가보셔도 상관은 없지만, 면회가 될진 모르겠네요.”

그의 말에 동백은 아주 희미한 미소를 내보였다.

“병원하고 호수만 알려주세요.”

그럼 나머지는 알아서 할 테니.

“아무런 이상도 없는데 깨어나지 못하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 아닙니까.”

병원으로 향하는 동백의 걸음에 맞춰 짧은 다리를 바쁘게 놀리던 자오가 말했다.

“이상한 일이니까 직접 가보는 거 아냐.”

동백은 그런 자오를 힐끔 내려다보다가 걷는 속도를 조금 늦췄다.

“혹시 선동꾼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럴 수도 있지. 갑자기 내 주변의 사람이 화를 입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니까.”

자오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믿기지 않지만, 선인님은 평안을 수호하는 신이니까요.”

“그러다 한 대 맞으면 안 아프지?”

“아프죠.”

슬그머니 주먹을 들어 깐죽거리는 자오의 입을 다물게 만든 동백은 버스 정류장에서 병원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이번 정류장은….』

창틀에 턱을 괴고 스쳐 지나가는 창문 밖의 풍경을 한참 바라보던 동백은 제 옆에 앉아 핸드폰으로 뭔가를 열심히 하는 자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힐끗 화면을 보니 비서인 이명현에게 보내는 지시가 빼곡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적은 메시지를 발송한 자오를 가만히 바라보던 동백은 문득 입을 열었다.

“야.”

“…?”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화면에 집중하던 자오의 시선이 동백을 향했다.

“불편한 점밖에 없을 텐데 모습은 갑자기 왜 바꾼 거냐?”

“그게 이제야 궁금하십니까?”

참으로 빨리도 묻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동백은 자오의 시선이 그리 말한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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