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백-43화 (44/61)

43화

“네놈의 변덕을 내가 다 알아야 할 필욘 없잖아.”

“그야, 그렇지요.”

탁-

핸드폰을 접어 품에 넣은 자오가 뾰로통한 얼굴로 홱 고개를 돌렸다. 누가 봐도 ‘나 삐졌소.’라고 말하는 행동이었다.

“네 입으로 외모는 어려졌어도 두뇌는 그대로라며. 귀여운 척하지 마라.”

“안 통합니까?”

“안 통해.”

동백의 매정한 말에 자오는 금방 표정을 바꾸며 느른하게 웃었다.

“일종의 도박이었습니다.”

“도박?”

“그리고 절반 정도는 투자에 성공했지요.”

자오의 말에 동백의 미간에 골이 깊게 파였다.

그러니까 도박이라는 게….

『이번 정류장은 ○○대학교 병원. 다음 정류장은…』

동백이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버스 안에서 내려야 할 정류장의 방송이 울렸다. 뭔가 떠오를 듯하다가 생각의 꼬리를 순식간에 놓쳐버린 동백이 영 찝찝한 얼굴로 버스에서 내렸다.

“바로 병실로 가실 겁니까?”

“그래야지.”

직접 봐야 정말 현대 의학이 알아내지 못한 병인지 아니면 현대 의학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일인지 구별할 수 있을 테니까.

멀리서도 보이는 건물을 확인한 동백은 자오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

그 시선을 느낀 자오가 동백을 올려다봤을 때 그는 평소보다 아주 느린 걸음으로 먼저 걷기 시작했다. 걸음이 느린 어린아이도 뒤처지지 않고 나란히 걸을 수 있을 만한 속도였다.

‘이러니까 절반은 성공했다는 겁니다.’

차라리 완전히 매정했다면 무리해서라도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을 텐데. 이리 어중간하게 상냥한 점을 발견해 버리니 더 기대하게 되지 않나.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동백은 동백 나름대로 선동꾼의 목적을 골똘히 생각하느라 바빴고 자오는 동백이 보여주는 틈을 어디까지 파고들 수 있을지 가늠했다.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로비에 도착한 동백은 곧 병실과 연결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중환자실 306호라 했으니 층수는 3층이요, 호수는 6호라.

사람들 사이에 섞여 성공적으로 3층까지 도달한 동백은 입구를 지키는 간호사를 보고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중환자실은 보통 사람들의 출입이 통제되지만, 동백은 그녀를 자연스럽게 지나쳤다. 입구를 지키던 간호사 또한 동백이 중환자실을 드나드는 게 당연하다는 듯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자오 또한 기척이 희미하니 두 사람은 무사히 면회가 제한된 중환자실의 문턱을 넘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중환자실은 아주 조용했다. 인공호흡기를 단 이들과 미동도 없이 침상에 누운 이들에게선 더 이상 생기라곤 보이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생의 마지막 끈을 붙잡은 이들을 지나친 동백은 비로소 안준우를 찾아냈다.

그와 연결된 모니터에는 바이탈이 안정적인 흐름으로 고요히 흘러갔다. 잠이 든 듯 고른 호흡과 편안한 얼굴을 한 그이지만 벌써 사흘, 아니 날이 밝은 후 왔으니 나흘을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동백은 그를 가만히 살폈다. 특별한 외상도 없고 현대 의학으로 별다른 이상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건 인간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동백의 곁에서 까치발을 하고 안준우를 살피던 자오도 미간을 좁혔다.

“혼백이 없군요.”

“그리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무릇 혼백을 빼내기 위해서라면 사용한 힘의 흔적이 마땅히 느껴져야 하건만 안준우에게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직접 선동꾼을 대면했던 어둑서니가 선동꾼에게서는 사기도, 선기도 느끼지 못했다고 한 게 바로 이런 뜻이었나.

안준우를 이대로 혼백이 없는 상태로 놔둔다면 육체가 점점 쇠약해지다가 죽을 게 뻔했다.

“목적이 뭘까요.”

자오의 혼잣말에 가까운 물음에 동백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침상 위 안준우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글쎄….”

인간의 혼백을 가져다가 어디에 쓰려고.

따지고 보면 기운의 덩어리나 다름없으니 힘을 키우는 데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키운 힘은 순정함을 잃은 체 혼탁해져 결국 육신을 잡아먹고 그저 끔찍한 괴물이 될 뿐이었다.

순수하게 자신을 가다듬고 깎아 선경에 오른 신선들과 달리, 요선이라는 존재가 바로 그렇게 탄생한 이들이니 말이다.

“요선이라면….”

동백과 비슷한 생각을 한 자오가 조심스레 의견을 내었으나 동백은 고개를 저었다. 요선이 개입했다면 이렇게 깨끗할 수가 없었다. 가진 기운이 요수보다도 혼탁하고 뒤끝이 아주 지저분한 놈들이니까.

“어쨌든 이리 놔두면 죽을 테니 조치를 좀 취해야겠다.”

동백이 천천히 선기를 끌어모았다. 맑고 청명한 동백의 기운이 중환자실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천천히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의 선기가 환자들의 육신에 남은 미약한 기운을 보호하고 남은 생명력을 북돋우며 균형을 수호했다. 순식간에 주변에 누운 이들의 안색이 훨씬 밝아졌다.

가진 선기를 모두 안준우와 주변 환자들에게 쏟아붓는 동백의 행동에 자오가 질책하듯 투덜댔다.

“기운을 너무 펑펑 쓰시는 거 아닙니까?”

“쉬면 채워지는 걸 가지고 쩨쩨하게 굴 필욘 없잖아.”

조금 남은 선기마저 완전히 털어낸 동백이 애써 지친 기색을 숨기며 의연하게 허리를 반듯이 세웠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나 지금 동백은 속이 텅텅 빈 강정과도 같았다. 습격이라도 받는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게 분명하기에 자오는 주변 경계를 한층 높이며 다시금 동백을 향해 나무랐다.

“이게 선동꾼이 노리던 일이면 어쩌시려고요.”

“넌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겠다.”

“차라리 구더기면 낫죠.”

중환자실을 나와 1층 로비로 내려온 동백은 병원의 수납처로 향했다. 안준우를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이번 일은 순전히 동백으로 인해 일어난 일에 가까웠다. 그러니 동백은 이번 일로 발생한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납하시려고요?”

입·퇴원을 담당하는 병원 수납처의 직원이 밝은 목소리와 미소로 동백을 반겼다.

“네. 중환자실에 입원한 306호 안준우 환자 입원비를 내려고 합니다.”

“으음…잠시만요.”

뭔가를 확인하는 듯 컴퓨터를 보던 직원의 표정이 조금은 어두워졌다. 그녀가 이곳에서 근무하며 가장 상대하기 껄끄러운 상대가 바로 중환자실에 입원한 환자의 가족들이었다.

유독 비싼 입원비와 더불어 언제 깨어나거나 회복될지 모르는 환자의 상태. 그 탓에 가족들은 예민해져 있기 마련이라 항상 조심하곤 했다.

그녀는 이번에도 동백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중환자실은 비급여항목이 많아서 입원비가 좀 비싼 편이에요.”

동백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래도 지금은 태상이 준 금을 모두 돈으로 바꿔두어 나름 풍족한 상황이었다. 지난 삼십 년간 이보다 돈이 많았던 적은 없기에 결단을 내린 동백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얼마가 나오든 자신이 감당하기로 했던 부분 아닌가.

“일단 주에 평균적으로 250만 원 정도는 나오실 거고요. 혹시라도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사용되는 약물이나 기구에 따라 추가 금액이 발생하실 순 있으세요.”

“…….”

말을 이어 나가던 병원 직원이 슬그머니 동백의 눈치를 봤다. 여기서부터가 가족들이 예민해지는 시점이었다.

일주일에 250만 원. 거기에 발생할 추가 금액.

누군가에겐 내기 쉬운 돈일 수 있고, 또한 누군가에겐 절망스러운 금액일 수도 있었다. 안준우 환자의 경우에는…아마 절망스러운 쪽에 가까우리라. 그가 실려 온 곳은 건설 현장이었고 그는 일일 노동자였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동백이 곤혹스러워하고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동백은 그녀의 말에 제 전낭 안에 든 돈을 헤아리고 있었다.

선동꾼을 잡아도 이미 혼백을 잃어버린 안준우가 깨어날 수 있을지 없을진 모른다. 어쩌면 평생 그는 이 좁은 병원에서 지내야 할 수도 있었다. 한 사람의 평생을 책임진다는 건 무척이나 무거운 일이나 동백은 무조건 해내야만 했다.

“일단 육천 먼저 낼게요.”

“예?”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안 직원이 놀라 반문했다.

“육천이면 비상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6개월 입원 비용이죠?”

“그, 그렇죠?”

단순 계산법으로는 그러했기에 직원이 얼결에 답했다.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자오는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계산기를 돌렸다.

가지고 있는 금을 바꿀 때 동백은 여러 가게를 돌며 약 3kg 정도의 금을 돈으로 바꾸었었다. 당시 시세로는 약 2억이 조금 넘는 금액을 현금으로 받았으니 적은 돈은 아니었다.

그중에 6천만 원이면 무려 삼분지 일이다.

동백이 품에서 전낭을 꺼내 동그랗게 말린 돈의 수량을 확인하고 직원에게 넘겼다. 총 60개의 뭉치를 받아 든 직원은 손바닥만 한 전낭에서 그 정도의 수량이 튀어나온 것보다 6천만 원을 현찰로 결제해버리는 상황에 놀라 허둥댔다.

그녀가 말린 돈을 풀어 기계로 돈을 세는 사이 자오는 동백의 옷자락을 꾹 잡아당겼다.

“왜?”

언제나처럼 퉁명스러운 목소리에선 큰돈을 사용하고도 별다른 동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무려 자신이 몇십 년간 사용해야 하는 돈의 삼분지 일이나 쓰고도 말이다.

일말의 아쉬움이나 아까운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는 동백을 향해 자오는 ‘괜찮냐’라고 물어보려다 말을 바꾸었다.

“방 하나는 언제든 비워 두겠습니다.”

가진 돈은 언젠가 다 떨어지기 마련이고, 기회는 오기 마련이니.

발 뻗을 곳을 알고 양다리를 쭉 뻗은 자오의 행태에 동백의 얼굴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결국, 동백이 노숙자가 된다는 걸 예견하는 말이 아니던가.

“네놈의 둥지로 기어들어 가느니 하늘을 벗 삼고 땅을 침대 삼아 지내는 게 훨씬 낫다.”

“그럼 매일 문안 인사라도 드려야겠군요.”

“염병할 놈.”

욕을 먹고도 실실 웃는 자오를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노려본 동백은 돈을 확인하는 직원을 살폈다. 60개의 뭉치 중 절반 이상을 풀어 확인한 걸 보니 곧 끝날 듯했다.

“그런데, 선동꾼을 잡아도 저 치가 깨어나지 않으면 어쩌실 생각입니까.”

“책임져야지.”

그의 혼백을 구하진 못하였어도 남은 육신마저 지옥으로 처박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