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동백의 단호한 대답에 자오는 뒤이어 물었다.
“다른 인간이 또 이리된다면요?”
“그래도 책임져야지.”
절대 변하지 않을 동백의 단단한 태도에 자오는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따져보면 동백도 피해자가 아닌가. 갑자기 나타난 선동꾼은 일을 저지르고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건만, 왜 동백이 모든 걸 짊어져야 하는지 이기적인 요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왜 그리 필사적으로 모든 걸 감당하려 하냐고 물어보려던 자오는 환희에 찬 병원 직원의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다 되셨어요! 총금액 육천만 원 확인했습니다.”
뿌듯한 얼굴을 한 그녀는 마지막 돈뭉치를 책상에 탁탁, 내리쳐 정리하곤 수북하게 쌓인 다른 돈뭉치 위로 올렸다.
동백은 영수증을 건네는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쥐꼬리만큼 남은 선기를 털어 약간의 효과를 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혹시 나중에 저 말고 다른 사람이 병원비를 내겠다고 찾아오거든 절대 받지 마세요.”
“예?”
“절대로요.”
직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몽롱한 표정을 한 그녀를 뒤로하고 길을 나선 동백의 뒤를 따르며 자오는 남겨진 직원을 힐끗 쳐다보았다.
“저보고 사람을 홀리느니 마느니 할 처지가 아니신 듯싶은데요.”
“이건 홀린 축에도 못 들어.”
“그렇겠죠. 주윤오 씨를 보면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
뭔가 익숙한 이름에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던 동백은 곧 기억해내곤 아, 하고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사람 이제 좀 괜찮아졌지?”
“그게 어떻게 보면 나름대로 괜찮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일은 문제없이 하고 있으니까.”
“…어떤데?”
자오는 흠, 하고 목을 울렸다. 그의 기준에서 주윤오는 꽤 유능한 인간이었는데, 동백에게 한 번 홀린 이후로는 좀 어딘가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데 동백과 닮은 사람을 유독 찾아다닌다거나 아니면 자신의 기억 속에 남은 동백의 모습을 최대한 묘사해 그림으로 남기려 든다거나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는 어떻게든 남은 기억을 뒤흔들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경애의 잔여물을 끌어안고 아등바등 버티고 있었다. 그런 그가 동백을 다시 보면 마치 신이라도 만난 것 같이 무릎이라도 꿇고 기도라도 올리지 않을지, 자오는 그리 생각했다.
“혹시 종교 창시에 관심 있으신가요?”
“갑자기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야.”
“혹시 창시하신다면 제가 1호 신도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망할 까마귀는 말을 할 때 상대방이 간단히 받아들이게 두질 않는다. 몇 번을 곱씹고 생각을 해 보아야지 그 말속에 든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하니까.
“넌… 정말 엿 같은 언어습관을 가지고 있어.”
“극찬이시군요.”
“칭찬 아니거든?”
기뻐하는 자오에게 핀잔을 준 동백은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때맞춰 온 버스에 올랐다.
“저기 한 자리 있네요.”
많은 사람 틈새로 자리를 발견한 자오가 쪼르르 달려가 동백을 돌아봤다.
“여기 앉으시죠.”
빈자리는 하필 노약자석이었다.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나이가 많은 동백이나 약하진 않기에 그는 심술궂게 비죽 웃었다.
“나 말고 네가 앉아야겠네.”
“…음?”
반 박자 늦게 동백의 말에 숨은 뜻을 알아차린 자오가 그답지 않은 무척이나 예의 바르고 정중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하, 무슨 말씀이신지. 당연히 저보다 나이가 많은 분께 양보해야죠.”
“노약자가 무엇이냐. 늙거나 약한 사람인데, 지금은 네가 약한 게 맞잖아?”
“조금이라도 어린 제가 양보해야 그 의미가 더 맞지 않겠습니까.”
의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팽팽한 접점을 벌이던 두 사람의 사이로 매서운 기류가 흘렀다. 호영이 옆에 있었다면 고작 앉는 것 가지고 뭘 하냐고 핀잔이라도 줬겠지만, 이호영은 이곳에 없었다.
결국, 다음 정류장에서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앉고 나서야 두 사람의 유치한 기 싸움은 막을 내렸다.
“선인님이 절 이렇게 챙겨주시다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입에 발린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자오를 뚱한 얼굴로 쳐다보던 동백은 대화 중 뒤로 밀려버린 주제를 다시금 끌고 와 입에 담았다.
“그래서, 주윤오? 그 사람이 아직도 좀 맛이 가 있다. 그 말이야?”
“맛이 갔다고 하기엔 좀 그렇죠. 그냥 새로운 종교가 생긴 겁니다. ‘동백교’라고.”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동백교라니, 정말 사이비로 몰매 맞아도 이상할 게 없는 이름 아닌가. 동백이 진심으로 질색하며 싫어하자 자오는 오히려 키득거리며 새로운 종교를 위한 전도 방식까지 손수 제안했다.
“그럼 전도는 이렇게 하도록 하죠. 요즘 시대에 ‘도를 아십니까’는 너무 식상하니 ‘동백을 아십니까.’라고 하는 겁니다.”
“진심이냐?”
“순도 백 퍼센트 진심입니다만?”
자오는 동백의 구겨진 표정을 한껏 감상했다. 약간의 텀을 두고 서서히 가늘어지는 눈이 자오를 향한 의심을 가득 담고 있었다.
“내가 직접 봐야겠어.”
삐익―!
동백이 버스의 버저를 눌렀다. 여기서 제이오 엔터까지는 버스를 갈아타면 금방이었다. 자신을 놀리기 위해서라면 비약이란 비약은 모두 할 놈이니 당연히 주윤오의 상태도 그러하다고 여겼다.
자오는 “그러지 않는 걸 추천합니다.”라고 권했으나 동백은 그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버스를 갈아타고 여전히 하늘을 찌를 듯 높은 제이오 엔터의 건물 앞에 도착한 그는 당당히 요구했다.
“얼른 그 사람 불러.”
“…지금, 이 모습으로 회사 사람을 만나라 이겁니까?”
“부르고 넌 피해 있던지.”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동백의 기세에 자오는 가볍게 으쓱였다. 자신은 분명 한 번은 말렸다. 이후에 벌어지는 일은 동백이 감당할 일이었다.
그는 이명현에게 연락을 넣어 로비에 있는 동백을 챙기도록 명령했다. 이명현은 몹시 귀찮아하긴 했으나 상사의 명령에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로비로 내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네요.”
“안녕하세요.”
“그럼 저는 제 사무실에 가 있을 테니 용건이 끝나면 전화 주십시오.”
자오는 그 말을 끝으로 순식간에 사람들 틈 사이로 자취를 감추었다. 귀신같은 퇴장에 이명현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튼….”
많은 게 함축된 말을 입안으로 중얼거리던 이명현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백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별다른 설명도 없이 동백을 도우라는 상사의 명령에 끌려 내려온 유능한 비서는 귀찮음이란 감정을 얼굴에서 깨끗하게 지웠다. 그의 눈앞에 있는 건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변태같이 어린애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그의 상사와 함께 다니는 상대였다.
“주윤오라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데요.”
이명현은 익숙한 이름에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굳이 회사에 와서 자신을 붙여둔 거면 분명 회사 사람이리라. 그리고 그가 아는 제이오 엔터에 소속된 주윤오는 한 명뿐이었다.
“…데뷔라도 하시게요?”
저도 모르게 이명현은 동백을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훑었다. 키는 좀 작지만 비율도 좋고 외모도 뛰어나고… 까지 생각했던 그는 제게 향한 동백의 삐죽한 시선에 황급히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물론 그러실 리는 없겠죠.”
동백의 눈치를 살피며 핸드폰을 꺼내 든 그는 바로 주윤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명현은 제이오 엔터의 대표이사 ‘한아’를 위해 일하면서도 요수 ‘자오’의 총괄 비서이다 보니 회사 주요 요직에 앉은 이들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모두 외우거나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는 기획실장인 주윤오 또한 포함되어 있기에 그는 바로 주윤오를 로비에 붙은 카페로 불러들였다.
바쁜 와중에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은 주윤오가 꽤 불편한 심기를 내보였으나 이명현은 ‘한아 대표이사님의 중요한 손님’이라는 말 하나로 주윤오를 가볍게 제압했다.
“금방 내려올 겁니다. 날이 꽤 추우니 저기 카페라도 가서 따뜻한 커피라도 드시죠.”
동백은 이명현의 안내를 따라 카페로 향했다.
상강을 지나 입동 이후 급속도로 추워지는 날씨는 겨울바람이 되어 매서웠다. 며칠 후엔 곧 소설이니 그때부턴 눈이 내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자신은 그리 춥지 않아도 평범한 인간인 이명현은 얇은 정장 재킷 하나만 덜렁 걸치고 있으니 꽤 추울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뭐 드시겠어요?”
지갑에서 법인카드를 꺼내 든 이명현이 자신 있게 물었다. 아메리카노가 아닌 그 어떤 비싼 메뉴라도 결제할 수 있다는 당당한 몸짓이었다. 동백은 메뉴를 살피다가 마지못해 따뜻한 레몬차를 골랐다. 향은 좋으나 시고 쓴 커피는 동백의 취향이 아니었다.
“레몬차로요.”
“다른 건 더 안 드시고요?”
이명현이 유리 케이스 안에 진열된 케이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기회가 왔으니 회사 법인카드를 팍팍 긁을 생각이었다. 사실 이명현도 고작 이 정도 돈을 쓴다고 자오에게 타격을 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냥 조금이라도 회삿돈을 합법적으로 탕진하고 싶은 회사원의 작은 일탈이었다.
그런 사실을 동백이 알았다면 적극적으로 응했을 텐데, 아쉽게도 동백은 이명현이 꺼내든 카드가 법인카드라는 걸 몰랐다.
“괜찮아요.”
동백의 사양에 이명현은 이제 곧 내려올 주윤오의 커피 한 잔을 추가로 주문한 뒤 자리를 잡았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잔에선 은은한 레몬 향기가 났다. 신선은 살짝 눈을 감고 달짝지근한 레몬차를 입술에 축이듯 맛보았다.
낯선 기척들 사이로 조금은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한 걸음, 두 걸음. 점차 거리가 좁혀지다 카페의 문이 열리는 순간, 동백은 눈을 떴다.
“왔네요.”
“예?”
카페 입구를 등지고 앉은 동백이 불쑥 내뱉은 말에 뒤늦게 주윤오를 발견한 이명현이 엉거주춤하게 일어섰다.
“주 실장님.”
하지만, 이명현의 부름에도 주윤오의 시선은 동백의 뒤통수에 꽂혀 있었다. 크게 뜨인 두 눈과 살짝 벌어진 입, 어딘가 넋이 나가버린 표정은 마치 소스라치게 놀란 것 같으면서도 광기 어린 희열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이, 이…럴 수가. 동백 님?”
주윤오가 냉큼 달려와 테이블 앞에 경건하게 무릎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