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두 손을 모으고 푹 숙인 고개가 마치 신을 영접하는 신도처럼 경건했다. 동백은 찻잔을 내려두었다.
거짓말인 줄 알았더니.
진짜였냐.
한숨이 입술 사이로 폭 새어 나왔다. 자신을 바라보는 주윤오의 눈이 번들번들 젖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울먹이는 표정도 감동에 벅차 어쩔 줄 몰랐다.
게다가 동백의 능력이 아니었으면 다짜고짜 달려와 무릎을 꿇은 행동으로 시선이 몰려도 한참 몰렸을 상황이었다.
“다시는 못 뵐 줄 알았습니다.”
공손하다 못해 극진한 주윤오의 말에 이명현의 눈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저걸 어찌 되돌려 둔다?
딱 봐도 제정신은 아닌 것으로 보이지 않나.
그건 이명현의 표정만 봐도 극명했다. 그는 주윤오를 미친놈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영안 때문인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변수가 그것밖에 없었다.
“일단 의자에 앉으세요.”
“제가요…?”
감히 그래도 되나요?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표정으로 모든 걸 드러내는 주윤오에게 동백은 “제발 의자에 앉으세요.”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자리를 좀 비켜드릴까요…?”
기묘한 분위기에 압도된 이명현이 조심스레 묻는 것에 동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 어딘가 단단히 잘못되어버린 인간을 좀 정상적으로 돌려줄 필요가 있었다.
이명현이 끝까지 눈치를 보며 카페를 벗어나는 새 동백은 주윤오를 꼼꼼히 살폈다. 그는 자오의 말대로 겉모습은 멀쩡해 보였다.
다만, 제정신이 아닐 뿐.
동백이 자신을 살피듯 동백의 얼굴을 혼이 나간 듯 황홀하게 바라보던 주윤오는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곧 닭똥 같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다들 동백 님이 있는데도 바라보지 않을 수 있죠?”
그게 문제냐고.
그야 당연히 동백은 자신의 능력 때문이라는 걸 알지만, 영안으로 동백의 능력을 어느 정도 벗어난 주윤오가 보기에 이 상황은 이상하기만 했다. 그에게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존재인 동백이 있는데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다니.
자신이 보았던 동백에 대한 경애를 세상 널리 알리고 싶어 하는 다소 사이비 교주 같은 주윤오의 두 눈이 순식간에 표독스러워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그는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제가 바로 김 작가에게 연락을 넣겠습니다.”
김 작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동백은 적당히 주윤오를 달랬다.
“절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드무니 흥분하지 마시고….”
동백의 입장에선 그냥 대충 달래주려 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주윤오를 더 미치게 했다.
이건 그에겐 계시였다.
오직 자신만이 아는 특별함을 널리 알려 세상의 모든 경애를 바쳐야 한다는 사명감에 타올랐다. 이것을 위해 동백이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알겠습니다.”
신념이 깃든 목소리엔 흔들림이 없었다.
“꼭 동백 님을 널리 알려….”
“거기까지.”
열의에 불타는 주윤오의 목소리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짤랑, 맑게 흔들리는 노리개 소리가 소란스러움을 가르고 선명하게 울렸다.
동백에게 긴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흐드러지게 쏟아졌다. 짙은 벽도화 향기와 어우러진 감미로운 목소리가 동백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이러니까 제가 안 만나는 걸 추천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책망하는 말투에 동백의 눈썹이 들썩였다.
“끝나면 연락하라더니?”
“얌전히 기다리려 했는데, 이럴 줄 알고 무리해서 왔죠.”
어린아이의 모습을 벗어던진 자오가 느른한 눈으로 주윤오를 내려보았다. 동백이 곤란해하는 꼴이 우스워 그냥 내버려 두려 했더니 가만두면 정말 종교라도 창시할 기세에 어쩔 수 없이 내려온 참이었다.
몸 상태는 최악이고 짧은 시간에 뒤틀린 근육과 웃자란 뼈 때문에 작은 움직임에도 욱신거리는 통증이 뒤따랐다. 이 상태로 동백과 드잡이질을 한다면 어린아이의 모습일 때보다도 더 불리할지 몰랐다.
하지만 욕심 많은 까마귀는 그 누구와도 동백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아직 동백이 독이 든 독배인지 아니면 달콤한 감로주가 든 잔인지는 몰라도 그 맛을 볼 때까진 오직 그의 것이었다.
새의 발톱처럼 억센 손이 동백의 어깨를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앞으로 깊게 숙인 상체는 마치 동백을 뒤에서 끌어안는 듯 바짝 가까워졌다.
“그냥 화보까지 찍게 둘 걸 그랬나요?”
예쁘게 나오셨을 텐데….
진심에도 없는 말을 하며 자오는 짓궂게 키득댔다.
“이, 이사님…?”
그런 자오를 뒤늦게 알아본 주윤오가 버벅댔다. 그의 기억에 남은 대표이사 ‘한아’는 아주 정갈한 사람이었다. 깔끔한 옷차림과 빼어난 일 처리 능력, 뛰어난 사업 수완을 지닌 완벽한 기업의 리더에 가까웠다.
저렇게 머리를 길게 기르고 요사스럽게 웃는 남자가 아니라.
“주윤오 실장님. 미안하지만, 당신의 신은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라서 말입니다.”
동백은 몸을 기대는 자오를 그대로 바닥에 메다꽂을지 고민했다.
바닥이 대리석인 걸 보니 저놈의 머리가 아무리 단단해도 성하진 않겠다고 생각하던 그는 충격이라도 받은 듯 입을 벙긋거리는 주윤오를 발견하고 잠시 자신의 욕망을 꾹 눌러 참았다.
까마귀 새끼가 뭔가 생각이 있어서 저런 말을 지껄이겠….
쪽.
…….
……….
방금 내 정수리에 닿은 게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나?
스릉―!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검날이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자오는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가볍게 몸을 물려 검을 피했다.
“그거 아십니까 선인님?”
동백이 쉬이 쫓지 못하게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파고들며 자오가 밉살스럽게 입을 놀렸다.
“본디 동백꽃은 아무런 향기도 지니지 못했거늘, 그 이름을 지닌 신선에게서는….”
카페 안을 크게 한 바퀴 돌아 본래 자리로 돌아온 자오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검을 응시하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이제 벽도화 향기가 나는군요.”
동백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허공에서 멈춘 검날이 아슬아슬하게 자오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검이 조금만 더 내려왔다면 머리가 반으로 갈라질 상황이었는데도 자오는 태연하게 검날을 피해 고개를 기울였다.
주윤오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독하게 이상한 광경이었다. 사극에 나오는 인물처럼 검을 휘두르는 동백과 그런 동백을 피해 긴 옷자락을 흩날리며 요사스럽게 웃는 대표이사라니.
더 이상한 건 아무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는단 점이었다.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날뛰는 두 사람을 오직 그만이 눈으로 좇고 있었다.
“…어?”
공포에 억눌린 신음이 주윤오의 꽉 다물린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야~ 그래서 오빠가~”
제 눈앞으로 검날이 스쳐도 맑게 웃으며 지나가는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꺄르르.
꺄르르르.
딸랑-
카페의 문에 달린 종이 울리며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순간까지도 주윤오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벼락에라도 맞은 듯 몸을 떨었다.
“아… 아아…!”
되짚어 보니 처음부터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애초에 자신 말고 아무도 저 동백이라는 남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저렇게나 눈에 띄는 외모를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자신이 무릎을 꿇고 그 난리를 쳤음에도 주변은 아주 잠잠했다.
“허, 허억!”
등줄기를 타고 쭈뼛 소름이 돋았다. 공포로 뻣뻣하게 굳은 몸이 삐걱거렸다. 꽉 틀어막혀있던 숨을 겨우 들이쉰 주윤오가 황급히 도망치듯 카페를 벗어났다.
우당탕!
그가 달려가며 건드린 의자가 요란한 소음을 내며 넘어졌다. 그로 인해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마저 그에겐 공포로 다가왔다.
바로 옆, 아직도 검을 빼 들고 있는 동백과 자오에겐 아무도 시선을 주지 않았으므로.
“으어, 으허아억!”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그는 결국 그 자리에서 두 눈을 까뒤집으며 뒤로 벌렁 넘어가 버렸다.
“사람이 쓰러졌어!”
“누가 구급차 좀 불러주세요!”
순식간에 카페 안이 시장통같이 소란스러워졌다. 주윤오의 주변으로 직원과 손님 너나 할 것 없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이 숙덕대며 그의 안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동백은 그 소란 속에서 슬그머니 올라가는 자오의 입꼬리를 발견했다.
◆
벽도화 향기를 품은 부드러운 바람이 동백의 머리카락을 희롱하듯 스쳐 지나갔다. 부쩍 다가온 겨울의 매서움을 피한 소담스러운 꽃들과 바짝 잘려 푹신푹신한 잔디는 그 나른함에 그대로 몸을 맡기고 싶을 정도로 포근했다.
여기가 자오의 공간만 아니라면 말이다.
풀밭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동백은 태평하게 차를 우리는 자오를 불퉁하게 노려보았다. 바닥에 다반을 두고 무릎을 꿇고 앉은 사내는 우아하고 고상했다.
“그리 노려보셔도 차가 빨리 우러나진 않습니다.”
“누가 그런 풀 우린 물 때문에 쳐다보는 줄 알아?”
“그럼 새삼스럽게 제게 그런 쪽의 관심이라도 생기셨나요?”
달칵.
다반에 다관을 내려 둔 자오가 이번엔 찻잔을 들었다. 그는 약간의 풀 내음이 섞인 향긋한 냄새를 음미하듯 눈을 내리감았다.
“별 매력도 없는 게 치명적인 척 좀 그만해라. 너 못생겼다니까.”
지극히 주관적인 못생김의 잣대를 들이대며 동백이 끌끌 혀를 찼다.
“제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선인님뿐일 겁니다.”
“그야 당연한 거 아니냐. 네놈 앞에서 사실대로 말했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다들 쉬쉬하는 거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를 하느라 입이 아팠다. 누가 저 성질 더러운 놈 앞에서 이렇게 진실에 입각한 사실을 친절하게 말해줄까. 자신밖에 더 있겠는가.
동백이 더 말해 뭐하냐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네가 못생긴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 그 이야기는 이쯤 하고.…일부러 그랬냐?”
앞뒤를 전부 잘라먹고 주어도 없이 묻는 말에도 자오는 당황하지 않았다. 동백은 그에게 아주 엿 같은 언어습관을 가졌다고 비난했지만, 실상은 동백 또한 그리 좋은 대화상대는 아니었다. 자오에게 동백은 일종의 ‘개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먹어야 하는 질 나쁜 상사’에 가까웠다.
“주 실장 말이지요?”
자신의 추측이 틀리진 않을 테지만 확인하듯 한 번 더 물은 자오는 동백의 표정에서 보이는 긍정에 느긋하게 잔을 내려두고 다시 찻물을 채웠다.
“광신(狂信)이란 단어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단어지 않습니까.”
툭, 툭. 손으로 짧은 잔디를 뜯으며 동백이 무릎을 세워 그 위로 턱을 괴었다.
“그리 좋은 말은 아니니 자주 쓰진 않지.”
광신에 매몰된 이들은 하나같이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믿음이 옳다 여기며 상대방의 의견 따위는 귀찮은 잔소리나 이단에 지나지 않다고 여겼다.
방금 만났던 주윤오도 그러했고.
툭. 굵은 잔디 줄기를 끊은 손톱 끝에 초록색 흔적이 짙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