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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46화 (47/61)

46화

“주 실장은… 종교적인 광신과는 사실 조금 결이 달랐지요.”

달그락.

찻잔을 잔탁 위에 돌려둔 자오는 무릎으로 풀 위를 걸어 동백에게 다가왔다. 그의 움직임에 짓눌리고 꺾인 풀의 싱그러운 향취가 자오의 체취와 함께 뒤섞여 훅 밀려들었다.

“직업적 특성인지 그는 선인님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야 한다는 ‘광신’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자오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풀물이 든 동백의 손끝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너무도 희어 여려 보여도 오래 검을 쥔 무인의 손은 거칠고 단단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거야 나도 파악한 부분이고.”

자오에게 손을 내맡긴 동백은 손톱 끝 좀 잘 닦아 보라며 그를 채근했다. 그의 요청에 따라 차근차근 풀물을 지운 자오는 저도 모르게 희미하게 입가를 끌어올렸다.

이전에 아이스크림을 닦아줄 땐 용건이 끝나니 그리 매정하게 손을 거두었으면서 이젠 시켜 먹느라 바쁘다. 관계의 진전인지 아니면 그냥 그를 시종처럼 부려 먹는 게 당연해진 건지 몰라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게 저와 똑 닮았더군요.”

까마귀인 그가 집착적으로 모든 반짝이는 것들을 모았듯 인간 또한 반짝이는 것들을 사랑했다.

누군가는 빛 아래서 찬란히 빛나는 보석을, 또 누군가는 만인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애쓰며 빛을 내는 인간을.

주윤오의 ‘광신’은 그중 후자와 닮아 있었다.

“주 실장은 팬들이 연예인을 사랑하듯 그렇게 선인님을 바라본 겁니다. 그게 아이돌 그룹을 만들어 내는 직업과 합쳐지니 더 유별났던 거겠죠.”

“…고작 그걸로 그렇게까지 군다고?”

동백의 의문에 자오는 자신이 봐왔던 모든 것을 떠올렸다.

“때로 사랑은 아주 이기적인 감정이 아니겠습니까. 받는 쪽의 의사는 아무 상관도 없는 거지요.”

“그런가….”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의도였다곤 해도….”

반질반질 본래의 색을 되찾은 동백의 손톱을 확인한 자오가 손을 놓아주며 끊겼던 말을 이었다.

“상대가 그걸 원하지 않는다면, 결국 모두 다 헛된 감정에 불과하겠죠.”

자오는 뒤로 몸을 물렸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걸 본 동백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흘렀다.

이놈은 손도 따뜻하더니 입술도….

잠깐….

“그래서, 네놈이 내 정수리에 입……. 그걸 한 이유가 뭐야?”

차마 입맞춤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 못한 동백이 버벅댔다.

주윤오가 자신을 요즘 아임튜브로 배운 단어로 표현하자면 꽤 거친 ‘덕질’을 했다는 건 잘 알겠는데, 그게 왜 까마귀 놈이 자신의 정수리에 입술을 비벼야 할 이유가 되는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었다. 동백의 표정이 점차 사나워지는 것에 자오는 일부러 손끝으로 제 입술을 툭툭 두드렸다.

“영역표…이크!”

동백이 열 받으라고 한 말은 맞지만 이리 곧바로 대응할 줄은 몰랐다. 자오는 대번에 얼굴로 뻗어오는 주먹에 오히려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미 잦은 변형으로 몸이 만신창이라 도망쳐봤자 동백의 손바닥 안이었다. 차라리 남은 힘으로 적당히 제압을 시도하는 게 훨 나았다.

몸싸움하느라 엎치락뒤치락 풀밭을 구르던 두 사람의 몸이 다반을 쳐, 남은 찻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엎질러졌다. 젖은 풀 위로 자오의 몸이 떠밀렸다.

“윽! 서, 선인님. 등에 찻잔이 눌렸…헉!”

냉큼 배 위에 앉은 동백이 더 강하게 몸을 짓누르며 살벌하게 송곳니를 드러냈다.

“왜? 나도 영역표시로 네놈 허리 좀 아작내보자.”

“다른…윽, 방법으로…아작내 주신다면 더 고맙겠는데요.”

고통에 끙끙거리면서도 아직 기세를 잃지 않은 혀를 놀리며 자오가 슬쩍 입맛을 다셨다.

어찌하면 벗어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도통 틈이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정말 동백이 제 허리를 반대 방향으로 접어버릴 기세라 그는 백기를 들었다.

“항복, 항복입니다.”

자오의 항복에 동백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어디 전쟁터에서 감히 항복을 논한단 말인가.

“네놈이 전사(戰士)라면 끝까지 싸워.”

“안타깝게도 제가 지금 전사(戰死)하기 직전이라서요.”

하여튼, 저놈의 주둥이는!

“으읏!”

동백이 힘주어 짓누르자 자오의 등에 깔린 찻잔이 그의 척추를 정확히 꽉 짓눌렀다. 찌릿한 통증에 자오가 저도 모르게 꽉 다문 잇새로 고통 섞인 신음을 내며 목을 그르렁 울렸다. 살짝 젖어 붉어진 눈가와 찌푸린 얼굴, 가늘어진 눈, 그러면서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이….

“―!”

곧장 이어진 생각에 지레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킨 동백이 빽 소리쳤다.

“이상한 소리 내지 마!”

“아픈데 어찌 소리를 안 냅니까.”

비척비척 몸을 일으킨 자오가 등에 깔려있던 찻잔을 집으며 은근슬쩍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혹시, 어떤 생각이라도 하셨는지요?”

“설령 그렇다 해도 네 머릿속 음흉함의 발끝이라도 따라갈까.”

동백이 붉어진 뺨을 차가운 손으로 문질러 식히며 자오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뭐든 다 저놈 때문이다. 매번 천박하기 그지없는 말을 툭툭 해대니 자연스럽게 물든 게 분명했다.

“그렇긴 하죠.”

제 머릿속을 동백이 들여다보면 기겁할지도 모른다며 자오가 다소 방정맞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 바른생활 신선님의 문란한 생활이란 고작 방에 틀어박혀 아임튜브나 일주일 내내 보는 생활일 테니.

“난 이만 가야겠다.”

심통 난 얼굴을 한 동백이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왜 제가 선인님에게 입맞춤했는지는 더 듣지 않으셔도 됩니까?”

동백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입맞춤이 너무 고리타분한 표현이면 키스라고 할까요?”

빌어먹을 까마귀의 말이 분명 거짓말은 아니다. 거짓말은 아니긴 한데, 좀 이상하게 들리지 않나?

…아니, 좀 이상한 게 아니라 많이 이상하게 들리잖아!

“제가 선인님께 키스한 이유는….”

동백은 재빨리 자오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움, 우우움. 움움”

입이 막히고도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웅얼거리던 자오의 두 눈이 초승달을 그리며 휘었다.

“으악!”

핥았어?!

손바닥에 닿는 뜨끈하고 축축한 느낌에 기겁한 동백이 훌쩍 뒤로 물러섰다.

등 뒤에는 막 도착해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앞에는 자오로 막힌 동백이 한껏 날을 세운 고양이처럼 하악댔다.

“이 천박한 놈!”

“그러니까 왜 말하는 도중에 입을 막고 그러십니까.”

잘못은 오히려 동백이 했다는 듯 뻔뻔스럽게 대꾸하며 자오는 타액으로 젖은 입술을 손으로 훔쳤다.

“여튼, 제가 선인님께 키스한 이유는….”

“‘정수리에’라고 붙여라.”

차라리 단어를 좀 붙이면 괜찮아질까 했건만.

“제가 선인님을 뒤에서 끌어안고 정수리에 키스한 이유는 사실 별 건 없습니다.”

의견대로 사족이 붙긴 더 붙었는데 더 이상하게 들렸다.

동백은 뒤늦게 깨달았다. 뭘 붙이고 빼든 말하는 화자가 제 입맛대로 말하는 까마귀인 이상 더 나아질 일은 없다는 걸.

차라리 얼른 듣고 끝내버리는 게 나으리라.

그는 1층을 향해 한 층씩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의 계기판을 쳐다보며 이어질 말을 차분히 기다렸다.

“선인님을 열받게 하려고요.”

“…….”

“…….”

“…그게 끝?”

“뭐가 더 필요합니까?”

역시 카페에서 멈추지 말고 이놈을 반으로 갈랐어야….

“그거면 된….”

동백의 손이 저도 모르게 다시 검파로 향했다.

도망칠 공간이라곤 전혀 없는 좁은 공간. 그리고 약해진 몸뚱이.

상황을 빠르게 머릿속에 욱여넣은 자오가 랩을 하듯 빠르게 읊었다.

“주 실장이 선인님에게 가진 그릇된 환상을 깨트려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인간의 인지를 벗어나는 공포심을 심어주는 게 제일 나은 방법이었고요.”

“옳지. 앞으로도 그렇게 말하자?”

자오의 배배 꼬인 화법을 은근한 협박으로 제지한 동백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나지막이 감탄했다.

“근데 그 짧은 사이 용케 그런 생각을 다 했네.”

“본디 해답은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것보다 멀리서 지켜보는 게 잘 보이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해.”

머리는 정말 잘 돌아가는 놈이다. 그러니까 요수의 몸으로 이리 오래 살아남고 그리 강해진 거겠지.

적이지만 인정할 부분은 인정하는 바였다.

자오는 그저 강한 게 아니라 영리했다.

자신에게 가진 모든 것을 저울질하고 상대방을 관찰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지금도 그 능력으로 자신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관찰하고 있을 거고 말이다. 물론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지만.

잘그락.

동백의 움직임에 따라 검이 미약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베어야 해.

언젠가 필요가 다한 사냥개는 솥으로 들어가야 하는 법.

팔 하나의 거리를 두고 곁을 걷던 자오는 어느새 부쩍 가까워져 있었다.

“형 병원 다녀온다더니?”

“다녀왔다.”

“그리고 한아 형도 출장 갔다더니 일찍 돌아오셨네요?”

웬일인지 평소보다 일찍 돌아와 있던 호영이 고시원으로 돌아온 두 사람을 반겼다. 품엔 커다란 사탕 통을 안고 목을 쭉 뺀 호영은 누군가를 찾는 듯 계속 입구를 기웃거렸다.

“음…, 그….”

“왜?”

보다 못한 동백이 묻자, 호영이 자오의 눈치를 슬그머니 보며 입을 뗐다.

“한아 형의….”

누굴 찾는 것인지 알겠네.

자연스럽게 동백의 시선이 자오에게 닿았다.

“야, 까마귀. 네 아들 찾잖냐.”

작은 ‘자오’를 애타게 찾는 호영의 시선에 큰 ‘자오’는 대충 변명했다.

“집에 있습니다.”

집에 있긴 하지. 여길 집으로 부를 수만 있다면.

동백이 홀로 웃음을 삼켰다.

다 네 업보니라.

같잖은 수작질 한 번을 했으니 돌려받아야 하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자오의 대답에 시무룩해진 호영은 품에 안고 있던 사탕을 자오에게 건넸다.

“이거…. 그 애한테 주세요. 제가 사탕을 주기로 약속했거든요.”

“단 걸 별로 안 좋…윽!”

호영의 성의를 그대로 거절하려는 자오의 옆구리를 검집으로 쿡 찍은 동백이 두 눈을 부라렸다.

받아라?

말하지 않아도 생생히 전해지는 협박에 자오는 얌전히 사탕 통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모르네요…. 그 애 이름은 뭐예요?”

“…자오입니다.”

“자오…자오구나…. 진짜 형이랑 판박이처럼 닮았더라고요.”

그야 본인이니까 그렇지.

말할 수 없는 진실을 속으로 중얼거리던 동백은 순간 느껴진 익숙한 기척에 벌떡 일어섰다.

이건….

자오 또한 동백과 같은 것을 느꼈는지 살풋 가늘어진 눈으로 고시원 입구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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