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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47화 (48/61)

47화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부드러운 발소리와 반대되는 묵직한 존재감이 천천히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문 앞에서 멈춰 섰을 때.

동백이 환하게 웃으며 뛰어나가 상대를 반겼다.

“태상―!”

태상은 제 생각보다 격한 동백의 환영에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동백을 찾아올 때마다 매번 불청객 취급을 받던 그로선 몹시 기쁜 일이었다. 태상의 입매가 허물어졌다.

“자네가 날 이리 반기다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기라도 할 모양이구만.”

“서쪽에서 뜨라지.”

퉁명스러우면서도 반가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부드럽게 미소 짓던 태상은 자오와 시선이 마주치자 약간 삐뚜름하게 입술 끝을 올렸다.

“아직도 저치와 다니고 있던 건가.”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나는 잘 지냈으나 동백은 그러지 못했던 것 같아 마음이 쓰이는군.”

자오가 태상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상대는 일반 신선이 아닌 상제의 아들이다. 비록 그가 강한 요수라 해도 함부로 굴 상대가 아니었다.

“제 능력이 미천하여 선인님을 잘 모시지 못한 모양이니, 앞으로 분발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오가 얌전히 당하고만 있느냐?

그것 또한 아니었다.

정중한 말투와 웃는 낯 속에 뱀의 혀를 숨긴 까마귀가 거침없이 응수했다. 가만두면 끝도 없이 비비 꼬인 말투로 싸워댈 게 분명한 모습에 동백이 적당히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이 꽈배기 놈들아, 그만해.”

자오가 짐짓 억울하단 표정을 지었으나 동백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동백은 그런 자오를 지저분한 짐승을 내쫓듯 태상에게서 멀찍이 밀어내기까지 했다.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건 알았다. 그래도 묘하게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까마귀는 저조해진 기분을 숨기기 위해 더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동백이 자주 앉는 자리의 앞자리를 차지한 태상의 뒤통수를 자오는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그에 호영이 살그머니 다가와 소곤거렸다.

“저분 형이랑 진짜 친한가 보다. 동백 형이 저렇게 웃는 건 첨 봐요.”

동백의 얼굴엔 그 웃음을 보기 어려워 차라리 울리는 게 더 쉬울 거라 어겼던 환한 미소가 한껏 걸려 있었다.

자오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무엇인지 모를 짜증이 자꾸만 샘솟았다.

이성적으로는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묘한 짜증을 주체하기가 힘들어 자오는 차라리 자리를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한아 형! 어디 가요?”

호영이 부르는 소리에도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아주 오랜만에 느낀 불쾌한 감정을 주체하기 바빴으므로.

동백은 고시원에서 이용하는 공용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우에게 마실 물을 제외하고 내어줄 게 없다는 사실에 그는 민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줄 순 없는지라 냉수 한 잔을 그의 앞에 놓아준 동백이 흠흠,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

“미안, 내가 음식을 잘 먹지 않다 보니 딱히 줄 게 없네.”

“괜찮네. 갑자기 찾아온 내 탓이지.”

차를 마시듯 물로 입술을 축인 태상은 느리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추하지?”

“…….”

상대가 누추하냐 물었으니 당연히 예의를 차려 아니라고 답해주어야 하거늘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는 쓰게 웃었다.

여러 사람의 흔적이 보이는 공간은 낡고 비루했다. 당장 선경에만 올라와도 성대한 궁궐에 좋은 비단옷을 차려입고 유유자적 구름 위를 노닐 수 있는 동백이 이런 곳에서 지낸다는 게 태상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닐세.”

애써 떨어지지 않는 입을 놀려 겨우 답한 태상은 몇 번이나 뭔가를 말할 듯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그만두었다.

그의 친우는 기꺼이 가장 낮은 곳까지 몸을 숙일 이였다. 자신의 모습이 누추하여도 세상에 부끄러울 짓을 하지 않으면 되었다 하는데, 지내는 곳이 누추하다 하여 불만을 품을 존재는 아니었다.

대신 태상은 단 한 가지, 신경에 거슬렸던 존재를 조심스레 입에 담았다.

“자오와 부쩍 가까워 보이던데….”

“그 망할 자식하고 내가 가까워 보인다고?”

물론, 동백은 태상의 말에 대번에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어디가?!”

당최 어떠한 이유로 자오와 친해 보인다는 말을 자꾸만 듣는 것인지 알아야겠다는 듯 동백은 두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태상은 숫제 활활 타는 숯을 콕 박아넣은 것 같은 적갈색 눈동자에 곤란한 듯 짧게 목을 울렸다.

“내가 아는 동백이라면 요수가 그리 가까이 서 있는데 가만둘 성격은 아니지 않나.”

“그거 하나?”

동백의 채근 아닌 채근에 태상이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유 하나를 더 말했다.

“분위기가 그래 보이기도 했고.”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그 특유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동백은 태상을 환히 반겼으나 자오는 불청객을 맞이하듯 굴었고. 이번 생에서는 태상과 처음 마주한 인간은 갑작스러운 손님을 맞이한 듯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그때 태상은 자신이 갑자기 그들 사이에 끼어든 불청객이라도 된 기분을 느꼈다. 물잔을 만지작거리는 태상에게 동백은 뚱한 얼굴로 투덜댔다.

“그놈이 혼자 치근덕거리는 거야. 게다가….”

주둥이가 너무 자유분방하여 자신을 희롱한다고까지 말하려던 동백이 순간 뇌에 힘을 꽉 주고 말을 멈췄다. 여기서 그런 말을 꺼내봤자 하등 좋을 게 없었다.

태상은 천성이 느긋하고 태평한 구석이 있는 친우이지만 한 번 화가 나면 불같은 성정을 지녔다. 특히, 동백 자신을 아끼는지라 자오의 방자한 언사를 알면 쫓아가 그놈의 목을 친히 잘라버리리라.

아직 자오와 한 약속도 남은 상태고 왜 그놈이 ‘동백’을 잃은 마을에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었기에 동백은 말을 아꼈다.

“게다가?”

“성격이 거지 같다고.”

“자오의 성미야 유명하지 않은가.”

그거에 더해 아주, 아주아주 문란하고 음란한 놈이라는 평가도 덧붙여야 한다고. 동백은 속으로 열변을 토했다.

얼굴이 살짝 붉어진 채 입술을 삐죽 내밀고 꿍얼거리는 동백을 지켜보던 태상은 물로 입술을 축이며 말했다.

“내 검은 언제나 예리하게 벼려져 있으니 말만 하게.”

동백이 원한다면 친히 까마귀를 죽여주겠다는 제안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한 그는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한껏 머금었다.

“됐어, 죽여도 내가 직접 죽일 거야.”

그러려고 그놈이 잘라낸 날개가 어느 쪽인지 태상에게 묻지 않았나.

“자네는 정이 많으니 중요할 때 검을 휘두르지 못할까 걱정이네.”

“…….”

“…내가 실언을 한 모양이야.”

태상은 가늘어진 동백의 눈초리에 내뱉은 말을 가벼운 실수라 치부했다. 하지만 동백도 태상도 그가 했던 말이 단순한 실수가 아님을 알았다.

진심인 것이다.

훗날 동백이 자오를 죽이지 못할까 봐.

“됐어, 까마귀 이야기는 이쯤 하고.”

저조해진 기분을 무표정 아래로 가라앉힌 동백은 약간은 난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오랜 친우를 향해 물었다.

“알아냈어?”

“…선동꾼 말이지.”

태상의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조사 자체가 선경의 치부를 들추는 일이다. 조금도 유쾌할 수 없는 일이기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사실 알아내진 못했네. 알다시피 선경의 시간은 빠르게 흐르니 위에선 고작 몇 시진이 흘렀을 뿐이니까.”

그럼 여긴 왜 왔냐고 노골적으로 묻는 시선에 태상은 볼을 긁적였다.

“자네, 창귀 기억하나?”

“……응? 뭔귀?”

“창귀.”

동백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지금 시대에 그 이름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표정인지라 태상 또한 머쓱하게 웃었다.

“지금이 산에 호랑이가 사는 시대도 아니고 웬 창귀?”

창귀는 호랑이가 인간을 잡아먹고 그 호랑이에 들러붙은 귀신을 부르는 명칭이었다. 그것들은 호랑이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가족부터 친지, 이웃까지 가리지 않고 꿰어내는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

지금이야 호랑이는 동물원에 가야만 볼 수 있고 인간을 잡아먹지도 않으니 창귀는 사라진 지 오래라고 생각했는데….

“동물원에서 호랑이가 탈출했단 뉴스는 못 봤는데?”

“고작 그런 이야기였으면 내가 예까지 올 필요도 없었지.”

“내가 부탁한 일 대신 다른 일거리를 들고 왔다 그거구나?”

“자네와 관련이 있는 놈이니 너무 투덜거리진 말게나.”

“나랑?”

태상의 말에 동백은 곰곰이 기억을 되짚었다.

자신과 창귀가 얽힐 일이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호랑이가 길거리에 어슬렁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

…아니, 하나 있구나.

동백의 두 눈이 꾹 감겼다.

갈기갈기 찢긴 살점과 주둥이를 흥건하게 적셨던 피의 비린내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생생하게 동백의 코끝에 맴돌았다.

꽃처럼 붉어 동백이라 불렀거늘 그토록 붉게 져버린 아이는 아직도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까. 그리하여 단 한 번도 모습을 비추지 않은 거라면 언제가 되어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도화의 시간은 기약 없이 흐르고 흘러 지금의 동백이 되었다.

그는 다시 눈을 뜨고 태상과 시선을 마주했다.

붉은빛이 짙게 섞인 적갈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 애가 호랑이에게 죽어 창귀라도 되었다는 소리야?”

“정확하진 않네. 당시 떠도는 혼백이 뭉쳐 요괴가 되는 일이 많았으니….”

그의 작은 ‘동백’은 요수가 된 호랑이에게 죽었으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 호랑이는 동백이 죽여버렸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범에게 묶였던 혼백은 다시 풀려나는 게 맞는 일이었다.

그게 맞는 일이긴 하지만….

그 시대는 혼란하기 그지없었다. 세상은 죽음으로 가득했고 절망과 슬픔, 고통만이 가득 들어차 비통하고 원통한 혼백들은 지상을 떠돌며 서러움을 토해냈다.

지저분한 욕심으로 시작된 전쟁은 모든 것의 도화선이 되어 불을 붙였다. 전쟁이 없었다면 그 흉년이 그리 가혹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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