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백-48화 (49/61)

48화

요수들이 그리 날뛰며 사람들을 해치지도 않았을 것이고 자신은 ‘동백’을 만나지도 못한 채 그저 남동생과 유복한 삶을 누렸을 터였다.

그리 살다 죽어버려 이 시대에 이르러선 평범한 삶을 누리고 있었을 거다.

그저 가정만으로 이루어진 생각은 생각할수록 허무하기에 동백은 금방 생각을 지워냈다.

대신 그는 모든 가능성을 떠올렸다.

이 기나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 ‘동백’을 다시 만나지 못한 이유를.

첫 번째는 ‘동백’이 정말 아직도 그를 원망하기에 이어진 인연이 닿지 않는 것.

차라리 이랬다면 좋았겠지만, 태상의 말에 이보다 비관적인 생각이 뒤를 이었다.

두 번째는 ‘동백’의 혼백이 제대로 된 길을 찾지 못하고 다른 혼백과 한대 엉켜 태상이 말한 ‘창귀’가 되어버린 경우.

세 번째는….

정말 떠올리고 싶지 않고 아니기를 바랐던 가정 중 하나였다.

동백의 고개가 저도 모르게 좁은 복도를 향했다.

저 복도 끝엔 뻔뻔한 까마귀가 이 좁은 곳에 튼 둥지가 있었다.

‘창귀’의 경우가 있다면, ‘자오’의 경우가 있지 않겠는가.

태상은 자오가 ‘동백’을 잃어버린 마을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몰랐다.

오직 자신과 자오만이 공유하고 있는 그들의 관계성.

“…….”

“동백?”

두 번째 추측과 세 번째 추측 중 무엇이 더 끔찍한지 동백은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지금은 그 가능성을 하나하나 줄여나가는 수밖에.

“…그 창귀란 놈. 내가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그리고.

“하나 더 부탁할 게 있는데.”

혼백을 잃어버린 안준우.

그의 사라진 혼백의 행방을 찾아야 했다.

태상을 보낸 동백은 바로 떠날 채비를 했다.

창귀의 소재가 다른 도시였기에 간단하게 짐을 꾸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봤자 돈이 든 전낭과 검, 단정하게 차려입을 정장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검의 상태도 꼼꼼히 살핀 동백은 고시원을 나서려다가 호영의 방 앞에서 주춤 걸음을 멈췄다.

이번에도 말없이 홀연히 사라지면 단순히 서운해하는 거로 끝나진 않을 것 같았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가벼운 소리에 방 안에서 꼼질꼼질 움직이던 기척이 후다닥 달려와 방문을 열었다.

“호영아.”

정장을 단정히 차려입은 동백의 모습에 호영이 뺨을 부풀렸다. 동백은 어디론가 훌쩍 떠날 때마다 꼭 정장을 입었다. 그 탓에 이젠 굳이 말하지 않아도 호영은 어렴풋이 짐작했다.

“어딜 좀 다녀온다고?”

약간은 퉁명스러우면서도 은근한 호기심이 담긴 목소리에 동백은 옅게 미소 지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창귀만 확인하고 처리하면 되니 길어야….

“한 일주일 정도?”

“일주일…? 어디 가는데?”

“장산에.”

아임튜브에서 보았던 장산범이 나온다던 장산. 그리고 창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 인간을 홀려 잡아먹는다는 장산범. 처음 들었을 땐 또 무슨 허무맹랑한 존재를 만들어 낸 건지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장산에 창귀가 있다는 걸 알고 보니 그럴듯하게 들렸다.

게다가 그 모양도 마치 범을 닮았다고 하니 확실했다.

들러붙을 범이 없어 스스로 범의 모습을 한 창귀를 사람들이 장산범이라 부르는 거라고.

“장산? 이 겨울에 수영이라도 하러 가는 건 아닐 테고.”

그러고 보니 장산은 바닷가를 낀 도시였지.

동백이 태어나고 자란 옛 오호는 바다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엄청난 양의 짠 물이 존재하고 그곳에서도 물고기가 산다는 것을 풍문으로 듣고 신기하다 여겼다.

가끔 바닷바람에 바짝 말린 생선을 나라를 오가는 보부상이 팔곤 했는데, 값이 몹시 비싸 일반 평민들은 감히 사 먹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지금이야 마음만 먹는다면 쉽게 갈 수 있는데도 동백에게 바다란 아직도 낯선 장소 중 하나였다.

“나중에 여름에 같이 놀러 가자.”

호영의 제안에 동백이 잠시 고민했다.

짠물에 스스로 몸을 담그고 절이는 행위가 당최 무엇이 재미있는진 몰라도 호영이 즐거워 보이니 됐다.

“그러자.”

생각보다 흔쾌히 떨어진 허락에 호영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진짜지?”

“너야말로 바빠졌다고 못 간다는 소리나 하지 마라.”

지금은 비록 뮤지컬의 단역이지만, 호영이 성공할 거라는 확신을 동백은 가지고 있었다.

당연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가호를 받는 녀석이니.

“흐흐, 진짜 그런 소리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

“할 거야.”

“형이 말하면 정말 그렇게 될 것 같다니까.”

기분 좋게 끌려 올라간 입꼬리엔 희미한 쑥스러움과 동백을 향한 고마움이 묻어났다.

그의 부모조차도 호영이 정말 제대로 된 배우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꿈을 간직한 청년은 홀로 집을 나와 난생처음으로 방파제가 없는 파도를 맞이했다. 그를 휩쓰는 물은 너무도 거칠고 사나워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온실 속에서 곱게 자랐던 도련님은 세상살이가 그리 녹록지 않다는 걸 뒤늦게 배웠다. 뭐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온갖 단역을 전전하며 오디션을 보는데도 도무지 나아가는 기분이 들지 않을 때 동백을 만났다.

처음엔 정말 이상하면서 신기한 사람이라 여겼다.

허리에 검을 차고 다니는데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모습이 신기해서 눈길이 갔고 다음엔 홀로 동떨어져 세상과 유리된 생활을 이어가는 동백에게 관심이 일었다.

그가 잘 먹지 않고 다닌다는 걸 알고 먹을 걸 챙기기 시작했다.

때로 정장을 입고 며칠이고 방을 비운 후엔 이상하게 외로워 보여 더 살갑게 굴었다.

그런 시간을 보내고 나니 그저 동백이 좋아졌다.

동백은 툴툴거리면서도 다정했고 진짜 가족조차 해주지 않았던 전폭적인 믿음을 돌려주었다. 어쩌면 스스로 의구심에 빠트렸던 그 꿈을 꼭 이룰 수 있을 거라고.

“더 늦어질 것 같으면 꼭 연락 줘야 해.”

마지막 순간까지 당부를 잊지 않은 호영의 배웅을 받은 동백이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게.”

일부러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슬쩍 흔들자 호영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녀와! 누가 사탕 준다고 따라가지 말고!”

다소 장난 섞인 인사에 동백 또한 장난스럽게 답했다.

“오냐.”

마음 놓고 돌아올 곳이 있다는 건 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좁은 계단을 유독 가벼운 걸음으로 내려온 동백의 발치로 호범이 꼬리를 바짝 세우고 쪼르르 달려왔다.

“웨애앵~”

어쩐지 억울하게 들리는 울음소리였다.

“호범아.”

제 이름을 부르는 점잖은 목소리에 호범이 냐앙냐앙 시끄럽고 서럽게 울어댔다.

“이미 네 주인은 돌아간 지 오래인데 어찌 지금에야 왔느냐?”

태상이 이곳에 온 걸 호범이 모를 수가 없는데 무슨 일이 있어 한발 뒤늦게 온 건지. 의아했던 의문은 곧이어 풀렸다.

호범의 그림자 속에서 손바닥만큼 작아진 어둑서니가 작은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가, 가셨어요?”

이 녀석 때문인가 보구나.

어둑서니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커다란 눈을 데룩데룩 굴렸다. 혹시라도 근처에 태상이 있을까 잔뜩 긴장하고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호범이는 왜 붙잡고 있어. 주인 얼굴도 못 보게.”

“호, 호, 혼자 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요!”

하이고.

“그렇게 겁이 많은 게 여긴 어느 깡으로 기어들어 왔던 거냐.”

어처구니가 없어진 동백이 헛웃음을 짓자 어둑서니는 그림자 속에 얼굴을 좀 더 파묻으며 웅얼거렸다.

“그땐 제가 어떻게 됐던 게 틀림없어요.”

동백은 땅에 박힌 것처럼 보이는 동그란 머리통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겁을 먹어서 콩알만 해진 게 퍽 귀여웠다.

“이젠 네 구역이기도 하니 잘 지키고 있어.”

“어디 가세요?”

“응.”

‘어디로…?’라고 쓰인 어둑서니의 눈빛에도 동백은 굳이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다. 작고 귀엽긴 해도 어둑서니의 본질은 요괴였다.

적당한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다.

“사고 치지 말고 기어들어 오는 놈들만 적당히 상대해.”

“…네에.”

동백의 목소리가 냉랭해지자 어둑서니의 목소리가 축 처졌다. 잔뜩 주눅 든 모습이 가엽게도 보여 동백이 짧게 고심했다.

…그래도 이 녀석이 있어서 부담 없이 자리를 비우는 건데 좀 너무했나?

나중은 나중이니까….

“올 때 맛있는 걸 사다 주마.”

“―!”

동백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 어둑서니의 눈이 둥그레졌다.

“…진, 짜요?”

“싫음 말구.”

“아뇨! 아뇨아뇨! 좋아요!”

이백 살을 먹어도 요괴 중에서는 어린애라. 어둑서니가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기뻐했다.

“약속하신 거예요?”

“애옹!”

호범도 동백의 발치를 맴돌며 꼬리를 다리에 휘감았다.

그 모습에 동백은 마음속에서 든든함이 소폭 감소하는 것을 느꼈다.

이런 어린애들에게 제 영역을 맡겨도 괜찮은 건가.

호범의 몸에 매달린 어둑서니가 꺄르르, 맑은 웃음을 토해냈다.

“그렇게 좋냐.”

“그럼요!”

어린애다 어린애.

동백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태상의 말대로 동백은 정이 많았다. 그 탓에 검에 덕지덕지 들러붙은 정은 동백의 마음을 망설이게 만들 터다. 이래서야 나중에 죽일 수나 있으려나.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분은 어디 계시나요?”

“그분?”

“발톱이 무서우신 분이요.”

아, 자오.

“그 녀석은 왜?”

“항시 같이 다니시다 보이지 않아서요.”

자오가 귀찮을 정도로 뒤를 따라다니는 녀석은 맞았다.

하지만, 오히려 지금은 없는 게 더 나았다. 세 번째 가설을 떠올리면 머리만 복잡해지니까.

내 ‘동백’이 그런 녀석이 되었을 리가 없다.

파렴치하고, 음흉하고, 문란하기까지 한!

“어디 처박혀 있겠지.”

멀쩡하게 두 다리 달린 놈이 어디라고 못 갈까.

동백의 기분이 순식간에 저조해진 걸 알아차린 어둑서니가 슬그머니 호범의 몸 아래로 숨었다.

“여튼, 다녀올 테니 잘 지키고 있어라.”

“네에.”

“애옹!”

어둑서니와 호범의 배웅을 받은 동백은 꽤 수월한 출발을 할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