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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50화 (51/61)

50화

절그럭.

쇠가 맞물리며 나는 작은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아니, 세상의 모든 소리가 너무도 크게 들렸다.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마저도.

긴장으로 굳은 어깨 위로 마치 발톱을 닮은 손이 넘어와 김찬식의 핸드폰을 가볍게 쥐었다.

으드드드득!

종이를 구기듯 너무도 쉽게 구겨진 작은 기계가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귀찮게도.”

짐승이 말을 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남자의 목소리는 매력적이면서도 오싹했다.

도망칠 수 없는 맹수의 앞에 선 듯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벌벌 떨기만 하던 김찬식의 귓가에 조금은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날카롭게 박혔다.

“죽, 죽어! 죽어버려!”

굉음을 내며 땅에 처박힌 뭔가가 푹 파인 구덩이에서 훌쩍 뛰어올랐다. 핏기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흰 얼굴이 어둠 속에서 둥실 떠올랐다.

구덩이에서 기어 나온 ‘그것’은 네발로 땅을 짚었다.

흰 터럭이 바닥에 닿고 날카로운 발톱이 단단한 아스팔트를 긁으며 기이한 소리를 냈다. 김찬식은 ‘그것’을 처음 보았으나 무엇이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자, 장산….”

그런 김찬식의 입을 뒤에 선 남자가 틀어막았다. 피부에 닿은 차가운 가죽과 쇠의 느낌이 오싹했다. 자신도 남자 치곤 작은 키가 아니건만, 그의 뒤에 선 남자는 적어도 키가 190은 넘어 보였다.

“전 당신이 죽어도 상관없지만, 제가 아끼는 분은 그렇지 않으니 마지막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등 뒤의 남자는 눈앞에 어슬렁거리며 선 ‘그것’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게 속삭였다.

“아무런 말도 하지 마세요.”

그 말을 끝으로 김찬식의 입을 틀어막은 손이 멀어졌다. 김찬식은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도망치고 싶은데 이상하게 발이 땅에 들러붙은 것 같이 움직이질 않았다.

“끄, 윽―!”

김찬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것’의 눈이 한 바퀴를 크게 굴렀다. 양옆으로 쭉 찢어진 주둥이 사이로 들쑥날쑥한 이빨이 드러났다.

“찬식아―. 나야.”

“―!”

“나야, 찬식아. 찬식아. 찬식아. 찬식아. 찬식아. 찬식아. 찬식아. 찬식아. 찬식아. 찬식아. 찬식아. 찬식아. 찬식아. 찬식아. 찬식아. 찬식아. 찬식아. 찬식아. 찬식아. 찬식아. 찬식아.”

가장 절친한 친구의 목소리로 끝없이 그의 이름을 부르던 ‘그것’은 김찬식이 대답하지 않자 다른 목소리를 흉내 냈다.

“김찬식.”

여리면서도 애정이 묻어나는 목소리.

“찬식아, 엄마가 부르는데 대답 안 하니?”

히죽.

‘그것’의 입꼬리가 하늘로 솟았다.

‘아, 저것은….’

극한의 공포를 이기지 못해 정신을 놓은 김찬식의 몸이 기우뚱 기울어졌다.

그가 찾으러 왔던 장산범이 그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사냥감을 도둑맞았던 사냥꾼은 웃으며 코 밑을 쓱 문질렀다. 너무 어이가 없어 잠시 넋을 놓았다가 허둥지둥 뒤따라왔더니 아주 재미있는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하하, 개판이네.

팔다리를 대자로 뻗고 기절해 있는 얼굴이 익숙한 남자 하나.

그리고 온갖 허세를 부리며 멀쩡한 척하는 요수 하나.

인간을 발견하고 폭주하는 이상 망측한 요괴 하나.

그리고 아주 참한 신선까지.

참, 이리 일부러 모아두기도 힘을 텐데.

아주 각양각색으로도 모였구나.

동백은 일단 기절한 남자에게 다가갔다. 어째 얼굴이 익숙하다 싶더니 그가 자주 보던 동영상에 나오던 남자였다.

이름이 김~촨식이던가?

들어도 들어도 참으로 이상한 이름이었다. 김~촨식이라니.

“촨~식아.”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아 뺨을 툭툭 건드려봐도 김찬식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게다가 어찌나 겁을 집어먹었는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대로 두면 한동안은 악몽을 꿀 테니.

“쯧.”

가볍게 혀를 찬 동백은 선기를 얕게 일으켜 김찬식에게 불어넣었다. 아주 미약한 힘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에도 새파랗기만 하던 얼굴엔 한결 혈색이 돌았다.

어느 정도 조치를 한 동백은 그제야 자신의 앞을 마치 보호하듯 가로막고 선 넓은 등을 검집 끝으로 쿡 찔렀다.

“야, 너 뭐냐.”

어처구니가 없어도 적당히 없어야지. 뜬금없이 등장해 자신의 사냥감을 채가 놓고 다친 꼴을 보니 헛웃음이 절로 났다.

조금 전 자오는 그동안 동백이 파악한 자오답지 않게 무모하고 저돌적이었다. 게다가 그는 지금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기까지 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몸을 바꾸는 건 꽤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제 입으로 떠들기까지 하지 않았나.

그런 일을 짧은 시간에 두 번이나 한 놈이 정상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대책 없이 꼬랑지에 불붙은 멧돼지처럼 ‘저것’을 채간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동백의 시선이 자오의 옆구리에 짧게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야.”

자오의 등을 가볍게 찔렀던 검집이 이번엔 옆구리의 깊은 상처를 콱 후벼팠다. 이래도 무시하나 싶어 한 행동이건만, 자오의 시선은 여전히 새하얀 털을 가진 요괴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앞으로 몸을 숙였던 흰 털의 요괴는 의아한 듯 목을 울렸다.

“그, 르…륵?”

그것은 언어가 되지 못한 짐승의 울음소리였다. 요괴는 저 멀리 쓰러진 김찬식을 바라보았다.

“그륵? 차, 찬…식이.”

그다음으론, 자오의 뒤에 반절이 가려진 동백을 바라보았다.

“아…아아, 저씨….”

마지막으로 흰 털의 요괴는 자신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는 이상한 요수를 바라보았다.

“그르르, 그륵?”

거대한 머리가 천천히 기울어졌다. 흰자가 보이지 않는 커다란 눈이 이리저리 굴렀다. 들썩거리는 주둥이가 힘겹게 무언가를 내뱉으려 했지만 나오는 것은 기괴한 울음소리였다.

사람들에게 장산범이라 이름 붙여진 요괴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남자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땅에 끌리던 긴 털이 너울거리며 흔들렸다.

우우우우우-!

주변을 집어삼키는 짙은 사기에 휘말린 바람이 비통하게 우짖었다.

서서히 공간을 잠식하는 사기에 동백은 뒤에 버려둔 김찬식을 떠올리고 맞서듯 선기를 일으켰다.

요괴와 요수.

두 삿된 것이 내뿜는 사기가 마치 폭풍같이 주변을 휘감았다.

자오를 물어뜯기 위해 한껏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장산범을 향해 까마귀는 느리게 입술 끝을 끌어올렸다. 벌어진 입술 틈새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슬쩍 드러났다가 점잖은 입술 아래로 다시 모습을 숨겼다.

입안에 남은 비릿한 맛을 지우듯 입맛을 다신 자오는 사기를 더 내뿜는 대신 가려져 있던 흐릿한 존재감을 서서히 끌어올렸다. 이대로 놈을 쫓아버릴 생각이었다.

동백은 자오의 의도를 알았으나 딱히 말리진 않았다. 기절한 나약한 인간과 멀쩡한 척 허세를 부리는 까마귀 하나를 데리고 저걸 때려잡기엔 상황이 너무 불리했다.

알아서 잘 마무리하겠거니 여기며 김찬식을 추스르려던 동백은 순간 압도적으로 불어난 거대한 위압감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동백의 눈동자에 하늘을 뒤덮은 검은 그림자가 비쳤다.

그것은 거대한 날개였다.

다시는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지 못하는 새는 거목처럼 단단히 두 발을 딛고 땅 위에서 그 아름다움과 위압을 뽐내며 날개를 활짝 펼쳤다.

스스로 날개를 자른 까마귀의 이야기를 들은 이들은 앞다퉈 그를 향해 어리석다 하였다. 목숨을 저울질하며 언제 죽을지 가늠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그들은 모두 죽어 스러지고 남은 것은 자오뿐이었다.

오랜 시간 먹이사슬의 정점을 차지한 요수는 마음껏 힘을 뽐냈다. 감히 내게 덤비겠느냐고 흰 털의 요괴에게 제 위세를 보여주며 으스댔다.

기세 좋게 으르렁거리던 장산범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커다란 눈이 이리저리 구르며 도망갈 길을 찾았다.

“그르!”

짧은 울음소리와 함께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던 흰 털의 요괴가 뒤돌아 산으로 뛰어들었을 때.

“하아….”

드넓은 하늘을 가릴 듯 활짝 펼쳐졌던 날개가 축 늘어졌다.

“허세는 다 부렸냐.”

“아직요.”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자오가 더 반듯하게 허리를 펴며 턱 끝을 슬쩍 들었다. 그런 자오를 바라보며 동백이 짧게 혀를 찼다.

곧 죽어도 허세나 부릴 놈 같으니.

자오의 발치에 핏물이 둥글게 고였다. 자신에게는 허벅지 조금 베였다고 징징거린 놈이 옆구리 절반이 뜯기고도 멀쩡한 척 구는 모습이라니. 괜스레 심기가 불편했다.

“야.”

짧은 부름에 까마귀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내가 지금 묻고 싶은 건 많은데….”

동백의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담긴 가늘어진 눈이 옆구리에 닿았다. 그리고 자연스레 흙바닥 위에서 이리저리 쓸려 금세 꾀죄죄해진 날개에도.

“일단 벗어.”

“―!”

자비 없는 손길이 자오를 넘어트리고 옷을 파헤쳤다. 순식간에 단단히 매인 고름이 풀리고 겉섶이 활짝 열렸다. 그저 상처를 봐야 한다는 생각에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이던 동백은 훅, 목덜미로 밀려든 뜨거운 숨결에 움찔 손을 멈췄다.

두 사람을 비추던 달빛마저 구름 속으로 숨은 어둠 속에서도 반질반질 빛나는 눈을 한 자오가 묘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구름이 마침내 탐욕스럽게 집어삼켰던 달을 토해냈을 때.

자오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까만 머리칼이 마치 커튼같이 뺨을 타고 미끄러졌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내뱉어진 숨결이 가까워질수록 습하게 뒤엉켰다.

힘을 잃고 바닥으로 축 늘어졌던 검은 날개가 들썩이며 다시금 펼쳐졌다. 위풍당당하던 기세를 버리고 동백을 세상으로부터 숨기듯 날개 끝이 둥글게 휘어졌다. 머리 위로 드리운 그림자와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 가까워진 자오의 얼굴에 두 눈을 둥글게 떴던 동백의 눈초리가 점점 사나워졌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자오의 옆구리를 맴돌던 손이 인정사정없이 상처를 후벼팠다. 제법 뜨끔할 고통에도 자오의 입술은 길게 호선을 그렸다.

“한 번은 넘어와 주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는 법이지.”

어쩔 수 없이 곁을 내주니 부쩍 가까워지고 가까워진 만큼 선을 넘으려 힐긋대는 자오에게 이미 말려들었다.

죽여버리겠다고 그리 다짐을 했건만, 어쩐지 죽이지 못할 것 같단 예감이 짙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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