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동백의 낯이 잠시 어두워졌다.
그러면서도 손은 자오의 옷자락을 찢어 벌어진 상처를 감싸는 걸 소홀히 하지 않았다.
“됐다.”
“감사합니다.”
여전히 녹슬지 않은 실력에 뿌듯해하던 동백이 자오의 감사에 못마땅하게 입술을 삐죽였다.
누가 저 좋으라고 도와준 줄 아나.
칠칠찮게 피를 흘리고 다니면 더 귀찮아지니 도와준 것뿐이다.
얼굴 위로 퉁명스러움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옷을 추스르며 일어나는 자오를 노려보던 동백은 뒤늦게 아무렇게나 버려둔 김찬식을 발견했다.
김찬식은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냥 두면 딱 얼어 죽기 좋아 보인다. 그럼 내일 아침엔 길바닥에서 자다가 얼어 죽은 비운의 아임튜버에 대한 이야기가 뉴스에 쫙 깔리리라.
그러나 이대로 살리기엔 너무 많은 것을 봐 버렸다.
자신은 괜찮아도 저 까마귀는 아니었다. 저놈은 유명해도 너무 유명했다. 호기심에 가볍게 ‘한아’만 검색해 본 것뿐인데 우르르 쏟아져 나오던 사진을 떠올린 동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얼굴은 똑같고 고작 다른 것이라곤 머리 길이가 전부였다. 분명 사람들은 기억을 되짚다 녀석의 얼굴을 떠올리고 동영상이나 댓글에서 떠들어댈 게 분명했다.
기억, 기억이라….
동백이 알고 있는 술법의 범위에서 생각해 봐도 딱히 한 기억만 깔끔하게 지워주는 술법은 없었다. 고민하던 동백은 바지런히 뒷수습 중인 자오를 손가락으로 까닥여 불렀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혹시, 아는 술법 중에 기억을 지우는 술법 있어?”
“기억이라…. 당장 몇 개 떠오르긴 합니다.”
술법이야 숨 쉬듯 쓸 수 있는 것이라 자오는 빠르게 몇 개를 머릿속으로 추려냈다.
“그럼, 그중에 특정 기억만 지울 수 있는 건?”
“…….”
까만 눈이 이리저리 굴렀다.
“없어?”
“…….”
“없구나.”
자오의 얼굴을 읽어낸 동백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지우는 건 아니고 기억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술법은 있습니다만.”
“기억을 이리저리 뒤섞어서?”
“그렇죠.”
그런 술법이 있다는 건 동백도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그걸 쓰면….
“그냥 폐인을 만들자는 거냐?”
“뭐 어떻습니까. 고작 인간 하나인데.”
“이래서 요수놈이란.”
그냥 상종을 말아야 하는데.
눈에 훤히 드러나는 동백의 속마음에 자오가 잔웃음을 터트렸다. 방금까지 상종 못 할 놈의 옆구리에 진지한 얼굴로 찢은 천을 둘둘 감던 신선이 할 말은 아니었다.
영 쓸모없는 자오를 두고 동백은 다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입단속을 시켜도….
동백의 시선이 김찬식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관상을 보아하니 입이 가볍고 천성이 떠들기를 좋아하는 상이라 얼마 못 가 동영상을 만들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겠고 안 믿는 사람도 있겠지만, 일단 말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저 망할 까마귀 놈에게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니….
잠깐, 내가 왜 저놈을 걱정해?
지금 상황은 죄다 저 망할 놈이 만든 상황 아니던가.
갑자기 끼어든 것도 저놈.
칠칠찮게 다친 것도 저놈.
이 사람에게 모습을 보인 것도 저놈인데 왜 자신이 더 걱정하고 있는지!
그냥 적당히 기억만 흐려놓고 경찰서 앞에 던져놓자.
완벽하게 하나의 기억을 지우는 건 없어도 다른 술법을 응용하면 ‘꿈이라도 꾼 건가.’ 싶을 정도로 흐리게 만들 순 있었다.
대신 부작용으로 기억력이 좀 떨어지기는 하지만….
동백이 자오를 힐끔 쳐다봤다.
저놈의 무자비한 손속에 걸려 폐인이 되는 것보단 나을 거다.
김찬식의 앞에 쪼그려 앉은 동백은 술법을 시행하기 위한 작은 진을 손가락으로 쓱쓱 그려나갔다.
은은한 황금빛이 허공을 수놓았다. 기운은 음에서 양으로, 다시 양에서 음으로 하나의 순환을 이루니 술법을 이루는 기운 또한 그러했다. 동백의 선기를 가득 품은 술법이 그 균형을 이루기 위해 주변의 사기를 끌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술법은 온전해져서는 안 된다. 온전해지면 모든 기억이 뒤죽박죽 섞여버릴 테니까.
적당히.
아니면 어중간하게 발만 담갔다가 빼는 것처럼.
적절한 때를 기다리던 동백이 빠르게 술법을 이루던 선기를 흩어버렸다. 다 완성되지 못한 불완전한 술법이 축 늘어진 김찬식에게 깃들며 본래의 목적을 다 이루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기억을 흩트렸다.
“다 하셨습니까?”
동백이 술법 하나를 쓰는 동안, 온갖 술법을 이용해 주변을 깨끗이 정리한 자오가 김찬식을 살피곤 ‘썩 나쁘진 않군요.’라는 평을 내렸다.
재수 없는 놈.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주고 싶은 욕구를 꾹 내리누른 동백이 김찬식을 짐짝처럼 들어 자오에게 가볍게 던졌다.
“이놈 경찰서 앞에 던져두고 와.”
그리고 이야기 좀 하자.
떠올리기도 싫은 세 번째 가설을 떠올린 동백이 입술을 꾹, 사리물었다.
◆
경찰서 앞에서 쓰러진 남자와 몰려든 구경꾼, 다급하게 구급차를 부르는 경찰들.
그 모든 소란을 조용히 지켜보던 동백은 도시의 불빛이 겨우 닿는 어두운 해변으로 나와 약간 축축한 모래사장에 주저앉았다. 습기를 머금어 무겁고 차가운 바람이 어느새 동백의 곁에 앉은 자오의 긴 머리카락을 휘감았다.
바다의 짠 냄새와 함께 은은한 벽도화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처음엔 감히 요수 따위가 벽도화 향기를 풍긴다 생각했는데, 언제 이렇게 당연해진 건지. 이젠 까마귀 놈에게서 이 향기가 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것 같았다.
수많은 고민이 뒤엉켜 만들어낸 아주 긴 침묵이 이어졌다.
밤의 절반을 지새우고 새하얗게 여명을 밝히는 해가 수평선 위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가 되어서야 동백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밤새 잠겨있던 목소리가 텁텁했다.
“호…큼흠, 호영이한테 물어서 왔냐?”
“묻진 않고 들었습니다.”
절로 머릿속에서 자오를 붙잡고 조잘대는 호영이 떠올랐다.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단단히 붙잡은 동백은 다시금, 큼큼 답답한 목을 풀었다.
“내가 거기 있다는 건….”
당연히 기운을 읽고 쫓아왔겠지. 이 멍청아.
“기운을 읽고 찾아갔죠.”
생각대로의 대답이긴 한데, 너무 순순히 대답해주니 오히려 더 이상하게 들렸다. 이쯤 되면 그 질문도 약속된 횟수에 포함된 거냐는 빈정거림이 한 번쯤은 들려야 하는 타이밍인데 말이다.
이상함을 감지한 동백이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시선을 마주친 긴 눈매가 사르르 휘어졌다. 순수하게 상대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 사심이 가득 담긴 웃음이었다.
그 웃음을 본 동백은 생각했다.
요즘 부쩍 ‘그런’ 느낌의 수작이 늘었단 말이지.
초반엔 그래도 ‘잘 보이고 싶다.’라는 느낌이었다면 요즘은 ‘널 꼬시겠다.’라는 느낌이 강해졌다.
그가 아무리 긴 세월 동안 수절하는 삶을 살았어도 쌓아온 눈치와 상황은 많았다. 아무리 사람들 사이에 조용히 섞여들어 산다고 해도 그에게 호감을 보였던 이가 아무도 없었을까.
여자도 있었고 남자도 있었다.
성별뿐이랴.
자신을 죽이겠다고 하는 동백에게 사랑한다고 지껄이는 요수도 있었고 요괴도 있었다.
놈들은 모두 동백이 죽여버렸지만.
“못생겼다면서 그리 보셔도 됩니까?”
“못생겨서 보는 거야. 어찌 그렇게 생겨 먹었나 하고.”
이놈은…못된 장난이겠거니.
그리 생각하며 넘기는 수밖에.
“그보다 왜 달려들었어?”
갑작스러운 화제전환에 자오가 느리게 눈을 깜박이다 한 박자 늦게 “아,”하고 짧은 탄성을 냈다.
“야생동물은 함부로 만지면 안 됩니다.”
자오의 말에 무슨 소리인가 고민하던 동백이 결국 미간을 찌푸렸다.
“뭔 소리야.”
“…….”
자오는 대답 대신 묘한 웃음을 흘렸다. 더 캐물어도 대답할 생각이 전혀 없어 뵈는 모습에 동백이 혀를 찼다.
가벼워 보이나 가볍지 않고, 능글맞아 보이나 그 속엔 차가운 속내를 지닌 놈이 생각 없이 달려들진 않았을 텐데. 도무지 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점점 오리무중으로 빠져드는 동백의 의문을 중단시킨 건 작은 진동 소리였다. 핸드폰을 확인한 동백이 슬그머니 웃었다.
<형, 장산에 잘 도착했어? 한아 형도 간다던데 둘이 만났고?>
들여쓰기는 좀 아쉬워도 완벽한 맞춤법이었다.
엉망진창인 맞춤법을 몇 번 지적했더니 호영은 진저리를 치며 싫어했다. 하지만 끝내 승자는 동백이었다. 뿌듯함을 느낀 동백이 제법 빠르게 자판을 두드렸다.
< 그래.>
그의 대답에 호영은 이모티콘으로 화답했다. 하얀 곰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굿!’을 외쳤다.
연습이나 잘 다녀오라고 적으려던 동백은 잠시 고민하다 식상한 인사 대신 걱정을 담아 꾹꾹 눌러썼다.
< 낯선 사람이 다가오거든 항상 조심해.>
어둑서니와 호범이 세운동을 지키고 있어도 이호영은 세운동에만 있지 않았다. 어디 가둬두고 숨겨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가능할 턱이 있나.
그저 불안해하면서도 지켜보는 수밖에.
<걱정도 많다.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호영의 답장에 동백이 씁쓸히 웃었다.
어린애였다. 그것도 동백의 마음속에선 영원히 자라지 않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