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여전히 뒤에서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고 바라보던 시선이 잊히질 않는다. 동백은 환상처럼 일렁이는 모습을 지우려 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 나보다 나이가 많아지기 전까진 어린애 맞다.>
<허 참, 그래봤자 나랑 2살 차이면서 무슨.>
말과 같이 보내진 흥, 하고 비웃는 하얀 곰이 밉살스러웠다.
호영을 처음 만났을 때, 동백은 겉모습과 엇비슷하게 스물다섯 살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생각해 보면 아주 절묘했던 것이 조금만 나이를 낮췄어도 까딱 잘못했으면 호영을 형이라고 불러야 했다. 다시 떠올려도 여전히 간담이 서늘해지는 일이었다.
< 어허, 2살 차이라도 네가 날 추월할 순 없잖아.>
<그럼, 형도 한아 형한텐 어린애네.>
이게 무슨 소리야.
호영이 ‘한아’를 검색하면 나오는 프로필을 캡처해 대화방에 올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자오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인간들 사이에선 서른다섯인 남자가 말했다.
“형이라 불러도 됩니다.”
동백의 주먹이 조용히 자오의 옆구리에 박혔다.
“어억!”
몸이 울리는 고통에 억눌린 신음을 내뱉으며 자오가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런 자오를 새치름하게 흘긴 동백은 호영에게 답장을 보냈다.
< 그놈도 나한텐 머리에 난백도 안 마른 어린애야.>
사실 그들이 살아가는 시간에 비례하면 자오와 동백의 나이 차이는 ‘고작’이라 불릴 만했다.
자오가 알에서(진짜 알에서 태어나지는 않았겠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삑삑거리고 있을 때, 동백의 나이는 이미 스물다섯이었다. 마을을 덮친 참변이 일어난 해에 자오가 태어난 게 맞다면 정확하리라.
다만, 호영은 그런 깊은 사정 따위는 몰랐다. 눈에 보이는 건 인간의 기준에서 기록된 것뿐이니 동백이 할 말이 없어 어쭙잖은 우기기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형…추해. 인정할 건 인정하자.>
글자인데 어쩐지 호영의 표정이 눈에 훤했다. 한쪽 눈가를 찌푸리고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을 그 표정이.
그래, 인정한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는 걸.
동백이 결연한 얼굴로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자판을 꾹꾹 눌렀다.
< 호영아 난 사실 신선이야.>
대화창 옆의 숫자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동백은 바로 다음 내용을 이어 썼다.
< 그리고 까마귀 놈은 이름마저 까마귀인 요수고.>
< 사실 난 스물일곱도 아니고, 까마귀 놈도 서른다섯이 아니야. 정확한 나이는 잘 모르겠는데, 하여튼 내가 그놈보다 스물다섯 해는 더 살았어.>
뭐, 이리 말해봤자 믿겠냐마는….
진실을 말했으나 동백은 딱히 호영이 믿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잠깐의 텀을 두고 돌아온 답장은 동백의 예상대로였다.
<그럼 나도 신선 할래.>
다소 장난기가 섞인 대답에 동백은 아직도 모래 위에 웅크리고 끙끙거리고 있는 자오를 힐끗 쳐다보았다.
눈치가 빠른 녀석이니 분명 동백의 말이 그저 흘려보내는 허튼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릴 터. 굳이 꼭꼭 숨겨야 할 이유도 없다. 이건 지나가 버린 과거이고, 자신만이 남겨진 시간의 망령이니.
< 아니, 넌 옛날에 죽은 내 동생이야. 다시 태어날 때마다 계속 나랑 만나는 중이고.>
<…묘하게 설정 세세하네.>
< 진짜니까.>
만약 호영이 동백을 실제로 마주하고 대화했다면, 적어도 ‘어라 뭔가 이상한데?’라는 낌새를 조금이라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감정 없이 쓰인 글자는 동백이 말한 ‘진실’을 그저 흘려보낼 뿐이었다.
<형의 과몰입을 본받아 연습하러 가야겠다.>
농담을 흘려내듯 흘러간 진실을 동백은 굳이 붙잡지 않았다. 그저 잘 다녀오라며 가벼운 인사와 함께 떠나보냈다.
“괜찮습니까?”
동백은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두 눈을 좁혔다. 자오의 긴 머리카락이 모래밭에 아무렇게나 흐드러져 있었다. 굳게 다물렸던 입술 끝이 씰룩거렸다.
저럴 거면 머리를 자르던가.
반사적으로 튀어 나가려던 잔소리를 겨우 붙든 동백은 잔소리 대신 투덜대는 말투로 쏘아붙였다.
“엄살은 다 부렸냐?”
“사실, 아직 덜 부렸습니다.”
“그럼 엄살이나 더 부릴 것이지, 왜. 옆으로 드러누워서 핸드폰 들여다볼 시간은 있었나 보지?”
“당연히 선인님의 말씀 전부를 머리에 새겨두려는 제 존경심의 발로이죠.”
능글맞기 그지없는 대답에 동백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이젠 제법 익숙해져서인지 아부와 빈정거림을 넘나들며 긁어두는 말솜씨가 일품이었다.
“그보다 괜찮으신지 여쭈었는데요.”
“네놈이 묻는 게 내 혈압이라면 덕분에 순조롭게 상승하고 있으니 걱정 마라.”
이렇게 모른 척 비아냥거려도 자오가 뭘 묻는지는 안다.
동백의 시선이 다시금 밀려오는 파도로 향했다. 창백할 정도로 흰 얼굴은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의 희미한 고독과 체념을 담아냈다.
몇 번이나 이어진 인연인데, 이런 이야기를 한 게 이번이 처음일까. 말해봤자 다 부질없는 것을.
“동백.”
움찔-
나지막한 부름에 검파로 향하던 손이 커다란 손에 붙잡혔다.
데일 정도로 뜨거운 손이었다.
빌어먹을 세 번째 가설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을 응시하는 깊은 눈 때문인지. 감히 누구의 이름을 부르냐고 엄포를 놓아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영생을 바라곤 하죠.”
“…그 영생이 얼마나 고독할지 생각도 하지 못하고.”
거의 들릴 듯 말 듯 작게 읊조린 동백의 목소리를 들은 자오가 잘게 웃었다. 그는 “그렇죠.”라고 동조하며 긴 숨을 내뱉었다.
파도 소리가 짧은 침묵 사이를 파고들었다.
자오는 한 번 숨을 골랐다.
“그런 의미로 저희는 꽤 좋은 동료가 되지 않을까요?”
동료….
낯선 울림을 지닌 단어를 동백은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장난스럽게 등을 맡길 수 없는 동료니 뭐니 했어도 진짜 자오를 ‘동료’ 같은 것으로 본 건 아니었다. 그냥 한때 지나가는 인연이며, 언젠가는 서로 목숨을 노릴 존재로 여겼지.
어쩌면 자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선경을 제외하고 이 땅 위에서 가장 오래 살아온 존재는 동백과 자오이니 적당히 서로 성질만 죽인다면 잘 맞는 동료 행세도 가능할지도 몰랐다.
“쉬이 죽지도 않을 테고.”
그렇겠지.
“가끔 심심하면 대련도 할 수 있겠죠.”
동백은 자오의 붉게 물든 옆구리와 엉망진창으로 찢긴 옷자락이 눈에 들어와 그건 지금이라도 해줄 수 있다고 하려다 참았다. 대신 여전히 손을 붙잡고 있는 거슬리던 자오의 손을 매섭게 떨쳐냈다.
“또한, 술 한잔과 휘영청 뜬 달을 감상하며 옛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겠지요.”
“그래, 네놈이 요수가 아니라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
매정한 동백의 대꾸에 자오가 손으로 눈가를 찍으며 웅얼댔다.
“기껏 분위기를 잡았는데 너무하십니다.”
“내가 개수작 부리지 말라고 했지?”
“나름대로 진지한 제의였습니다만.”
자오의 말을 무시한 동백은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넌 이제 돌아가.”
“예?”
알아듣고도 천연덕스럽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는 듯 반문하는 자오를 향해 동백은 한 글자 한 글자를 씹어 뱉듯 다시 말했다.
“옆구리 뚫린 허약한 약골이 따라붙으면 귀찮으니까 꺼지라고.”
허약한 약골이라도 자오의 술법은 꽤 유용하니 곁에 두면 좋긴 좋았다. 다만, ‘그것’의 혼백을 한겹 한겹 베어내 확인할 때 곁에 두기 껄끄러울 뿐이다. 무슨 결과가 튀어나올지는 전혀 모르니까.
그렇지만 이놈이 고작 이 정도에 순순히 말을 들어 먹을 리가 없다.
“싫은데요?”
거봐라.
맞지.
이제는 뻔하게 들어맞는 예상에 동백은 먼저 나아가면서 피식 웃었다.
◆
모름지기 추적이란, 사냥감을 놓친 마지막 장소에서부터 시작인 법. 동백은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장산은 평일 낮임에도 제법 많은 사람이 등산을 위해 몰렸다. 서로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밝은 형광 등산복을 걸친 이들 사이에서 동백은 옅게 남은 사기를 쫓아 느긋하게 ‘그것’의 뒤를 밟아 산 중턱에 도달했다.
오랜만에 사냥꾼으로 돌아간 신선은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피며 기감을 예리하게 돋웠다. 어제 위협을 받았으니 해가 중천에 뜬 낮이라도 요괴는 충분히 사람들을 습격해 죽일 수 있었다.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동백과 주변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요괴.
동백이 불리해도 한참 불리한 싸움이었다.
그런 동백의 옆에 나란히 앉은 자오는 산 아래 옹기종기 모인 노점상에 돈을 두고 슬쩍해온 찐 옥수수를 우물거리며 다리를 흔들었다. 태평해도 너무 태평한 모습에 동백이 못마땅하게 콧등을 찌푸렸다.
“맛있냐?”
지금 상황에 먹을 게 넘어가냐는 빈정거림에 가까운 말이었는데, 자오는 남은 옥수수 하나를 동백에게 쓱 건네며 쉴 새 없이 옥수수를 씹었다.
저놈이 배고파서 먹는 건 아닐 테고. 찐 옥수수가 맛있어서 먹는 것도 아닐 거다.
저 망할 까마귀도 우화등선했던 몸이니 굳이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을 텐데, 굳이 지금 옥수수를 옆에서 먹고 있는 건….
“옆구리?”
끄덕.
자오의 고개가 위아래로 크게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금 남은 옥수수를 동백에게 내밀었다.
콩 한 쪽도 나눠 먹는다고 하긴 하지만, 다친 놈이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빨리 회복하겠답시고 먹고 있는 것까지 뺏어 먹긴 좀 그렇다.
“많이 먹어라.”
쯧.
동백이 혀를 차며 외면했다.
얄미운 놈이긴 한데 저러고 있는 걸 보니 조금 안쓰럽기도….
안쓰….
쓰ㄹ…,
쓰레기 새끼.
이놈은 쓰레기다.
어딜 동정심을 가지려 들어?
흐트러지려는 자신을 빠르게 바로잡은 동백이 정색하며 자오를 노려봤다. 얌전히 커다란 바위 아래로 지나치던 사람들의 정수리를 구경하던 자오는 제게 향한 차가운 눈초리에 억울함을 감추지 못했다.
“왜 그리 노려보십니까?”
“이 쓰레….”
동정심을 유발하는 같잖은 작전을 사용하는 자오에게 한바탕 폭언을 쏟아내려던 동백은 한순간 목덜미를 오싹하게 만드는 사기에 표정을 굳혔다.
“선인님, 이거….”
「끼아아아아아아아-!」
자오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폭발적인 비명이 장산 전체를 울렸다.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와 짐승의 울부짖음이 뒤섞인 귀곡성은 사기와 뒤섞여 음산했다.
수백수천의 혼백이 뒤엉켜 내지르는 비탄에 심약한 자는 귀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몇몇 정신을 잃지 않은 이들도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했다.
“산에서 내려가요!”
웅성거리는 이들을 향해 동백이 목소리에 선기를 실어 크게 외쳤다. 기절한 사람까지 챙겨가 주면 좋겠지만, 그것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허겁지겁 산 아래로 도망치는 사람을 쫓는 혼백을 발견한 동백이 발을 굴러 산 전체로 선기를 퍼트렸다.
「살려줘죽이고싶지않아나만죽을순없는데넌왜살아있저어죽여버릴거야죽고싶지않아씨무서워우리같아지자아파.」
살아있는 모든 것을 향해 증오를 쏟아내는 혼백이 검은 장막처럼 하늘을 까맣게 덮었다. 황금빛의 은은한 빛이 검은 하늘과 뒤섞여 몽환적인 광경을 만들어냈다.
“와우.”
아름다운 장관에 자오는 덤덤하게 감탄했고, 동백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감탄할 시간 있으면 사람들부터 챙겨!”
선기는 무한하지 않다.
동백이 아무리 많은 선기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언제까지고 이런 소모전을 이어갈 순 없었다.
“버티실 수 있습니까?”
“그거 물을 시간에 벌써 하나는 구했을 거다.”
이를 악물며 으르렁거리는 동백의 대꾸에 자오는 그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장 가까운 인간들을 작은 구슬로 만들어 품에 집어넣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든든한 건지 아니면 못 미더운 건지.
몸을 날려 시야에서 사라진 자오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끼던 동백은 옆을 스친 혼백의 울부짖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엄마…. 엄마….」
흔들릴 것 없다.
이리된 거 이제라도 바른길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바로잡아주면 된다.
동백은 그가 평생토록 의지해 온 검의 손잡이를 손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강하게 움켜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