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백-53화 (54/61)

53화

장산은 그 이름이 도시의 이름이 될 정도로 넓고 높은 산이다.

산을 오를 수 있는 수많은 등산 코스가 있고, 하루 등산객 수도 꽤 많다.

자오는 빠르게 능선을 타고 달리며 산을 오르기 전 머리에 쑤셔 넣은 간략한 지도를 빠르게 떠올렸다. 등산 코스는 산의 곳곳에서 시작되는데, 그중 가장 사람이 많은 곳은 동쪽 능선에 있는 사찰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동백이 있는 곳에서 가장 먼 곳이기도 했다.

그는 동백이 있는 장소에서 가까운 곳부터 차근히 쓰러진 사람들을 수거해 나갔다. 작은 구슬 형태로 만들어 품속 공간에 차곡차곡 쌓으니 그 수가 제법 많았다.

다시금 산 전체를 훑어 남은 사람이 없는지 살피던 자오는 거스러미처럼 신경 한구석을 갉작이는 아주 불쾌하면서도 낯선 느낌에 얼굴을 찌푸렸다.

동백에게 얼른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아는데, 자꾸만 그 거스러미 같은 불쾌감이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운명의 갈림길은 항상 선택으로 갈리고, 자오는 지금껏 항상 옳은 길을 걸어왔건만 지금은 이상하게 확신이 서지 않았다.

빠르게 산을 누비던 발이 멈췄다. 머뭇거리며 뒤를 돌아본 그는 동백이 있을 방향을 잠시 바라보았다.

자신이 없어도 동백은 괜찮을 것이다.

지금껏 홀로 요수나 요괴를 잡아 온 노련한 사냥꾼이니까.

그리고, 지금이면….

산을 둘러싸고 있던 선기가 사그라지는 것에 자오는 입술 끝을 올렸다.

산에 인간의 기척이 전부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릴 때가 됐다.

성격은 괴팍해도 실력 하나는 확실하니 안 믿을 수가 있나.

그는 발길을 돌렸다.

대체 무엇이 이리도 거슬리게 구는진 몰라도 직접 확인할 생각이었다. 산의 능선을 따라 다시 사찰 근처로 돌아온 자오는 아주 희미한 기척 쪽으로 찬찬히 걸음을 옮겼다.

겨울을 맞이하기 위해 잎사귀를 떨군 앙상한 나무 사이로 흐릿한 작은 아이가 스쳤다.

「……….」

짐승의 털을 겨우 엮어 만든 누더기에 가까운 외투를 걸친, 얼굴조차 구별되지 않는 희미한 환영은 나무 사이를 거닐며 입술을 벙긋거렸다. 흐릿한 손끝은 자오를 부르듯 살랑이며 흔들렸다. 소리가 되지 못한 부름은 사그락거리는 낙엽 사이로 묻혔다.

「……….」

자오는 홀린 듯 그 작은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한 걸음을 다가가면 아이는 세 걸음 물러섰다.

본능이 속삭였다.

저 산산이 부서져 볼품없는 혼백의 파편은 자신이 마땅히 가져야 하는 것이라고.

까마귀는 탄식했다. 차마 말로 꺼내둘 수 없는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다. 기쁘면서도 슬펐고 허무함이 가시질 않았다.

“하…. 하하! 하하하! ……하.”

한숨 뒤엔 웃음이, 웃음 뒤엔 탈력감이 뒤따랐다.

태어나서부터 공허에 시달려 지친 요수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일그러졌던 얼굴은 그렇게 손바닥 아래에서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뒤바뀌었다.

저 혼백이 그의 것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마치 잘 짜인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자오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공허와 싸워왔고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해 무엇이든 해봤다.

황금과 보석을 질리도록 얻어 아귀처럼 늘어나는 창고를 가득 채웠고, 방종한 삶을 보내기도 했다. 그 모든 게 질릴 때 즈음엔 이 세상의 끝과 끝을 오가며 색색의 눈동자 색을 지닌 인간과 그와는 영 다르면서도 비슷한 존재를 만났다.

그렇게 했음에도 찾지 못했건만, 여기서 이렇게 찾는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자오는 쉬이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적이 함정을 판 거라면 자신이 아무 의심 없이 함정에 발을 들일 거라 생각한 건가?

우습다. 우스운데, 웃을 수가 없었다.

“씨발.”

거친 욕설이 단정한 입술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왔다. 웃음을 잃은 눈매가 딱딱하게 굳어 파르르 떨렸다.

가서 동백을 불러올까.

그사이에 사라져버린다면?

이건 함정일 수도 있다.

그런데 포기할 수가 없다.

이성과 본능 사이 치열한 공방이 오갔다.

우연이라는 걸 자오는 믿지 않았다. 순수하게 굴기에 그는 이 ‘우연’이라는 것에 너무 많이 데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나.

자오는 몸을 숙였다. 희미한 혼백은 그 작은 움직임에도 날아갈 듯 일렁거렸다. 이게 만약 함정이라 할지라도 이대로 놓쳐버린다면 또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다행인 건 지금 그는 혼자가 아니란 점이었다.

적어도, 등을 맡길 수 없는 동료 정돈 있지 않은가.

잘 부탁합니다.

동백이 있을 방향을 힐긋 바라본 자오는 혼백을 움켜쥐었다.

거친 숨이 내뱉어질 때마다 하얀 숨결이 허공을 수놓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구역질이 치밀어도 그들의 뒤를 쫓는 이들은 오히려 바짝 따라붙었다. 뒤에서 쏘아진 화살이 나무에 박혀 그 반동에 꽁지깃을 파르르 떨었다.

“놓치지 마라!”

서슬 퍼렇게 엄포를 놓는 목소리에도 작은 아이는 의연하게 겁을 삼켰다. 눈에 띄는 비단신을 버리고 옷에서는 화려한 장식을 떼어냈다. 그렇게 하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아이와 같이 도망치던 남자는 다 떨어진 허름한 옷을 구해 갈아입혔다. 얼굴엔 진흙을 칠해 귀티가 나는 외모를 숨겼다. 그럼에도 얼굴에 묻어나는 나이에 맞지 않는 의젓함은 가시지 않았다.

우영의 열다섯 번째 왕자이자 왕후의 유일한 소생으로서 왕세자의 자리를 받은 선오(善悟)는 고작 여섯 살이었다.

왕이 거느린 수많은 첩의 자식들은 가장 늦게 태어나 당연하다는 듯 왕세자의 자리를 차지한 선오를 탐탁지 않아 했다. 사랑받으며 자라야 했을 어린아이는 장성한 형제들 사이에서 눈치 보는 법을 먼저 배웠다. 뛰어노는 법보다 식사에 섞여 나오는 독을 경계해야 했으며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받아야 했다.

하지만, 선오의 어머니인 왕후는 외척이라 부를 세력이 없었다. 비천한 시녀에서 왕후의 자리에 올랐거늘 그녀의 끝은 비참하고 통탄하기만 했다.

지속되는 흉년, 흉흉한 민심, 나약한 왕과 왕후.

모든 게 선오에겐 악재였다.

“저하.”

선오는 유일하게 남은 충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영의 반란은 무척 조용하고 시시하게 끝났다. 아닌 밤중에 목이 베인 왕과 왕후는 저잣거리에 굴러다니는 시체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고, 적법한 후계자인 선오는 꼭 죽여야 할 징그러운 동생에 지나지 않았다.

요수나 요괴를 만날지도 모를 깊은 숲속을 지나 메말라버린 개울 몇 개를 지난 후 작은 마을 근처에 다다라서야 충복은 선오를 향해 부복하며 아뢰었다.

“제가 미끼가 되겠습니다. 저하께서는 이대로 마을로 내려가 부랑아 행세를 하십시오. 이름은 절대 입 밖에 내서는 안 되십니다.”

무엇이 이 남자를 충성스럽게 만들었는지 선오는 알지 못했다. 진흙투성이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마지막까지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선오는 그의 최후를 보지 못하였다. 그의 말대로 이름이 없는 부랑아가 되어 어설프게 나무껍질을 벗겨 주린 배를 채우고 얼어붙은 흙탕물로 목을 축였다.

혹독한 겨울은 이제야 시작이었다.

땅을 디딘 발엔 이미 감각이 없었다. 나중에 발가락을 잘라내야 할지도 모른다고, 아이는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 부드러운 비단신을 신었던 발가락을 꿈질거리자 어색하게 움직이는 게 아직은 괜찮아 보였다.

겨울의 고약한 심술을 피해 미약한 체온이라도 나눠보려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불그죽죽했다. 아무리 웅크려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공기는 차가웠고, 얄팍한 천 조각은 동장군의 가장 충직한 바람이라는 수하에게서 그들을 지켜줄 수 없었다.

그 심술에 못 이겨 나자빠진 아이들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원망을 토해내며 죽어갔다.

“딱딱해지기 전에 먹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는 게 좋겠어.”

가혹한 운명에 굴복해 인간이길 포기한 몇몇 아이들이 숙덕대며 소곤거렸다.

그래봤자 다 들렸다.

사실 들으라고 말하는 걸지도.

그들은 제 몫을 누가 빼앗아갈까 희번덕 눈알을 번들거렸다. 축 늘어진 작은 몸뚱이를 질질 끌며 가져가는 꼴이 아마 저들은 오늘 저녁 따뜻한 고깃국을 먹을 것이다. 그게 무엇으로 만든 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곳에 있는 아이들이라면 잘 알았다.

이 굶주림을 이겨내고 봄이 온다 해도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모두가 회의적이었다. 작은 희망의 불씨마저 남지 않은 상황에서 절망은 전염되고 광기는 자연스레 깃들어 죽어 자빠질 다음 희생자를 기다렸다.

하루를 버티면 그다음 하루는 더 버겁고.

그다음 날을 버티면 또다시 그다음 날은 더 버거웠다.

마을 사람들은 어디서 굴러들어온 지 모를 부랑아들을 경멸하고 싫어했다. 자신들의 것을 도둑질해 생을 연명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서 죽어 없어지길 바라는 이도 있었고, 마을 안에서 마주치면 흠씬 두들겨 패 밖으로 내쫓는 이도 있었다.

아이는 그들을 딱히 원망하지 않았다.

잡아다 솥에 고아 먹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디인가.

지나쳤던 마을 대부분 부랑아를 데려다가 잡아먹었던 걸 떠올리면 이 마을은 썩 나쁜 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커다란 산을 끼고 있는지라 이 마을엔 종종 산에서 내려온 사냥꾼이 들른다고 다른 아이에게 들었다. 작은 토끼나 사슴 같은 것을 잡아 고기나 가죽을 팔러 오는 그는 아이들 사이에선 꽤 유명했는데, 시기가 어긋난 탓인지 아이는 아직 한 번도 그를 본 적이 없었다.

사냥꾼이라면 흔히 생각하는 외모가 우락부락하고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외양을 떠올리고 있던 아이는 이레하고도 이틀이라는 시간이 더 지난 후에야 드디어 그 소문의 사냥꾼을 마주쳤다.

가볍지만 기세를 잃지 않은 걸음걸이. 조잡하게 얼기설기 가죽을 덧대어 만든 옷을 걸쳤음에도 수려한 외모는 고고하게 빛났다. 창백할 정도로 맑고 흰 피부는 그토록 지독하게 자신을 괴롭히던 눈을 닮았는데도 고아하게 느껴졌다.

그는 제 뒤로 졸졸 따라붙는 아이들을 보며 웃으며 울었다. 허리춤에 매달린 작은 토끼 가죽이 초라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의 뒤로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가죽의 쪼가리나 작은 고기 조각이라도 얻기 위해 뻣뻣해진 몸을 움직이던 그들은 그가 그 가죽을 한줌의 곡식과 바꾸자 실망해 걸음을 돌렸다.

축 늘어진 어깨와 무거운 걸음으로 돌아가는 아이들 사이에서 이름을 잃어버린 아이는 꿋꿋하게 서서 그를 응시했다. 여전히 우는 듯 일그러진 낯을 하고 있던 남자는 아이와 눈을 마주쳤다.

“얘야.”

아이는 조금 더 다가온 그를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나와 함께 갈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