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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54화 (55/61)

54화

언제 변덕을 부릴지 모를 가벼운 제안이었다. 아이는 망설이지 않고 그의 옷자락을 힘주어 잡았다.

그는 몸을 숙여 작은 아이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래, 너는 이제…부…ㅌ….”

쩌적-!

세상에 커다란 금이 가며 갈라졌다. 희미하게 웃던 남자의 얼굴도 하늘도 모든 게 깨진 거울처럼 일그러지며 산산이 흩어졌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쳤던 작은 아이는 어느새 장성한 남자가 되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공허를 마주했다. 어떤 짓을 해도 채우지 못했던 검은 욕망이 게걸스럽게 혼백의 파편을 집어삼켰다.

달칵, 무언가 맞물리는 충족감에 한껏 늘어졌던 남자는 귓바퀴를 간질거리는 희미한 목소리를 들었다.

‘죽…버릴…. 개…….’

그것은 방금 들었던 목소리와 아주 비슷했고 또한 익숙했다. 그 소리에 집중하자 조금 더 또렷하게 목소리가 들렸다.

‘자…….’

“자오!!!”

자오는 번쩍 눈을 떴다.

깜박, 깜박.

그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희뿌옇게 흐려진 시야 사이로 아릿하게 사람의 형체가 다른 희뿌연 털 덩어리와 뒤엉켜있었다. 두껍게 쌓인 낙엽이 거친 움직임에 이리저리 흩날리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르르!!”

짐승의 울음소리에 뒤이어 짜증이 덕지덕지 들러붙은 앓는 소리가 들렸다.

까가가각!

강철만큼 단단한 발톱이 동백의 검날을 타고 미끄러지며 작은 불똥이 튀었다.

훌쩍 뒤로 물러선 ‘그것’은 높게 뛰어올라 앙상한 나무의 가지를 밟고 자오를 향해 쇄도했다.

여전히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자오는 저를 향한 진득한 살기에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여 정확히 가슴을 노리고 파고든 긴 손톱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하이고, 잠자는 숲속의 까마귀께서 드디어 눈을 뜨셨구만?”

자오는 동백의 비아냥에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절한 사이, 동백이 제 머리를 검집으로 후려쳤거나 걷어찬 게 틀림없었다. 뒤통수에 볼록한 혹이 솟은 걸 보니 확실했다.

“머리를 후려치는 게 아니라 입을 맞춰 주셨다면 더 좋았을 텐데요.”

“그랬으면 네놈 목이 어깨 위에 안 달려 있었겠지.”

“오.”

자오의 담담한 감탄에 동백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너 내가 조금만 늦었어도 뒤졌다니까?”

“하지만 안 죽었잖아요?”

죽을뻔한 경험이야 열 손가락으로 세어도 모자란지라 자오는 대수롭지 않게 옷자락에 들러붙은 낙엽을 툭툭 털어냈다.

“그리고 믿고 있었습니다.”

깊은 눈이 동백을 응시했다. 자신을 향해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뻗던 남자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그 위로 겹쳐졌다.

“선인님.”

“왜?”

‘그것’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동백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자오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동백에게 묻고 싶은 게 많건만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주 작고 희미한 혼백의 파편이 품은 건 아주 단편적인 기억뿐이었다.

그는 우영의 열다섯 번째 왕자 선오였다.

자신이 한때 인간이었다는 걸 알아낸 건 고무적인 일임에도 그리 기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마지막으로 본 동백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너는 이제부터….’

‘동백아.’

혼백의 조각이 품은 기억과 그가 훔쳐보았던 동백의 기억.

마침내 연결고리를 찾은 기억이 서로 맞물렸다.

아, 아아….

자오는 소리 없는 환희에 젖었다. 손끝이 저릿하고 오금이 떨렸다. 동백을 부서트리고 싶으면서도 소중히 하고 싶은 모순적인 감정이 들끓었다.

더.

더 많은 걸 알고 싶다.

까마귀는 탐욕스럽게 눈을 빛냈다.

“두 번째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지금 상황에?”

뜬금없는 요청에 동백이 자오를 곁눈질했다. 굳이 표정을 보지 않아도 어이없어하는 게 선명히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이니까요.”

동백이 고개를 살짝 저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미친놈.”

그러면서도 동백은 하지 말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일단 들어는 주겠다는 태도에 자오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동백…. 왜 이름을 동백으로 정하셨나요?”

“…….”

질문을 들은 동백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일단 저것부터 처리하고.”

그다음에 이야기하자.

대답을 미룬 동백의 검 끝이 ‘그것’을 겨눴다. 자신을 이루는 혼백 대부분을 뿜어내 약해진 ‘그것’은 자오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주, 죽…여. 죽여 죽여!”

제 앞을 가로막은 동백을 무시한 채 다시금 빠른 속도로 도약한 ‘그것’을 바라보며 자오는 투갑을 불러들였다.

“끄…륵…”

치렁치렁한 흰 털 사이로 검은 사기가 풀풀 피어올랐다. 자오에게 뜯긴 목덜미에선 사기와 더불어 남은 혼백마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동백은 그런 혼백을 선기로 정화해 흘려보내며 의아함을 지우지 못했다.

이 정도로 상처를 입었다면 도망쳐야 할 텐데 ‘그것’은 오직 자오를 죽이는 데 목적이 있는 듯 물러서지 않았다.

동백이 검을 횡으로 크게 휘둘러 달려들던 놈을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전위에 서서 자오를 지키며 싸우던 동백은 이상함을 더 크게 느꼈다.

수백수천의 혼백으로 이루어진 놈이 이유 없이 혼백을 뿜어낸 것도 그렇고, 이상하게 자오만 노리는 집요한 공격도 그랬다.

심지어 놈은 어쩔 수 없이 동백을 공격해야 할 땐 무척이나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동백을 크게 밀어내거나 떨쳐내는 게 전부였다.

“이상해.”

동백의 중얼거림에 자오 또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정상적이진 않군요.”

가진 혼백을 점점 잃어가는 놈은 곧 사라질 터였다. 지금도 비틀거리며 일어섰지만 으르렁거림 속에 헐떡임이 섞인 지 오래였다.

동백이 짧게 혀를 찼다.

혼백 대부분이 그가 확인도 하기 전에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상처를 통해 흘러나오는 혼백에서도 ‘동백’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짜증을 내야 하는지.

“그륵…그르르….”

어떻게든 자오를 공격하려 마지막 힘을 쥐어짜는 ‘그것’을 바라보던 동백은 망설임 없이 목을 잘랐다.

마른 낙엽 위로 묵직한 머리가 떨어졌다. 시커멓게 드러난 목을 통해 남은 혼백들이 비명을 지르며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동백은 선기를 풀어 길을 잃어버린 혼백이 바른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기 시작했다.

의도치 않게 죄를 지었으나 쌓은 업이 많아 미물로 태어나 죄를 씻은 다음에야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기회를 얻을 혼백들이었다.

한줌의 선기도 남기지 않고 탈탈 털어 쓴 동백이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긴 숨을 내쉬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수확이 없으니 허탈했다.

검은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그것’의 몸뚱이와 머리를 바라보던 동백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늘어져 있기엔 수습해야 할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잘 챙겨 뒀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자오는 품에서 작은 구슬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색색의 작은 유리구슬 안으로 희미한 인간의 형상이 비쳤다.

동백은 그 구슬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음….”하고 목을 울렸다.

봉인술이란 술법은 간단한 술법 중 하나였다.

상대를 구슬처럼 만든 기운 안에 가둬두는 술법인데 간단하다고 불리지만, 소모되는 기운은 많은 그런 계륵 같은 술법이기도 했다.

그래서 잘 쓰이지 않는데….

동백이 자오의 안색을 살폈다.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는 묘하게 혈색이 돌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근래 다시 없을 정도로 유순했다.

“다만 산에 다시 풀어주기엔 아직 남은 사기가 짙어 위험할 듯합니다.”

게다가 힘든 기색도 없이 멀쩡해 보였다.

산에 있던 사람의 수가 꽤 많았는데, 그 인원을 전부 봉인술을 사용해 구슬로 만들고도 멀쩡하다니.

이 징그러운 자식.

“근처에 절 있지?”

“예, 산 중턱에 사찰 하나가 있더군요.”

“거기로 가자.”

두 사람은 산등성이를 타고 달렸다.

촘촘하게 자란 나무나 길이 될 수 없는 가파른 절벽을 지나 사찰에 도착한 동백은 자오에게 눈짓했다.

자오는 품에서 수많은 구슬을 꺼내 가볍게 흩뿌렸다. 구슬들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부드럽게 허공을 유영해 날았다.

법당과 마당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흩어진 구슬은 자오가 기운을 거두어들이자 작은 빛과 함께 안에 갇혀있던 인간들을 게워내고 사라졌다.

“기억을 헤집어두기엔….”

“이미 산 아래로 도망친 사람도 많으니 무리겠죠.”

“그렇겠지.”

아마 이번 일은 장산의 미스터리로 남지 않을까. 동백은 덤덤히 생각했다.

그래봤자 이젠 사람들이 ‘장산범’이라 부르던 놈도 사라졌으니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을 거다. 흥미 위주의 소문이나 나고 말겠지.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따라와.”

동백은 자오를 끌고 다시 장산을 올랐다. 지금 가는 곳은 아까 동백이 발견한 곳이었다.

사람들을 구하라고 자오를 보낸 후, ‘그것’을 잡기 위해 홀로 기운을 추적했던 동백은 새카맣게 죽은 땅과 막 숲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그것’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바로 뒤쫓았다.

망설임 없이 뛰어가는 놈이 어찌나 빠른지 중간에는 한 번 놓칠 뻔하기까지 했던 동백은 한 발 뒤늦게 도착해 기함했다.

‘그것’은 숲에 쓰러진 자오를 향해 날카로운 손톱을 찔러 넣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어질어질하다.

조금만 늦었으면 ‘그것’의 모가지와 함께 이놈의 모가지도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을 거라는 게.

그런데 뭐?

오? 오오?

그냥 콱 뒤져버리게 놔뒀어야 했는데.

작은 한숨과 함께 검게 물든 땅에 도착한 동백은 자오에게 오만하게 턱짓했다.

“여기 좀 살펴봐.”

“혼백이 내뿜어진 곳인가 보군요.”

“그래.”

동백이 몸을 숙여 땅을 더듬는 자오를 향해 삐죽한 시선을 보냈다.

“딱히 느껴지는 건 없습니다.”

“아무것도?”

“예. 하지만 너무 깨끗하니 오히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의심이 가는 곳도 있고요.”

“그 선동꾼 놈인가….”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게 오히려 꼬리가 되다니. 아이러니했다.

자오는 검게 죽은 땅의 사기를 천천히 거둬들이며 생각에 잠긴 동백을 향해 물었다.

“이런 존재가 여기 있다는 걸 알려준 건 선인님의 그 친구분인가요?”

“맞…너 설마.”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사납게 노려보는 동백에게 자오는 가볍게 대꾸했다.

“그냥 여쭤본 겁니다.”

“의심도 하지 마. 태상은 아니니까.”

얼굴을 굳힌 동백이 차갑게 일축했다.

“제 천성이 그러하니 선인님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시죠.”

“…….”

“의심하고 불신하는 게 당연하다 보니.”

땅에 남아있던 사기를 전부 거둬들인 자오는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두 눈을 휘었다.

“절 미워하진 마세요.”

이미 밉상인 놈이 미워하지 말라니.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저, 저 요망하게 웃는 꼴을 보라지.

“눈이나 바로 떠.”

교태를 부리며 긴 속눈썹을 팔랑거리는 자오에게 면박을 준 동백이 짧게 혀를 찼다.

하여튼, 틈만 나면 수작질이다.

“이제 선인님께서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나셨나요?”

“…음.”

자신이 품은 의문은 하나도 해결된 게 없는데 사건은 끝나버렸다.

동백은 자오가 사기를 거두어들였어도 여전히 까맣게 물든 땅을 잠시 응시했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미궁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두 눈을 가리고 미로의 벽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지지부진하고 답답한데, 제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을 도무지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일단은….”

동백의 대답에 자오의 입술 끝이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그럼 이제 남은 시간은 제게 할애하실 수 있겠군요.”

자오는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동백은 그 손을 무시하고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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