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백-55화 (56/61)

55화

동백은 커다란 통창 너머로 보이는 도시와 그 끝에 걸쳐진 바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아름다운 풍경이나 그는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사실 별건 아니다.

아니다 별거다.

쏴아아-

욕실 안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예민한 동백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겨우 창문에 고정해둔 시선이 힐긋 뒤로 향했다.

작은 콧노래와 살갗을 문지르는 소리, 상처를 건드렸는지 작은 신음을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좋은 곳이라더니.

“호텔이냐….”

그는 애써 욕실에서 들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방안을 둘러봤다.

포근해 보이는 침대와 잘 정돈된 실내는 아늑하게 느껴졌다.

자오의 말대로 좋은 곳이긴 하다.

시설도 좋고 방음도 잘 되고 시끄럽지도 않아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좋았다.

그럼, 와서 소파에 궁둥이나 붙이고 앉을 것이지 들어오자마자 왜 욕실로 기어들어 가!

울컥 솟는 울분을 내리누른 동백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문지르며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그 와중에 침대가 너무 푹신해서 더 짜증이 났다. 이상한 소리가 나던 고시원의 매트리스가 생각나지 않나!

한참이나 이어지던 물소리가 멎었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동백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긴 머리카락이 젖어 균형 잡힌 몸 위로 들러붙어 있었다. 그의 허리춤에 둘린 수건은 몹시 초라할 정도로 작아서 아슬아슬해 보였다.

하지만, 동백의 시선이 꽂힌 곳은 근육질의 몸도 아니고 아슬아슬한 수건도 아니었다.

발톱에 쥐어뜯긴 옆구리가 아직 아물지 않아 붉은 선혈이 어설프게 걸린 수건을 지나 다리를 타고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

동백이 간결하게 그것을 지적하자 자오는 머리카락을 설렁설렁 문지르던 수건으로 옆구리를 틀어막았다.

하얀 수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드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목구멍 아래까지 울컥 잔소리가 치솟았던 동백은 겨우 그것을 삼켰다.

나갈 때 저 수건들은 필히 태워버리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동백의 눈이 긴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는 물방울에 닿자,

씰룩.

자오의 입꼬리 끝이 작게 경련했다.

“너―.”

금방이라도 잔소리를 쏟아내려던 동백은 다시금 입을 꾹 다물고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꼭 필요한 게 아니면 신경 쓰지 마.

자신이 계속 저놈의 젖은 머리카락을 싹싹 닦아줄 건 아니지 않은가.

“후우….”

“피곤하시다면 쉬고 내일 이야기할까요?”

“아니. 여기 와서 앉아.”

대충 피를 닦아낸 자오를 동백은 발끝을 툭툭 두드려 발치로 불러들였다.

짐승을 부리는 것 같은 부름이었으나, 자오는 군말하지 않고 침대 아래 그의 발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눈동자 가득 서로의 모습이 담겼다. 당최 속내를 읽어내기 어려운 새카만 눈동자는 빤한 시선에 부드러운 호의를 내보였다.

산에서 독버섯이라도 주워 먹었나.

물론, 동백은 그 호의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날을 세운 경계에 자오의 눈꼬리가 살짝 누그러졌다.

“네 질문에 대답해주기 전에 내가 먼저 묻자.”

무엇이든지.

검은 눈이 허락하듯 느리게 깜박였다.

“거기서 뭐 하고 있던 거냐?”

“봄의 전령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동백의 물음에 어둡게 눈을 빛내며 자오는 능청맞은 얼굴로 영문모를 소리를 늘어놓았다.

좋아, 예상했던 답이군.

자오가 순순히 대답해 줄 거라곤 기대조차 하지 않았기에 동백은 차라리 얼굴 위에 희미하게 남은 감정의 파편이라도 읽어볼 요량으로 그의 얼굴을 면밀히 살폈다.

긴 속눈썹이 만들어낸 그늘 아래 반쯤 숨겨진 적갈색 눈동자가 보내는 시선에 자오는 오히려 고개를 조금 들어 그가 제 얼굴을 상세히 볼 수 있도록 들이밀었다.

“못생긴 얼굴 저리 치워.”

“이제 슬슬 익숙해지는 게 좋지 않으실까요?”

“내가 왜?”

“그야 오래 볼 테니까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리될 거라는 믿음이 담긴 말에 동백이 헛웃음을 지었다.

“저랑 내기하실래요?”

어쭈, 내기까지.

“네 말이 맞다면 내가 무조건 지는 내기 아니야?”

자오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숨겨져 있던 날카로운 송곳니가 살짝 드러났다. 순수한 악동 같으면서도 속내를 숨긴 음탕한 짐승이 짓궂게 말했다.

“아! 혹시 질까 봐 겁나십니까?”

“누가!”

“그럼 하셔도 상관없잖아요.”

맞다. 맞는 말이다.

지는 게 겁나지 않으면 내기해도 된다.

그런데 왜 입이 열리지 않을까.

동백이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자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말 인정하기 싫은데 이리 보면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그 아이도 이렇게 웃었던가?

……얄밉게.

동백은 손으로 자오의 얼굴을 쭉 밀어냈다.

“실없는 소리 그만해. 지금은 더 듣고 싶은 말이 있잖아?”

“하긴, 앞으로도 이런 기회는 많을 테니 지금은 그만두겠습니다.”

더 놀리고 싶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하고 자오는 동백이 밀어내는 대로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기묘한 기대가 어린 까만 눈이 순수한 어린아이처럼 반짝였다.

순수하다니.

순간 떠올렸던 제 생각을 되짚으며 동백이 가볍게 웃었다. 그는 손을 뻗어 아직 젖은 자오의 긴 머리칼을 가볍게 쥐었다.

거슬리고, 신경 쓰이고.

다른 요수들처럼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뻔뻔한 낯짝 아래 무엇을 숨겨두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것을 퍼 올리려면 어느 정도는 내어주어야 할 거다.

“나의 이름은 미련이고 후회이며.”

동백이 매끄러운 머리칼을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트렸다.

“또한, 죄책감이라 불러도 좋겠지.”

어때 궁금하니?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살거리는 목소리에 자오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머리카락을 흘려보낸 손은 헐벗은 남자의 어깨를 타고 목울대가 울렁이는 목을 지나쳐 뺨에 당도했다.

“그럼 보여줄게.”

틈만 보이면 동백의 안으로 파고들려 애쓰던 까마귀에게 손수 틈을 내주며, 신선은 손짓했다.

자 오거라.

네가 원하는 것은 여기 있노니.

나의 과거이자, 어쩌면 너의 과거일지 모를 기억을 훔쳐보고 내게도 답을 내어주렴.

작은 기대와 불안을 품고 동백은 눈을 감았다.

바스락-

아주 작은 소리였다.

마른 나뭇가지가 스치며 비벼지는 소리, 끙끙거리는 숨소리와 나지막한 한숨.

기척에 예민한 남자는 아직 동이 트기도 전 이른 새벽에 눈을 떴다.

그가 지내는 작은 집은 있는 솜씨 없는 솜씨를 부려 그가 직접 만든 초가였다. 겨우 바람을 막는 것에 그치는 단칸방 한편엔 주인을 잃은 허름한 이불이 정갈하게 정돈되어 놓여 있었다.

오늘도 인가.

냉골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싸늘한 방 안에서 도화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한순간 충동적으로 데려온 아이라 해도 이리 부려 먹을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어쩐지 자신이 나쁜 놈이 된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하지 말라고 하면 더 불안해하겠지.

그는 흐트러진 의관을 정돈하고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주방에선 그가 잠결에 들었던 작은 소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도화는 발소리와 기척을 죽이고 주방으로 향했다.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웅크린 작은 등이 보였다. 야무지게 부싯돌을 쥔 작은 손이 거듭된 실패에도 멈추지 않고 탁, 탁 다른 돌을 내리쳤다.

그 아래 수북하게 깐 마른 풀엔 작은 연기하나 올라오지 않아도 아이는, 그가 이름을 지어 데려온 동백은 포기할 줄 몰랐다.

“불이란 게 이렇게 피우기 어려운 거였나….”

“세상에 쉬운 건 하나도 없지.”

“―!”

슬슬 손이 아플 것 같아 그만두게 하려고 말을 붙인 건데 이렇게 놀랄 줄은 몰랐다.

들고 있던 부싯돌을 꽉 쥐고 자신을 노려보는 동백의 모습에 도화는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크게 홉뜬 두 눈과 가쁘게 들썩이는 어깨, 꽉 짓눌린 잇새.

잔뜩 겁을 집어먹은 작은 아이.

모를 수가 없었다.

이곳저곳 마을을 떠돌며 숱하게 봐온 표정이었으니까.

“음….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단다.”

최대한 상냥하고 부드럽게 말하려 노력하며 도화는 답답한 목을 가다듬었다.

이렇게 사근사근하게 누군가를 대해보는 건 몹시 오랜만이었다.

세도가의 장자로서 강제로 전쟁에 동원되어 전쟁터에서 구른 지 5년.

우영도, 오호도 승리를 쟁취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끝나버린 전쟁이라도 그 흔적은 이리도 크게 남았다.

도화는 다리를 굽혀 몸을 숙였다. 경계하는 상대에게 적의가 없음을 보이고 손을 내밀어 무기가 없음을 인지시키는 일련의 과정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부싯돌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야.”

그는 부서질 듯 꽉 움켜쥔 돌을 살살 빼내어 가볍게 부딪쳤다.

동백이 자세히 볼 수 있도록 몇 번이고 반복해 불똥이 튀는 모습을 보여준 도화는 자신을 경계하듯 바라보는 동백에게 다시 부싯돌을 건넸다.

“다시 해 볼래?”

쓸모가 없으면 다시 버려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무엇이든 하려 한다면, 도화는 굳이 그것을 막을 생각이 없었다.

구구절절 말로 늘어두어도 신뢰라는 건 그렇게 쉽게 생기는 건 아니니까.

주춤거리며 부싯돌을 받아 탁탁, 부딪히는 어설픈 손놀림에도 도화는 옆에 쪼그려 앉아 인내심 있게 성공하기를 기다려주었다.

해가 뜨지 않아 어스름하게 깔린 어둠이 물러서고 찬란한 빛이 사위를 채워나갈 때까지.

그리고 마침내.

탁!

“…아.”

처음으로 만든 불씨가 피워올리는 연기에 허둥지둥 놀라 어찌할 바 모르고 꺼트려 시무룩해질 때까지도.

잘했다거나 내일은 더 잘할 수 있을 거란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그 말에 작은 부담이라도 동백이 느끼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자신의 눈치를 보는 동백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곤 방으로 돌아와 활과 검을 챙겼다.

충동적이든 계획적이든 동백을 받아들인 이상 그의 책임이었다.

풍족하게 해주진 못하겠지만, 굶주리게 할 생각은 없으니 앞으로는 좀 더 바지런히 사냥하러 다녀야 했다.

마지막으로 검을 점검한 도화가 방을 나서자 여전히 부싯돌을 꽉 움켜쥐고 부엌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던 동백이 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새카만 눈이 보이는 불안에 도화는 굳이 다가서지 않고 싸릿대를 얽어 만든 대문 앞에 서서 큰 소리로 말했다.

“집 근처에는 요수나 요괴를 막는 진법이 설치되어 있으니 혹여 대문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조심하렴.”

그 순간 동백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표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속내에 도화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갇혔다고 생각하는 게 눈에 뻔히 보였다.

“잡아먹을 생각은 없단다.”

“…….”

“그렇다고 부려 먹으려 데려온 것도 아니야.”

“…….”

“진법을 빠져나가는 법은 내일부터 차근히 알려줄 테니 오늘은 푹 쉬란 소리였지.”

좀 더 안심시키는 방법으론 마을로 돌아가는 법을 알려주는 거겠지만, 그걸 알려주지 않은 이유는 유사시 책임을 아이에게 돌리는 방법이라 생각해서다.

동백이 그를 믿지 못해 마을로 돌아갔다.

어쩔 수 없지.

그리 가볍게 넘길 이야기가 아니었다.

앞으로 책임을 지기로 한 이상 도화는 동백의 신뢰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며 미숙한 판단력을 가진 아이를 위해서 최고의 길잡이가 되어주어야 했다.

훗날 약간의 원망을 듣더라도 말이다.

“그럼 다녀오마.”

도화의 인사에도 동백은 여전히 제 선택이 정녕 옳은 선택이었는지 답을 내리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도화는 서두르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