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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56화 (57/61)

56화

타닥, 타닥!

돌이 부딪치는 소리에 도화는 부스스 눈을 떴다. 찬 공기에 뻐근한 관절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러댔다.

“아으으…죽겠다.”

이보다 더한 상황에 한뎃잠을 잔 적도 수도 없이 많은데 조금 몸이 편해졌다고 엄살이 절로 나왔다.

대한(大寒)이 지났으니 곧 입춘(立春)일 텐데 아직도 이리 춥다니.

마지막 심술을 죄다 쏟아내고 갈 요량인지 동장군은 당최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오늘도 인가.

도화는 부엌에서 들리는 부싯돌 부딪치는 소리에 ‘흠.’하고 짧게 목을 울렸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놔두긴 했어도 겨울이 다 가도록 저럴 줄은 몰랐는데.

동백을 데려온 지 이제 한 달이 훌쩍 지났는데도 그들의 관계는 여전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진전이 없느냐.

그건 또 아니다.

“아…, 아저씨….”

머뭇거리는 부름에 도화는 일부러 미적미적 몸을 일으켰다.

이제 동백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물 데워놓았어요.

“물 데워놓았어요.”

거봐라 맞지.

불을 붙일 수 있게 되고 나서부터 동백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쌓인 눈을 퍼와 아침마다 물을 끓였다. 그것도 딱 도화가 세수하고 씻을 수 있을 정도로만.

불편해 미치겠네.

차라리 하지 말라고 속 시원하게 말하고 해결된다면 좋겠는데 결코 그럴 일은 없을 터였다.

불신에 가득 찬 꼬맹이는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었다.

제 입으로 들어가는 고깃덩이와 마른 풀뿌리만큼 도움이 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버려질 거라고 아직도 생각하는 건지.

저 작은 머리통을 직접 열어볼 수 있다면 진작 열어봤을 거다.

답답하긴 해도 조금은 나아졌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수밖에.

도화는 찌뿌드드한 몸을 쭉 늘리며 방을 나섰다.

“잘 잤니?”

고개를 숙이고 몸을 옹송그린 아이는 그동안 잘 거둬 먹인다고 먹였는데도 여전히 작았다. 그래도 홀쭉했던 뺨에 살이 오르고 피부에 조금씩 윤기가 도는 걸 보면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네.”

“춥지는 않았고?”

성인인 자신도 냉골에 온몸이 굳어 아플 정도인데 아직 어린아이인 동백이 혹여 골병들지 않을까 걱정스럽게 묻던 도화는 고분고분하게 언제나 ‘네.’라고 돌아오던 대답이 들리지 않아 작게 웃었다.

빈말로도 안 춥다고는 못 하겠나 보다.

“오늘은 나무를 하러 갈 예정인데….”

“…….”

“도와줄래?”

도화의 제안에 공손히 두 손을 모아 꼼지락거리던 동백의 고개가 작게 끄덕여졌다.

“그럼 옷부터 단단히 입자.”

잠시 눈치를 보듯 쭈뼛거리던 동백은 도화가 씻는 사이 방으로 들어가 작은 짐승의 털가죽을 얼기설기 이어 붙인 긴 장의(長衣)를 걸쳤다.

무두질이 잘 안 되어 뻣뻣한 가죽을 빈틈없이 여민 동백은 녹이 슨 도끼를 챙겨 날랜 걸음으로 도화의 뒤에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신중한 걸음으로 집 주변을 둘러싼 진법을 벗어난 도화는 동백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힐끔 뒤를 살폈다.

영특한 아이는 하나를 알려주면 홀로 열을 터득할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

진법을 벗어나는 방법도 딱 한 번 알려주자 실수도 없이 척척 해내는 걸 보고 어찌나 놀랐던지.

제대로 교육을 받는다면 무관이든 문관이든 대성할 아이이니 추후 사정이 조금 나아진다면 책이라도 구해 볼 생각이었다.

도화는 뛰어난 영재는 아니어도 둔재도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전쟁터에 나서기 전까진 집안의 후계로서 교육을 받아왔던지라 동백의 기초를 잡아주는 것엔 문제가 없었다.

아니면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는 마을 근처로 터전을 옮겨도 좋을 것이다.

생각에 잠겨 빤히 쳐다본 탓인지 시선을 느낀 동백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도화는 냉큼 눈을 돌렸다.

사박, 사박.

약간 얼어붙은 눈을 밟는 소리가 고요한 공간을 채웠다. 허리까지 쌓인 눈을 해치고 걷는 건 성인 남자라 하더라도 꽤 고된 일이었다.

그러나 도화는 느리더라도 꼼꼼히 눈을 최대한 양옆으로 치우며 나아갔다.

자신의 뒤를 따르는 작은 아이를 위해.

도화가 치워둔 길로 제법 수월하게 걷던 동백은 그런 도화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정한 사람.’

감정이 거의 읽히지 않는 새카만 눈동자 위로 작은 빛이 반짝이다 이내 사그라졌다.

“자 여기란다.”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말라죽은 나무가 모인 곳에 도착해 도화는 동백이 소중하게 꼭 쥐고 있던 도끼를 받아들었다.

동백은 제가 들고 온 도끼를 내어주면서도 영 못 미더운 표정이었다. 과연 이 녹슨 도끼날이 제대로 나무를 잘라낼 수 있을지. 의문이 노골적으로 떠오른 얼굴에 도화는 잔웃음이 걸쳐진 얼굴로 도낏자루를 힘주어 잡았다.

도화는 검사다.

지금은 효율적인 사냥을 위해 검보다는 활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검을 다루는 사람이었다.

무거운 검을 휘두르기 위해선 수많은 훈련이 동반되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검을 손에서 놓치지 않는 것이었다.

살과 뼈를 단번에 베어내기 위한 힘과 그런 검을 지탱하는 악력.

퍼억!

가볍게 휘두른 도끼가 움푹 나무를 찍어냈다. 힘든 기색도 없이 나무에 깊게 박힌 도끼를 뽑고 다시 휘두르는 도화를 동백은 휘둥그레 뜬 눈으로 바라봤다.

으드득!

굵은 나무를 단 네 번의 도끼질로 넘어트린 도화는 들고 가기 쉽도록 작은 형태로 잘게 쪼개기 시작했다.

퍽, 퍽!

그가 도끼로 나무를 내리칠 때마다 사방으로 나뭇조각이 우수수 튀었다.

‘차라리 근육이 우락부락했으면 놀라지도 않았을 텐데.’

동백은 잘게 잘린 나무를 주우며 도화를 힐끔거렸다.

살짝 붉어진 뺨과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흰 입김은 그의 곱상한 외모와 합쳐져 신비로워 보였다.

손에 쥔 도끼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무리하지 말고 챙길 수 있을 만큼만 챙기려무나.”

나무를 자르면서도 틈틈이 동백을 향해 걱정 어린 말을 건네는 그의 적갈색 눈동자는 햇볕을 받아 제련한 경건한 붉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아름답다.’

홀린 듯 시선이 따라붙었다. 동백이 품에 가득 안고 있던 나뭇조각을 꽉 움켜쥐었다. 기분이 하늘까지 치솟았다가 단숨에 바닥으로 처박혀 울렁댔다.

작은 아이는 멍하게 서서 움직이는 등을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그런 동백을 이상하게 여긴 도화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이마를 짚을 때까지.

“동백아?”

“…….”

“어디 아픈….”

“아뇨! …괜찮아요.”

차마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동백의 정수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화는 뒷머리를 어색하게 문질렀다.

혹시 아픈 곳이 있다면 솔직히 말해주면 좋겠지만, 아직 그들의 사이가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당분간 유심히 살펴보자.

추운 날씨 탓인지 유독 붉어진 뺨을 손으로 쓱쓱 문질러 온기를 더해준 도화는 도끼와 잘라둔 나무를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동백은 젖은 가죽을 바닥에 펼쳐 말리면서도 연신 도화를 힐끔거렸는데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어찌나 놀라는지 도화가 다 민망할 정도였다.

도화로선 이상한 동백의 행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금은 나아졌나 싶던 관계가 도로 후퇴해 시선도 안 마주치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동백을 그는 망연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왜지?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게 있었나?

스스로 행동을 곱씹어보며 지난 일을 머릿속에서 되살리던 도화는 별다른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끙, 침음을 삼켰다.

마루 위에 벌렁 드러누운 그는 서늘한 봄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분명 낮잠을 자기엔 아직 추운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근래 고민으로 쌓여 피곤한 탓인지 잠이 솔솔 쏟아졌다.

껌벅껌벅 느리게 깜박이던 눈이 결국 짓누르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깊게 감겼다.

이제 봄이라고 해도 아직 겨울의 흔적이 다 가시지 않은 추운 날씨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으슬으슬 떨리는 몸에 도화는 부스스 눈을 떴다.

“아…?”

몸 위에 익숙한 장의가 걸쳐져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동백에게 그가 만들어 준 것이었으니.

“……날 싫어하는 건 아니구나.”

하나뿐인 겉옷이기에 동백은 특히나 이 장의를 애지중지했다. 눈에 젖으면 물기를 닦아 아랫목에 펼쳐 말리고 뻣뻣했던 가죽을 매만져 지금은 퍽 부드러워져 있었다.

“조급해하지 말자.”

싫어하는 게 아니라면 언젠가는 친해질 수 있겠지.

도화는 털가죽에 얼굴을 묻었다.

가죽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그는 희미하게 남은 아이 특유의 보송보송한 체취를 맡고 남몰래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봄은 바쁜 계절이다.

겨우내 숨죽이고 있던 새싹들이 단단히 얼어붙었던 땅을 뚫고 올라와 숨을 트는 계절은 나긋하고 부드러운 바람에 젖어 그냥 흘려보내기엔 아쉬운 날이었다.

도화는 동백을 데리고 산과 들을 오가며 흔히 구할 수 있는 봄나물부터 약초나 독초, 식용으로 헷갈리는 버섯까지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무엇이든 다 알려주었다.

그는 심지어 활을 쏘는 법까지 알려주려 했으나 팽팽한 시위를 동백이 당기지 못해 포기해야만 했다.

“활은 좀 더 나중에 배워야겠구나.”

“…….”

활의 시위를 삐죽한 눈으로 노려보던 동백이 이내 눈꼬리를 축 늘어트렸다.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눈길에 도화는 웅크린 등을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조금 더 팔에 힘이 붙으면 네가 싫다고 해도 알려줄 거니 걱정하지 말렴.”

“…약속.”

“응?”

“약속해요.”

도화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까만 눈을 마주하며 눈꼬리를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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