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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57화 (58/61)

57화

시선도 마주치지 않던 아이는 어느새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당당히 요구한다. 새끼손가락을 마주 걸며 도화는 약속했다.

훗날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를 스스로 당길 수 있게 된다면 꼭 알려주겠노라고.

동백은 무엇이든 빨리 배우니 아마 활을 쏘는 것도 일취월장할 것이다.

새 활을 사주고, 나무를 깎아 과녁을 만들자. 박두(樸頭)로 충분히 연습한 다음 노시(盧矢)로 직접 사냥까지 해 본다면 더 좋겠지.

미래를 그리며 도화는 행복하게 웃었다.

상대를 향한 온건한 애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여린 웃음이었다.

그 후로도 도화는 어딜 가든 동백을 데리고 다녔다. 아침에 일어나 근처 개울로 물을 길으러 나갈 때도, 작은 짐승을 잡기 위해 덫을 놓을 때도 동백은 도화의 뒤를 그림자처럼 쫓았다.

동백의 까만 눈은 항상 도화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동백이 도화가 걷는 발자취를 따라 걷는 사이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흐르고, 계절은 주어진 법칙에 따라 변해갔다.

그들이 함께하고 세 번의 계절의 순환이 지났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서 작열하는 여름으로, 밀밭이 바람에 파도처럼 흔들리는 가을을 지나 다시금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겨울을 맞이한 동백은 이제 약초인 참당귀와 거의 똑같이 생긴 독초인 지리강활을 구별할 줄 알았다.

홀로 집을 나서 도라지를 캐오고 물을 길어오는 것에 익숙해지고, 덫을 놓아 작은 짐승을 잡을 줄 알았다.

한없이 어른스러워지려 노력하던 아이는 이제 굳이 어른스럽게 굴지 않았다.

“아저씨!”

도화가 마을에 다녀온 사이 홀로 집을 지키던 동백이 해맑게 웃으며 돌아온 도화를 반겼다. 도화는 달려온 동백을 안아 크게 한 바퀴 돌며 수염이 올라와 까슬한 턱을 여린 뺨에 문질렀다.

“분명 많이 먹인 것 같은데 왜 아직도 이렇게 가볍지?”

“저도 많이 컸거든요?”

“내 눈엔 아직도 작아 보이는데.”

키가 제법 컸어도 아직 도화의 옆구리에 겨우 닿는 동백이 못마땅하게 뺨을 부풀렸다.

“나중엔 아저씨보다 더 커질 거라고요.”

“그랬으면 좋겠구나.”

동백을 바닥에 내려준 도화는 3년 사이에 많이 변한 집을 새삼스럽게 눈으로 훑었다.

텅텅 비었던 휑한 마당 한쪽엔 작은 텃밭을 만들었고 마루에는 이곳저곳이 파인 나뭇조각과 조각도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뭔가를 만들어보려 애쓰는데 동백은 영리한 머리와는 달리 손재주엔 영 재능이 없는지 벌써 네 번째 나무토막을 깎는 중이었다.

이번에도 딱히 성공작이 나올 것 같진 않지만 말이다.

하긴 뭐든 어떤가. 동백이 손재주가 없다면 자신이 대신해주면 되는 것을.

“그보다 별일 없었니?”

도화의 물음에 동백은 다시 조각도를 집어 들다 고민하듯 고개를 기울였다.

“딱히 없었던 것 같아요.”

“다행이구나.”

동백의 답에 도화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루 끝에 걸터앉았다. 그는 조각도로 나무를 깎는 동백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근래 들어 요수나 요괴의 수가 더 늘어나고 있었다.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도 심심찮게 출몰한다는 소문이 들리니 아무리 진법을 깔아두었어도 동백 홀로 집에 두는 게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또래 친구들과 놀지도 못하니 심심할까 염려도 되고.

고민하던 도화는 조각에 심혈을 기울이는 동백을 조심스레 불렀다.

“…음, 동백아.”

“네, 말씀하세요.”

사각, 사각.

조각도가 나무를 깎아내는 소리가 이어졌다.

“우리 이번 겨울엔 마을에서 지낼까?”

“…….”

“…그냥 의견만 물어보는 거니 편하게 대답해주렴.”

사각.

“…….”

사각, 사각.

역시 싫은가.

도화는 동백의 옆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과 속눈썹 아래 가려진 까만 눈동자는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이야 도화에게 어리광도 부리고 제 나이 때 어린아이 같은 면을 드러내는 동백이지만, 가끔 이렇게 무기질 한 인형같이 굴기도 했다.

특히 마을로 가면 누군가 자신을 쫓기라도 하는 듯 주변을 지나치게 경계하며 불안해하는 걸 알고 난 후부턴 도화 혼자 마을을 오가고 있었다.

싫으면 그냥 싫다고 말하면 될 텐데.

도화는 입을 꾹 다물고 고집스레 나무토막을 노려보는 동백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어쩔 수 없지.”

“…….”

“나랑 단둘이 지내도 심심하지 않다면야.”

“안 심심해요.”

도화의 말이 끝나자마자 냉큼 대답한 동백은 고양이같이 손에 머리를 비비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전 아저씨랑 있는 게 좋아요.”

동백이 보내는 신뢰와 애정에 조금은 착잡하게 미소 지은 도화는 말랑하고 따끈한 뺨을 가볍게 꼬집듯 쥐었다가 놔주었다

“그럼, 겨울 준비를 서둘러야겠구나.”

물이 얼기 전 쓸 물도 바지런히 길어다 놔야 하고, 겨우내 먹을 음식과 걸칠 가죽을 준비해야 했다.

“이번 겨울도 잘 부탁한다.”

“저도요.”

품에 감기듯 파고드는 동백을 마주 안으며 도화는 눈을 감았다.

이대로, 이대로만 이 일상을 누릴 수 있기를 그는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소원이란 이뤄지는 것보다 이뤄지지 않는 게 훨씬 많은 법이라 도화는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날카로운 짐승의 잇새에서 처참하게 으깨진 작은 몸뚱이는 지독한 낙인이 되어 그의 모든 행복을 불살랐다. 비명과 닮은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텅 빈 마을에 메아리쳤다.

아, 나를 이루는 끔찍한 삶이여.

이미 오래전 지나버린 기억을 바라보던 남자는 손을 뻗었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한 채 허공을 움켜쥐었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와락 달려들었다.

단단한 팔과 커다란 손, 넓은 품에 파묻히듯 안긴 동백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뭐야.”

다소 불만스럽고 퉁명스러운 목소리에도 동백을 강하게 끌어안은 자오는 팔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몸을 옥죄어 오는 느낌에 동백은 힘으로 벗어날까 고민하다 그만두었다.

등을 감싼 자오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남자는 그것 외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동백은 망설이다 손을 들어 그런 자오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부드럽게 살살 쓸어내리는 손길은 퍽 다정했다.

표정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자오는 영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어깨가 축축한 것 같기도 하고.

동백은 점점 축축해지는 어깨에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뗐다.

“야, 너 우냐?”

“…….”

“진짜?”

차라리 침을 질질 흘리고 있다고 보는 게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아니면 젖은 머리카락 때문이라던가 하는 희망은 자오의 대꾸에 사라져버렸다.

“…울면요.”

“네가 왜 울어?”

당사자인 나도 안 울었는데.

“감수성이 예민해서요.”

감수성…!

이게 또 개소리하고 있네.

동백은 시큰둥한 낯으로 들러붙은 자오를 억지로 떼어냈다. 자오는 의외로 크게 반항하지 않고 떨어졌는데, 동백은 드러난 자오의 낯을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눈물에 젖은 속눈썹과 붉게 물든 눈가.

그리고 헐벗은 몸뚱이.

그 모든 게 어우러져 몹시 야해 보였다.

뒤늦게 밀려오는 민망함에 동백은 시선을 모로 돌리며 입술을 비죽거렸다.

“옷부터 좀 입어!”

누가 짐승 아니랄까 봐 부끄러움도 모르고!

동백의 핀잔에 자오는 허공을 갈라 그 사이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술법을 이용해 공간을 비틀어 만든 이 작은 틈은 그의 영역 한가운데 위치한 창고로 연결되어 있었다.

자오는 손에 걸리적거리는 물건들을 피해 창고 이곳저곳을 헤집어 댔다. 그가 살아온 세월만큼 쌓인 물건이 워낙 많은지라 한참을 허공에 팔을 집어넣고 이곳저곳을 헤집던 그는 손끝에 걸린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어….”

동백은 자오가 꺼낸 옷을 확인하고 얼떨떨한 소리를 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오가 꺼낸 옷은 누가 봐도 제복이었다. 그의 눈동자처럼 새카만 천 위로 금실로 수를 놓고, 어깨 위의 견장과 그 견장에 다는 망토까지.

그에게 옷이 어울리지 않는단 소린 아니었다. 분명 잘난 얼굴만큼 잘 어울릴 텐데, 이런 형식의 옷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의외였다.

동백의 빤한 시선에 옷을 걸쳐 입던 자오는 옷깃을 매만지며 조금 쑥스럽게 웃었다.

“안 어울립니까?”

그의 질문에 동백의 입술이 비뚜름해졌다.

“내가 뭐라고 대답할 것 같아?”

심술 가득한 동백의 표정에 자오는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금세 답을 내놓았다.

“분명 못생겼다고 하시겠죠.”

“잘 아네.”

빈정대는 동백의 말에 자오는 옅게 웃었다.

못생겼다고 말하면서도 샐쭉한 눈은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렸다. 관심 없는 척 고개를 돌려도 힐끔힐끔 닿는 시선은 못 느끼기가 더 어려웠다.

게 중에서도 ‘대체 저 옷은 왜 가지고 있나.’라고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호기심에 자오는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예전…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하여튼 시간이 꽤 많이 지났다는 건 확실하군요.”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동백은 두 귀를 쫑긋 세웠다.

“홀로 서쪽 끝을 향해 여행을 떠났던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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