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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58화 (59/61)

58화

“서쪽?”

자오가 말하는 서쪽을 곱씹어본 동백은 흠, 하고 목을 울렸다. 그는 옛 우영과 오호의 영토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예전엔 ’동백‘이 혹시 저 머나먼 서쪽 땅에서 다시 태어난 게 아닐까 하는 희망을 지녔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희망 하나로 떠나기엔 서쪽 땅은 멀어도 너무 멀었다. 지금이야 비행기를 타고 하루면 당도하겠지만 그땐 얼마나 걸릴 줄 몰랐으니 말이다.

그러니 서쪽 끝을 향해 여행을 떠났다는 자오의 말은 꽤 솔깃했다.

그래서 어땠는데.

재촉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동백은 여전히 관심 없는 표정을 유지했다.

“두 나라를 오가는 무역로를 따라 무작정 걷기 시작했지요.”

자오는 동백이 머릿속으로 세세하게 그려낼 수 있도록 자신이 보고 기억한 모든 걸 그림을 그리듯 표현했다.

저 멀리 지평선이 보이는 넓은 평원에서 보았던 밤하늘은 은하수가 흘렸다. 그 아름다움은 자오의 유려한 말솜씨로도 풀어내기 벅찰 정도였다.

바다같이 넓은 호수, 풀이 자란 녹지를 거니는 짐승들.

동백은 금방 자오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순진한 소년같이 두 눈이 반짝이는 것에 자오 또한 기쁘게 자신이 품어온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는데, 길을 잘못 들어 사막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사막에 사는 부족을 만나 그들에게 별을 보고 방향을 잡는 법을 배웠지요.”

낮에는 찌는 듯한 더위를 피해 그늘에서 지내고 밤엔 별을 보고 모래 위를 끝없이 걷고 나서야 자오는 비로소 ’서쪽‘이라 불리는 땅에 도착했다.

그가 여행을 떠나기 위해 고향을 떠나온 지 정확히 2년이 지난 후였다.

무역을 위해 오가는 사람들이 있다 보니 자오는 그리 낯설진 않은 이방인이었다.

부리부리한 눈과 큰 코를 가진 사람들은 수려한 자오의 외모에 쉽게 호감을 품었다. 자신들의 땅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가 유창하게 그들의 언어를 쓰고 말하니 더 그랬을지도 몰랐다.

자오는 어디서든 자오였다.

매력적이고 무섭도록 영리한 까마귀는 순식간에 서쪽을 지배하는 지배자들과 친해졌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서쪽의 독특한 존재들과도.

“이건 그때 연회에 초대받아 맞췄던 옷입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무슨, 대공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자오는 도통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어깨를 으쓱이며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자오 레이븐 백작이라고 합니다.”

“어딜 가나 작명은 못했구나.”

“딱히 지을 이름도 없었으니까요.”

유난히 순순한 자오의 대꾸에 동백의 눈썹이 들썩였다.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고 심지어 빈정거리거나 비꼬지도 않는 자오라니.

뭔가 떠오른 걸까.

자신의 기억을 보고 뭔가 떠오른 거라면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지?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음?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쉴까요?”

“…….”

“시장하시다면 룸서비스라도?”

모두 자신이 바라던 말은 아니었기에 동백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오의 묘한 웃음이 걸린 얼굴이 거슬렸다.

“기억하지? 내 첫 번째 질문.”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답은 꼭 드릴 테니.

망설이지 않는 시원스러운 대답에도 동백은 여전히 찝찝함을 느꼈다.

“애옹!”

골목에서 쪼르르 달려 나온 호범이 동백의 발치를 맴돌았다. 누가 봐도 애교 넘치는 고양이다운 행동에 동백은 웃으며 몸을 숙였다.

“잘 지키고 있었어?”

쓰다듬기 위해 손을 뻗자 호범은 손 아래로 파고들어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바스락.

동백이 품에 안고 있던 종이봉투에서 나는 작은 소리에 호범의 두 귀가 쫑긋거렸다.

“앵~”

그런 호범을 충분히 귀여워해 주면서도 동백은 눈을 굴려 주변을 살피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호범을 향해 물었다.

“어둑서니는?”

티격태격하면서도 붙어 다니던 녀석들이 웬일로 떨어져 있는지.

“우웅. 으앵!”

호범이 뭔가를 말하려는 듯 열심히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동백의 귀엔 그저 작은 고양이의 앵앵거림에 지나지 않았다.

태상이라면 알아듣겠지만….

태상과 자오.

두 사람을 동시에 떠올린 동백은 지끈거리는 머리에 관자놀이를 살살 문질렀다.

고시원으로 돌아오는 길.

예매한 버스의 출발 시간을 기다리며 자오는 동백에게 물었다.

’그분과는 어떤 관계이신가요?‘

그분.

동백이 알고 있는 상대 중 자오의 입에서 정중하게 불릴만한 상대라고 해봐야 태상이 유일했다.

이게 또 무슨 꿍꿍이지.

그리 생각했다.

자오는 태상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고, 심지어 창귀와 태상을 한데 엮어 수상히 여기기까지 했으니까.

그러나 자오는 동백의 경계에 솜털같이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채 그럴듯한 답을 돌려줬다.

’선인님은 그저 믿기만 하세요. 의심은 제가 할 테니.‘

조금의 오물도 동백에게 닿지 않도록 먼저 그 오물을 뒤집어쓴 사내는 밝은 빛 아래 있음에도 어둠에 잠겨 음산했다.

그런 자오를 보며 동백은 한참 뜸을 들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친구 사이야.‘

’친구.‘

정말 고작 그런 단어로 지칭될 사이냐는 추궁에 동백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군요. 친구.‘

유독 친구라는 단어에 강세가 느껴진 건 착각일 터다.

그 후 자오는 홀로 생각에 잠겨있었다. 동백이 뒤늦게 어둑서니와 호범에게 줄 그럴듯한 기념품을 사 도시로 돌아오는 버스에 올랐을 때까지도.

그리고 버스에서 내렸을 때, 자오는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괜한 짓을 한 건가.

동백은 종이봉투 안에서 튀긴 어묵을 꺼내 손으로 잘게 잘랐다. 고소한 냄새와 어묵 특유의 비린 냄새에 호범이 두 눈을 반짝이며 입맛을 다셨다.

그런 호범에게 조금씩 어묵을 먹이며 동백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부러 기억까지 들춰 보여줬다.

정말 자오가 자신이 아는 ’동백‘이라면 그 기억을 보고 아는 척하지 않을 수 없을 거라 여겼기 때문에.

가장 소중히 여기고 혹여 빛이 바랠까 몇 번이고 들춰보며 소중히 여겼던 기억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멱살을 붙잡고 흔들며 소리치고 싶었다.

정말 네가 ’동백‘이 아니냐고.

하지만, 그 아이는 죽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처참하게 찢겨 본 모습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고깃덩이가 되어버렸다.

그가 알던 ’동백‘은 이미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다시 태어난 그 아이의 혼백이 잘 지내는지 두 눈으로 보고 싶다는 미련 하나로 땅 위를 헤맸건만, 마주한 진실은 동백을 더 깊은 고민으로 몰아갔다.

정녕 자오가 ’동백‘의 혼백을 지니고 있다면.

자신은 어찌해야 옳은 일인가.

원망과 증오가 한데 모여 만들어진 장산의 창귀를 보면 그 목을 베어 묶여 있던 혼백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게 옳은 일이었다.

그럼 자오는?

그 또한 장산의 창귀처럼 온갖 혼백이 뭉쳐 만들어진 존재일 가능성이 컸다.

그 마을에서 죽은 요수와 사람, 짐승의 혼백이 엉켜 형성된 존재.

그렇다면 자신은 자오를 죽여 ’동백‘을 자유롭게 해주는 게 옳은 일일 것이다.

더 간단하게 생각한다면 자오는 요수다.

그리고 동백은 요수를 증오했다.

그의 검엔 수백수천의 요수의 피가 묻었으며, 지금까지도 그는 요수를 죽이는 사냥꾼이었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죽여버리겠노라 몇 번이나 다짐하지 않았나.

죽여버리겠노라고.

…….

……….

기계적으로 호범에게 어묵을 떼어주던 손이 우뚝 멈췄다.

정말 내가 그럴 수 있다고?

’동백‘을 죽일 수 있다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눈이 음울하게 물들었다.

동백아 내게 답을 줘.

네가 진정 원하는 건 뭘까.

내가 네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제법 커다란 어묵 하나를 먹어 치운 호범을 쓰다듬어 준 동백은 품에 안고 있던 종이봉투를 입에 물려주었다.

“가져가서 어둑서니랑 나눠 먹어.”

“앵!”

꼬리를 바짝 세운 호범이 봉투를 물고 어두운 골목길로 달려가는 것을 바라보던 그는 좁은 고시원의 계단을 올랐다.

“형!”

연습을 끝내고 돌아온 호영이 반색하며 동백을 반겼다.

그 옆에 앉은 남자는 얼굴이 익은 사내였다.

“저…!”

동백과 눈이 마주친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허리를 깊게 숙였다.

“감사합니다!”

갑작스럽게 감사 인사를 받은 동백은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다 자신이 앞으로 책임져야 할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

“안준우….”

“네! 맞습니다! 선생님께서 병원비를 내주셨다고 들었어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름도 모르는 상대가 보이는 호의와 감사에 동백은 씁쓸하게 웃었다.

모두 자신 때문일지도 모르는데 그깟 돈이 뭐라고.

차마 사실대로 말하지 못한 동백은 쓴 입맛을 애써 숨기며 대답했다.

“아뇨.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거기에 안준우의 혼백 행방을 찾는 것까지. 아직 동백이 해야 할 일은 많았다.

“이 은혜는 꼭…”

“안 갚으셔도 됩니다.”

매정할 정도로 단호한 동백의 말에 그는 쩔쩔매다가 이내 단단한 눈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그 정도로 염치없는 놈은 아닙니다.”

“…그-”

“그러고 보니 제 소개도 안 드렸네요.”

남자는 거듭 거절하려는 동백의 말을 재빨리 잘라먹었다.

“전 최치호라고 합니다. 준우 녀석하고는 같은 보육원 출신이에요.”

최치호의 소개에 동백은 왜 그가 안준우에게 그렇게나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는지를 깨달았다.

“사실 그동안 같은 고시원에서 지내면서 이상하게 말 붙이기가 어려웠거든요.”

주윤오처럼 영안을 지녔거나, 자오의 비서인 이명현같이 유독 기가 센 인간이 아니라면 동백이 지닌 힘에서 벗어나긴 힘들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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