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그러나 최치호는 동백의 눈치를 보며 민망한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색한 분위기에 옆에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던 호영은 고시원의 마당발답게 불쑥 끼어들었다.
“치호야, 형은 스물일곱이야.”
응…?
동백은 최치호와 이호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얀 찹쌀떡같이 생긴 호영과 우직하고 선이 굵은 최치호는 누가 봐도 최치호가 연상으로 보였다.
“형, 치호는 스물두 살.”
저런…. 세상의 풍파를 너무 일찍 맞았구나.
동백은 최치호의 손을 가볍게 맞잡았다.
그와 딱히 가까워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옆에서 두 사람을 소개해주고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한 호영을 보니 매정하게 밀어내기도 어려웠다.
“앞으로 형님이라 부르겠습니다.”
“…그래요.”
“제가 더 어린데 편하게 말씀하세요.”
“응, 그래.”
최치호의 손은 무척 거칠었다. 손바닥 가득 박인 굳은살과 오래된 흉터들은 어린 나이임에도 그가 꽤 힘든 삶을 살아왔음을 짐작하게 했다.
게다가 최치호에게선 안준우와 같은 흙먼지 냄새와 매캐한 매연 냄새도 함께 났다. 웃고 있음에도 얼굴에선 감출 수 없는 피로함이 있었다.
평안하길.
그는 진심으로 최치호가 평안하길 빌었다. 안준우와 같은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 동백은 자신으로 인해 무고한 이들이 피해를 입지 않길 바랐다.
동백과 최치호의 인사치레가 끝나자 호영은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쏟아냈다.
“근데 한아 형은? 같이 오는 거 아니였어?”
“왜 그 녀석을 나한테서 찾아?”
“그야, 수상쩍을 정도로 맨날 같이 다니잖아.”
자신이 그렇게까지 자오 녀석과 붙어 다녔나. 생각해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기분이 순식간에 저조해져 동백은 퉁명스레 호영의 말 중 잘못된 부분을 정정해 주었다.
“’같이‘가 아니라 놈이 일방적으로 따라다니는 거야.”
이번 일도 그렇다. 어떻게 그렇게 결정적인 타이밍에 놈이 끼어들 수 있었는지. 아직도 의문이었다.
쓸데없이 다치기나 하고.
자오의 쥐어뜯긴 옆구리를 다시금 떠올린 동백이 짧게 혀를 찼다. 호텔에서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도 여전히 피가 흘렀으니 꽤 오래 몸을 보양해야 할 터다.
고작 찐 옥수수 같은 게 아니라 고기 같은 걸 먹으면서.
“……호영아.”
“응?”
“까마귀놈한테 언제 올 거냐고 연락 좀 해 봐.”
“…형이 하면 되잖아?”
멀쩡한 핸드폰을 두고 왜 자신에게 시키는 줄 모르겠다는 호영의 표정에 동백은 두 눈을 부릅떴다.
“얼른!”
동백의 사나운 재촉에 호영은 투덜거리면서도 핸드폰을 꺼내 손가락을 바지런히 움직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고 가만히 지켜보던 최치호는 비딱하게 선 동백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형님, 그 까마귀라는 분이 저희 고시원에서 지내시는 분인가요?”
“내 옆방 놈.”
고립된 동백과 달리 고시원 사람들과 오며 가며 얼굴과 이름 정돈 두루두루 익히고 있던 최치호는 짤막하게 돌아온 대답에 “아!”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고시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방의 주인은 동백과 더불어 그가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확하게 자오를 기억하고 있었다. 최치호는 어렴풋하게 기억 속에 남은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눈이 번쩍 뜨이게 잘생겼으면서 이상하게 존재감이 흐릿한 사람이었다.
“지나치게 잘생기신 분 맞죠?”
“지나치게 못생긴 놈이 아니고?”
“…….”
“뭔데 그 표정.”
“그 얼굴이 못생겼다고요?”
최치호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같은 남자가 봐도 감탄밖에 안 나오는 얼굴을 두고 말투 하나 안 바뀌고 못생겼다 칭하는 동백을 빤히 쳐다보던 그는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눈앞에 서 있는 동백도 만만찮은 미모의 소유자라는걸.
자기 얼굴을 매일 거울로 볼 테니 심미안에 이상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았다. 최치호의 깨달음과는 다르게 동백은 다시금 자오의 얼굴을 떠올렸다.
사실 동백의 개인적인 평가 기준에서 자오의 점수는 대폭 깎인 부분이 있었다.
바로 그놈이 요수라는 거지.
그것 하나만으로 자오는 동백에겐 못생긴 놈이 되어버렸다. 좋게 봐줄 이유가 전혀 없는 상대이니까.
다만, 첫인상과 다르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변하긴 했다는 걸 동백은 인정했다.
잠깐 개인적인 감정을 내려두고 평가하자면….
“음…. 못생겼다는 건 개인적인 평가고 객관적으로 보면 그냥 그럭저럭 괜찮게 생기긴 했지.”
“그럭저럭….”
“응. 그럭저럭.”
이 정도면 동백의 기준에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평가해 준 거였다. 태상하고 비슷한 느낌이니.
“그게 그럭저럭이면 난….”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한 최치호가 왈칵 울음이 쏟아질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꾹 악물었다.
한 마리의 오징어가 되어 침울해진 최치호와 달리 자오와 연락을 주고받던 호영은 자신이 물어온 소식을 냉큼 동백에게 날랐다.
“형! 한아 형 지금 온다는데?”
“지금 온다고?”
“형이 찾는다고 말했더니 갑자기 온다고 하더라고.”
자신이 찾는다고 바로 온다니….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군.
동백이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놈이 무슨 꿍꿍이를 가졌든 간에 어차피 동백이 하려던 일은 변하지 않았다.
“너희 맛있는 거 먹으러 갈래? 내가 살게.”
동백의 말에 두 사람의 눈이 반짝 빛났다.
“난 좋아!”
“저도 좋습니다.”
두 사람의 대답에 동백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런데 뭐 먹게?”
호영의 질문에 동백은 이미 정해져 있던 메뉴를 말했다.
“고기.”
역시 몸보신엔 고기지.
자오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집을 동백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주 좋아 죽을 거다.
“호영아 하나만 더 부탁하자.”
거절은 받지 않는다는 듯한 단호한 어투에 호영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에 누군가는 가볍게 이름만을 이야기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철학적으로 스스로를 탐구할 것이다.
자오는 그중 후자였다.
그는 긴 세월 동안 쌓아온 자신의 기록을 무심한 눈으로 훑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은 고스란히 그의 영역 가장 중앙에 있는 창고에 쌓였다.
퇴적물이 쌓여 단단한 땅과 산이 만들어지듯 흘러간 시간은 자오라는 인격체를 이뤘다.
이제 그는 쉬이 흔들리지 않았다.
원한과 슬픔, 증오로 이루어진 기백의 혼백과 달리 으스러져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작은 조각.
그리고 그 모든 혼백을 묶어둔 하찮고 나약하기만 하던 짐승의 몸뚱이.
아이러니하게도 그중 그를 가장 크게 집어삼킨 건 미약하기만 한 혼의 조각이었다.
그 작은 조각이 지닌 공허는 그를 지독하게 괴롭혔다. 잃어버린 조각을 찾기 위해 세상을 떠돌았다.
그 와중에 채워지지 않을 욕망을 위해 재물을 모으고 미인을 탐하며 다소 방탕한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모두 다 허사였지만.
자오는 발치에 걸린 보석 알이 굵은 화려한 목걸이를 툭, 건드렸다.
이런 하찮은 것들을 모을 시간에 먼저 동백을 만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왜 지금껏 만나 볼 생각을 하지 못했지?
까마귀는 눈이 시릴 정도로 번쩍거리는 재물 사이를 느리게 걸으며 고심했다.
’혈화‘의 이야기라면 그도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새하얀 눈 위에서 피어난 피로 물든 꽃은 무척이나 아름답고 서늘해서 그 외양만큼 까다롭다고.
마주한 요수 중 단 하나도 살아 나온 적이 없다는 소문을 들었을 땐 흥미 정돈 가졌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
직접 만나고 싶다거나 자신과 연관이 있을 것이란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기도 하지.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유일무이한 존재는 자신을 무척이나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야 그는 살아오는 내내 자신에 대해 고심했을 테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자오는 자신이 무척이나 의심 많고 음흉하며 성격 또한 이리저리 꼬인 썩 좋지 못한 성질의 소유자임을 잘 알았다.
그러니 분명 동백에 관해 확인 정도는 했어야 옳은데.
선경으로 도망친 사회 부적응자들이 이럴 때 하는 말이 흔히 있긴 했다.
“천수(天數)….”
썩 마음에 드는 단어는 아니었다.
사사건건 하늘이 정한 운명이니 뭐니 꼬장꼬장하게 굴며 모든 이유를 합리화시키려는 놈들이 입에 담고 사는 말이었으니.
“재수 없는 놈들.”
자오는 잠시 자신이 선경에 올랐던 순간을 회상했다.
“…역시 재수 없어.”
싱글싱글 웃으며 자신을 반기던 태상의 낯짝을 생각하니 속이 거북했다. 뭐든 제 뜻대로 흘러가리라 여기는 태도도 그렇고 또 하나 거슬리던 게 있었는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차피 깐깐하고 지루한 규칙이 다분한 선경에 머물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그 일로 아주 학을 뗐던 기억이 선명했다.
덕분에 망설임 없이 날개를 잘랐다.
그는 약간 뻐근한 오른쪽 어깨를 왼손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금과 보석, 오래된 책자나 항아리가 수북하게 쌓인 창고 안을 맴돌았다.
동백과 함께 도시로 돌아온 후 동백을 놔두고 이곳으로 온 이유가 있었다.
잠깐 홀로 생각도 정리할 겸, 동백에게 주고 싶은 물건을 찾기 위해서다.
동백이 보여준 기억 속에서 동백은 분명 약속했다.
“활 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지….”
시위조차 당기지 못해 끙끙거리던 자신을 달래며 훗날 꼭 가르쳐주겠노라 약속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