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지금이야 활의 시위를 당기는 건 자오에게 누워서 숨 쉬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아마 과녁을 맞히는 일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는 다소 혼잡한 물건 사이를 헤집으며 거대한 창고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나아갔다.
창고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자오는 광택이 도는 고급스러운 검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커다란 상자 위엔 뽀얀 먼지가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자오는 먼지를 털어내고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살폈다.
보랏빛으로 윤기가 도는 검은색 깃털, 굵고 튼튼한 뼈대, 잘 손질된 검은 가죽 몇 장.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던 날개가 남긴 흔적은 고작 이게 전부였다.
“이 정도도 남은 게 다행이긴 하지만….”
지금 쓰고 있는 투갑을 만들면서 시행착오를 겪어 허무하게 낭비한 부위가 많았다. 재료를 다 쓰기 전에 만들어져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이 정도도 남지 않았으리라.
상자 안의 내용물을 살핀 그는 그중 가장 탄성이 좋은 날개뼈와 가죽 약간, 깃털 전부를 챙겼다.
깃털은 좀 모자라겠어.
오래 방치된 깃털은 특유의 광택을 잃고 푸석해진 것들도 많았다. 사용하는 덴 문제가 없지만, 자오는 이런 것들로 만든 물건을 동백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꼼꼼한 손길로 조금이라도 상한 깃털을 골라내고 나니 남은 깃털이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러나 자오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깃털이야 남은 날개에서 새로 뽑으면 그만 아닌가. 어차피 이젠 쓸모를 잃은 날개인데.
탄성이 좋은 뼈와 가죽으로 활대를 만들고, 머리카락을 엮어 시위를 만들자. 그리고 화살의 깃은 자신의 깃털로 만들어 달면 아주 멋질 것이다.
소모품인 화살은 대단한 재료로 만들기 어렵지만, 깃 정돈 무한히 생산되는 깃털 생산기가 있으니 어렵지 않았다.
투갑을 만들 때보다 경험도 쌓였고 무기에 깃들게 할 술법도 능숙해졌다.
실패할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창고에서 나온 자오는 본격적으로 활을 만들기 위해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었다. 거치적거리는 옷도 단출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막 작업을 시작하려다가 고개를 돌렸다. 핸드폰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음?”
<형! 언제 와요?>
호영의 발랄한 메시지에 자오는 잠시 고민했다.
이 녀석이 왜 자신을 찾지?
그와 호영은 조금 애매한 관계였다. 동백을 주축으로 서로 알고 지내긴 해도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일이 드물었다.
동백의 일이라면 흔쾌히 대화를 나누지만, 서로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그런 관계.
그런데 자신의 거취를 이렇게 찾는다는 건….
“선인님인가.”
시간을 확인한 자오는 버스 터미널에서 고시원까지 걸리는 시간을 대충 계산해 보았다.
슬슬 동백이 고시원에 도착했을 시간대이긴 했다.
<좀 걸릴 것 같은데.>
활을 만드는 데 나흘.
화살을 만드는 데 또 사흘.
도합 일주일 정도 걸릴 거라 예상하던 자오는 이어진 호영의 메시지에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동백 형이 찾아요.>
이호영은 작은 일도 크게 부풀려 말할 수 있는 재능이 있다. 그러니 동백이 자신을 찾는다고 해도 별일 아닐 수도 있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자신을 쫓아내기 바쁘던 그 동백이 찾는다니.
<지금.>
짤막한 자오의 대답에 호영이 연달아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지금 온다고요?>
<맞죠?>
<그럼 동백 형한테 그렇게 전할게요!>
호영의 메시지를 확인한 자오는 다시 옷을 갈아입었다. 질 좋은 천으로 지은 옷은 그의 깃털처럼 은은한 보랏빛 광택이 돌았다.
하나로 대충 묶었던 머리는 다시 풀어 곱게 빗고 비녀로 틀어 올려 자개와 작은 보석으로 장식한 화려한 뒤꽂이를 꽂았다.
마지막으로 허리에 항상 차고 다니는 노리개까지 챙긴 자오는 영역을 벗어나기 직전 다시금 울린 핸드폰을 확인했다.
<형! 고시원 말고 여기서 봐요!>
호영의 메시지와 함께 전달된 주소를 소리 없이 입술로 읊조린 자오는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
<67ㄴ ㅈ토 삼ㄱ탕>
자오는 글자를 알아보기도 힘든 허름한 간판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67년 전통 삼계탕이라니 묘하게 애매한 숫자였다.
보통은 딱 떨어지는 숫자로 하지 않나.
“사람은 많군.”
그는 허름한 가게 내부를 채운 사람들을 눈으로 훑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공들여 차려입은 차림새와는 썩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었지만 자오는 개의치 않았다.
동백의 눈에나 못생겨 보이지 않으면 다행이니까.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를 유려한 발걸음으로 지나친 자오는 자연스럽게 동백이 앉은 테이블 빈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절 찾으셨다고요.”
“내가?”
동백이 시치미를 뚝 떼며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표정만 보면 깜박 속아 넘어갈 만큼 훌륭한 연기력이었으나 자오는 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읽어냈다.
어지간히 거짓말에는 소질이 없는 신선님이다. 저 입에서 진실을 끌어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자오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닌가요?”
모른 척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으니.
“아니거든?”
“그럼 그렇다고 치죠.”
미적지근한 자오의 수긍에 잠시 찜찜한 얼굴이 됐던 동백은 이내 짧게 혀를 찼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나오는 동백의 습관에 자오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낯설면서도 익숙한 남자의 낯을 살폈다.
한 번 본 사람은 절대 잊지 않는 까마귀는 그가 안준우의 친구라는 걸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저분은?”
자오의 목소리는 사근사근했고 정중했다. 그러나 속에 포함된 미묘한 불쾌감을 느낀 최치호는 뒤룩뒤룩 눈을 굴렸다.
가시방석에 앉아도 이보다는 편할 것 같은 분위기에서 동백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치호?”
치호?!
이름을 부르는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호칭에 자오의 웃는 낯이 조금 더 짙어졌다.
몹시 빈정이 상했다.
자신은 지금도 ‘까마귀 놈’이면서 저 인간은 언제부터 봤다고 이름을 불러주는지.
“쟤가 호영이보다 어리더라.”
저 얼굴이?
자오가 이호영과 최치호의 얼굴을 눈으로 훑었다. 이호영은 피부가 하얗고 뺨에도 젖살이 남은 탓인지 뛰어나게 잘생겼다기보단 애교 있고 귀여워 보였다.
그러나 그걸 감안해 생각해도 최치호는 또래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
어차피 인간이야 몇십 년만 지나면 죄다 비슷해지는걸.
그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동백의 주변에 인간이 몇이나 있든 결국 남는 건 자신뿐이다.
시간이 흐르고 저들이 모두 죽어 사라지면 둘이 공유하는 추억으로 입에나 가끔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썩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둘이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건 그만큼 친밀해진다는 거니. 게다가 동백이 슬퍼한다면 그의 옆에서 위로하는 건 자신이 될 터다.
자오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질투는 한시적이지만, 미래를 그리는 계획은 영원하리라.
“그렇군요.”
음흉한 속내를 품은 까마귀의 눈이 부드럽게 풀렸다. 긴 호선을 그리는 눈꼬리가 사르르 접히며 그럴듯한 눈웃음을 자아냈다.
“전 한아라고 합니다. 편히 부르세요. 치호 씨.”
“잘 부탁드립니다. 최치호이고 스물두 살입니다.”
스물둘.
아직 죽으려면 멀었군.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웃는 낯을 유지한 채 자오는 최치호의 남은 수명을 어렴풋이 계산해 보았다.
평안의 신인 동백이 곁에 있으니 죽을병에 걸리지는 않을 테고, 잘 먹고 잘 자고 병원까지 다닌다 치면….
대략 육십 년 정돈가.
더 오래 살 수도 있지만, 사실 그때까지 얼굴을 볼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자오나 동백은 시간의 흐름에선 벗어난 이들이니 눈앞의 인간들이 늙어가는 동안 전혀 변하지 않을 터.
사고로 일찍 죽을 수도 있고.
“인사는 다 했으니 슬슬 주문할까?”
동백이 손을 번쩍 들며 점원을 크게 불렀다. 빨간 앞치마를 맨 중년의 여성은 테이블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물었다.
“4인분 맞으세요?”
“네.”
메뉴판도 없는 식당에서 자연스레 주문을 마친 동백은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작게 흥얼거렸다. 꽤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습에 자오의 눈이 설핏 가늘어졌다.
고시원에서 꽤 거리가 있는 허름한 식당까지 온 이유가 뭔지.
자오의 의문은 생각보다 금방 해소되었다. 작은 뚝배기엔 까만색 피부를 지닌 닭이 먹음직스럽게 담겨 있었다.
“오골계 삼계탕은 여기서만 팔더라고.”
“…….”
“얼른 먹어. 내가 사는 거니.”
동백의 눈이 짓궂게 반짝였다. 기대가 가득한 얼굴을 보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뻔히 보였다.
질색하며 싫어하길 바랐을 것이다.
그래봤자 까마귀도 아니고 깃털이 검은 닭일 뿐인데.
기대에 부응해 줄까 말까.
잠시 고민하던 자오는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를 시작했다. 자신은 동백의 말대로 못돼먹은 요수라 실망하고 툴툴거리는 모습이 더 좋았다.
“맛이 꽤 괜찮군요.”
“오골계라고 해서 맛이 다른 건 아니네.”
“그러게요.”
“칫….”
일부러 동백의 성질을 돋우려 한 말에 이호영과 최치호가 한마디씩 덧붙였다. 일부러 한 건 아니겠지만 타이밍이 꽤 기막혔다.
자오는 심통 난 동백의 얼굴을 감상하며 식사를 마쳤다. 옆구리의 상처를 빨리 회복하려면 당분간 질 좋은 식사를 해야 했는데 꽤 만족스러웠다.
“감사합니다. 선인님.”
“뭐래. 내가 먹고 싶어서 온 거야.”
여전히 툴툴거리며 대답한 동백은 깔끔하게 빈 자오의 그릇을 확인하곤 입가를 작게 씰룩였다.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를 모호한 표정이었다.
“다 먹었으면 가자.”
냉랭하게 말하며 계산 후 가게를 나서는 동백의 뒤를 따르며 자오는 동백이 보여주었던 과거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하나씩 비교해 보았다.
말투와 행동이 좀 거칠어지긴 했어도 전혀 달라진 점이 없었다.
여전히 사려 깊고 자상한 그의 구원.
자신은 동백과 어떤 관계로 남고 싶은 건지.
서로를 정의하는 수많은 단어가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일단은 친구인가.
더 알고 싶다.
더 가까워지고 싶다.
제가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내어줘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선인님.”
“왜?”
심통 맞게 대답하는 뾰로통한 입술도, 샐쭉한 시선도 모두 기꺼웠다. 적어도 자신에게 일말의 관심은 가졌다는 소리이니.
“저 활을 배우고 싶습니다.”
“…….”
“가르쳐 주실래요?”
동백이 자신에게 했던 첫 번째 질문의 답을 자오는 자신의 방식으로 답해주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