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오늘 고마웠어. 어머니께도 감사하다고 전해줘. 담주에 학교 가서 보자!(웃음)]
이불속에서 빼꼼히 손만 내밀어 문자를 보냈다. 잘 전송됐음을 확인하곤 폴더를 닫아 베개 옆으로 던져버렸다.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였더니 졸리다. 차갑던 이불이 체온에 데워지자 나름 포근해 몸이 늘어진다.
선뜻 시험장까지 태워주겠다고 나선 김재식이 고마웠지만, 한편으론 당황스러웠다. 평소 반 친구는 학교에서 헤어지면 그만이지만 이 경우는 다르니까. 자칫 사는 곳이 들통날 수 있다. 다행히 바로 학교에서 만나자고 선수를 쳐서 다행이었다. 결국 마지막엔 상황 모면을 위해 근처 아파트 이름을 대긴 해야 했지만.
지금 사는 곳을 밝히지 않은 것은 주하얀의 마지막 자존심 때문이다. 크게 부유하진 않아도 3인 가족이 단란하게 살 수 있었던 경제 상황이 전복된 것은 주하얀이 막 초등학교 2학년으로 진급할 때였다. 어느 날엔 온 집에 빨간딱지가 붙었고, 또 어느 날엔 이사를 했다. 어린아이에게 어른들의 상황은 어렵기만 했지만 가난만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뚜렷했다. 불현듯 서럽고, 울컥 비참해진다. 만약 가난에게도 형체가 있다면 오물 색의 슬라임일 것이다. 지나온 자리마다 찐덕한 흔적을 남기며 계속해서 엉겨 붙는, 그런.
지잉-
눈을 감고 곤한 숨을 쉬던 주하얀은 울리는 진동에 눈을 떴다. 김재식인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발신인은 이종훈이었다.
[시험 끝났냐?]
아. 그러고 보니 논술 시험이 이번 주말이라고 얘기했던 기억이 있다. 모를 수가 없지. 김재식이 금요일에 떨린다며 온 교실을 다 헤집고 다녔다. 거기에 주하얀은 김재식의 옆구리에 끼어 따라다녀야 했다.
[ㅇㅇ]
[어려웠냐?]
[나름? 그래도 예상한 수준으로 나왔어]
[오 진짜 재수 없다]
[너 심심하냐?]
시답잖은 얘기를 거는 이종훈에게 답장을 보내며 이번 달 남은 문자 사용량을 계산해보았다. 효도폰에 공짜 수준의 요금제를 쓰기 때문에 사용 가능한 문자 개수가 원체 적다. 무엇보다 쓸데없는 얘기에 맞춰 주시엔 심히 피곤했다.
[오 이 새끼 싸가지도 없네]
아 왜 긍까 연락했….
막 자판을 눌러 답문자를 작성하던 주하얀은 불쑥 문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똑똑.
누운 채 고개만 위로 치켜들어 문을 바라보자 다시 소리가 난다.
똑똑.
잠시 잘못 들었나 하던 주하얀은 두 번째에 이르자 자신이 제대로 들었음을 알아채곤 몸을 일으켰다. 무거운 솜이불을 걷어내고 이불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사이 보일러가 돌았는지 방바닥이 미지근하다. “네―” 안에 사람이 있다는 기척을 내며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에 널브러진 신발을 밟고 다가간 주하얀이 문고리를 잡고 문틈에 바짝 붙었다. 오래된 빌라의 문은 두꺼워 집중해야만 밖과의 소통이 가능했다.
“누구세요?”
“혹시 여기 주길우씨 댁 맞나요?”
주하얀은 고개를 갸웃했다.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빠의 이름이다.
“네. 맞는데요.”
“안녕하세요. 저 주길우씨께 전달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전달할 거요?”
“네. 잠시만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잠시만요.”
택배인가. 아니, 아빠는 집으로 무언갈 시킬 만큼 물정에 밝은 사람이 못 된다. 아마 인터넷 접속도 어려워할 것이다. 그럼 뭐지? 받자마자 자신이 먼저 뜯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주하얀은 현관문을 열었다. 철컥. 잠금 풀리는 소리가 묵직하게 들리고 문을 열자 앞에 있는 것은 익숙한 택배 아저씨가 아닌 정장 차림의 남자였다.
“주길우씨 안에 안 계신가요?”
“네. 없어요.”
“그러시구나. 아침 일찍 나가신 건가요?”
주하얀은 저보다 족히 머리 하나는 클 것 같은 남자를 보기 위해 고개를 뻐근히 들어야 했다. 키는 클수록 좋다고 해도 이 정도면 존재만으로 위협적이다. 남자의 얼굴 만면에 뜬 웃음은 시원하게 민 머리나 이마에 진 주름 때문에 잘 눈에 띄지도 않았다. 눈썹 옆으로 있는 긴 흉터가 말을 할 때마다 씰룩인다. 주하얀은 절로 곱은 어깨를 애써 펴며 더듬거렸다.
“아니요. 그렇진 않고….”
“그럼 혹시 언제쯤 들어오실까요?”
짧게 끝날 줄 알았던 대화가 집요해지자 주하얀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상황이, 뭔가….
“아마 며칠 내론 들어오실 거예요. 직접 보셔야 하는 거면 다음에 다시 와주세요.”
아직 문고리를 잡고 있던 주하얀이 다급히 문을 닫으려 팔을 당기자 반쯤 닫히나 싶던 문이 턱! 소리가 나며 멈췄다. 놀라 시선을 내리자 문을 막고 선 구둣발이 보인다. 당황해 고개를 든 주하얀의 앞에 불쑥 흉이 진 얼굴이 가까이 온다.
“힉!”
순간적으로 놀라 주춤 물러난 주하얀이 실수했음을 깨달았을 때는 남자의 손에 도로 문이 활짝 열린 후였다. 이제 훤히 내다보이는 복도엔 흉터 얼굴 외에도 두 명의 남자가 더 있었다. 뒤로 물러나 있던 이들이 다가와서, 주하얀은 뒤늦게야 그들의 존재를 알아챘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 좀 합시다.”
겁을 먹어 굳은 주하얀을 팔로 손쉽게 밀어낸 흉터는 집안으로 침입했다. 순식간에 벽으로 밀려난 주하얀의 옆으로 장정 셋이 지나친다. 집안이 온통 그들의 구둣발 소리로 가득 찼다. 누군가는 좁은 집안을 둘러보았고, 누구는 화장실 문을 열어 안을 살폈다.
“누, 누구세요. 왜 이러세요.”
“일단 안으로 들어와요. 문 닫고. 동네 시끄럽게.”
이젠 숨길 수도 없이 떨리는 목 안쪽을 혀로 꾹 누르며 말했지만 목소리의 끝이 볼품없이 울린다. 침을 꿀꺽 삼켜 겨우 목을 가다듬어도 소용이 없다. 그런 주하얀을 보며 남자는 다른 말을 했다. 살이 미어지는 턱을 까딱여 문을 가리킨 흉터는 그다음엔 제 앞을 눈짓했다.
주하얀은 단번에 그 무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으나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긴 했으나 흉터가 말한 방향은 아니었다. 지금 도망쳐야 해. 삐. 삐. 삐. 머릿속에서 멀미가 날 정도로 신호가 울린다.
출처도 알 수 없는 남자들과 한 공간에 고립되느니 탈출을 택한 주하얀이 조심히 문고리를 쥐었다. 문을 조금씩 닫는 척 머리를 굴렸다. 지금 자신이 뛰쳐나간다면 잡혀 들어올 확률이 얼마나 될까. 낡은 빌라들이 빼곡한 골목을 오간다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에휴.”
막 사고의 끝이 긍정적 결론에 가까워지려는데 앞에서 한숨소리가 들린다. 순간 어깨를 움찔 떤 주하얀이 고개를 들었다. 처음 문을 두드렸던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쭈그려 앉아 서랍장을 뒤지고 있던 흉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언뜻 요즘 어린놈들은 싸가지가 없다거나, 어른 말을 안 들어 처먹는다고 구시렁거리는 것도 같았다.
흉터의 얼굴은 태연했다. 일견 귀찮은 일을 떠안은 사람처럼 조금은 짜증스럽고, 조금은 태만하다. 남자가 다가오는 것을 주하얀은 멀뚱히 바라보았다. 이성은 지금이라도 당장 도망치라고 아우성인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포식자와 눈이 마주친 피식자처럼 몸이 납작 얼어버린다.
“쪼끄만 놈이 머리 굴리고 있네.”
주하얀이 잡은 문고리를 겹쳐 쥔 남자는 손수 문을 닫았다. 철컥. 큰소리를 내며 닫힌 문을 주하얀은 흉터의 시선을 피해 바라보았다. 계단으로나마 들던 햇빛이 사라지고 주황색 싸구려 조명만 남았다.
삽시에 뒷덜미가 잡혔고, 순식간에 바닥에 처박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방을 빙 두른 남자 사이에 덩그러니 쓰러진 채였다.
“아이고 아프겠다. 내가 힘 조절을 잘 못 해. 뭐 어디 부러진 덴 없지? 일어나서 앉아봐. 얘기 좀 하게.”
널브러진 주하얀을 내려보며 어깨를 툭툭 미는 손에 상체를 일으켰다. 바닥을 짚을 때 쓸렸는지 손바닥이 빨갛게 올라왔다. 아픔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손이 떨려 주먹이 잘 쥐어지지 않는다.
“주씨 아들내미는 이름이 뭔가.”
“…주하얀이요.”
“그래. 주길우 오늘 어디 갔는지 알아?”
“아니요. 몰라요.”
“그럼 언제 올진.”
“그것도 몰라요.”
거듭 고개를 젓는 주하얀을 보며 흉터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여봐란듯 한 행동이었으나 이미 겁을 먹은 주하얀에겐 그 작은 움직임도 위협으로 다가왔다. 큰 눈동자가 어지럽게 움직인다.
“저, 정말 몰라요. 집에도 일주일 전에 잠깐 왔었던 게 다예요.”
주하얀은 제발 제 말이 먹히기를 바라며 시야 높이 있는 남자를 올려보았다. 다급하게 덧붙여 변명의 모양새가 되었지만 분명한 사실이었다.
아직 고등학생인 자녀를 둔,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사람은 도통 집안에 붙어있은 적이 없었다. 본래도 한량 기질이 있어 일에 충실하지 못하고 게임장을 기웃거리던 주길우는 할아버지 대부터 운영하던 슈퍼가 망할 무렵 도박판에도 끼어들었다. 당연하게도 빚잔치를 하고 남은 조금의 쌈짓돈은 화투 몇 판에 다 잃어버렸다. 처음엔 일주일에 한두 번 가던 것이 일주일에 절반, 하루 걸러 하루로 간격이 짧아졌고, 이윽고 주길우의 한심한 꼴을 더 보지 못하고 아내가 이혼하자고 나선 후론 집에 들어오는 날이 더 드물어졌다.
보통 일주일에 두 번꼴로 들어와 기절잠만 자고 도로 나서는 주길우는 그나마도 보기 힘들었다. 아침 일찍 나가 해가 진 밤에 귀가하는 주하얀은 개 두었던 이불이 어질러져 있다거나, 다 먹은 라면 찌꺼기가 눌어붙은 양은냄비를 보고 다녀갔음을 짐작하곤 했다.
최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라 하교 후 어질러진 집과 작은 개다리소반에 올려진 현금봉투를 발견했을 뿐 사람은 없었다.
“최근에 뭐 얘기 들은 건 없고?”
“없어요. 학교 다녀오면 이미 들렀다 간 후라 얼굴 본지도 오래됐어요.”
바삐 눈치를 보면서도 주하얀은 빠르게 대답했다. 귀퉁이 나무 조각이 떨어진 장롱을 열어 두툼한 이불을 끄집어내 헤집던 다른 남자가 아무것도 찾지 못하자 나직이 욕을 하며 옆에 쌓여있는 뜯지 않은 수건 세트를 걷어차 넘어뜨렸다. 슈퍼의 물건을 정리할 때 챙겨 온 유통기한이 없는 상품 중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젠데.”
“한… 이 주 전이요. 들어오는 것만 잠깐 봤어요.”
키 작은 서랍장에 엉덩이를 걸터앉은 대장으로 보이는 흉터는 이부자리를 구둣발로 밟아댔다. 주하얀은 그 옆을 뒹구는 자신의 오래된 폴더폰을 곁눈질했다.
대답을 하면서도 속으론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달려들어 핸드폰을 집어 들면 어디 도움이라도 요청할 수 있을까. 아니면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치는 건. 지은 지 오래된 탓에 방음이 형편없어 누군가는 들을지도 모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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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Dear my security)
잔희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