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하아…….”
이제 와 의미 없는 서류를 옆으로 치워버리고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웠다. 당장 손에 닿는 것들만도 한가득이다.
평소와 같이 고요한 반지하에 홀로 남으니 모든 일이 꿈같다. 사실 애진작에 잠이 들어 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아마 어질러진 방 안이 아니었다면 지나친 비현실성에 주하얀도 자신이 개꿈을 꿨다 치부했을지도 모른다.
분명 오전엔 멀리까지 가 대입시험을 치렀다. 그 후엔 어색한 반 친구의 부모님 차를 얻어 타 집에 돌아왔다. 달랑 두 개 쓴 원서 중 마지막 논술시험이었으니, 수능을 치르고 놀기 바쁜 이종훈을 보며 손가락만 빨던 인내의 끝이었다. 조금은 얼떨떨했지만, 많이 홀가분했다. 청소년기에 주어지는 유일한 과제를 마쳤으니 이제 자신도 조금은 쉴 수 있지 않을까, 여느 열아홉 살처럼 아무 근심도 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킁.”
주하얀은 찡하게 매워오는 코를 들이켰다.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에 소매로 눈을 문질렀다. 그마저도 눈가가 헐어 시원하게 문질러 닦지도 못했다.
무릎걸음으로 바닥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주웠다. 떨어진 서랍을 다시 꽂아놓고, 발에 차여 멀리 날아간 수건을 한편에 쌓아두었다. 물건 사이사이 떨어진 동전은 작은 액세서리 케이스에 넣어 서랍장에 두었다. 장을 볼 때마다 남은 거스름돈을 모아둔 것이었다.
“흐으, 큽…. 흐.”
눈물로 볼이 척척하게 젖어든다. 주하얀은 물기로 번들거리고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굳이 닦아내지 않았다. 자꾸만 눈의 초점이 나가 물건을 짚으려는 게 바닥만 만져대길 벌써 세 번째. 대충 큰 물건을 치운 주하얀은 이불에 덮여있던 핸드폰을 찾아냈다.
[자냐?]
주하얀이 답장이 없자 보낸 건지 이종훈의 문자가 와있다. 다른 연락은 없었다. 탁 소리가 나도록 폴더를 닫은 주하얀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이불을 들었다. 자꾸만 달리는 숨에 어깨를 들썩이며 제법 무게가 나가는 것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아까 전 마구잡이로 비벼 껐던 담배가 생각나서였다.
“씨이.”
두툼한 솜이불의 위쪽, 하필 자수가 화려하게 들어간 정중앙에 뚫린 자국이 생겼다. 주하얀이 좋아해 매일 덮고 자는 이불이다. 주위론 검게 탄 실이 엉겨 붙어 버렸다.
“빵꾸, 흐, 빵꾸 났잖아.”
엄지로 자국 위를 문질러봤으나 검댕이만 묻어날 뿐 구멍이 메워진다거나, 탄 자국이 없어지는 일은 없었다. 침이 쩍쩍 달라붙는 입을 헤 벌리고 울던 주하얀은 그만 이불로 엎어졌다.
밟히고 채여 더러운 것 따위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주하얀은 그냥 서러울 뿐이다.
“왜 나한테 그래. 내가 빌린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왜. 왜 때려 왜. 뭔데 날 때려! 으아아……. 흐, 아아.”
다섯 살 아이처럼 엉엉 우는 소리가 이불에 가로막혀 좁은 방만 맴돈다. 억울하다. 속이 받쳐 머리가 다 뜨끈해질 정도로 억울하다. 왜 인생은 자신에게만 이 모양일까. 주하얀을 세상에 만들어놓은 사람, 주하얀의 짧은 일생을 개같이 만든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에 열이 받는다. 결국 모든 뒷감당은 주하얀의 몫이다.
가난이 대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창문으로 도망간다. 가난이 그 비대한 몸뚱이를 구겨 대문으로 비집고 들자마자 사랑은 단숨에 치이고 밀려 뒷방 열린 창문으로 달아나버렸다. 찬 바람만 거실을 웽웽 돌 적에 제 옆에 남은 건 가난뿐이었다. 도리 없이 냉하게 식은 품에 가난이라도 안아보려 했으나 부대끼는 열은커녕 속을 허하게 앗아가기만 했다.
“흡…. 윽.”
분을 못 이겨 이불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푹신한 이불이 밀가루 반죽처럼 감겨 아프진 않았다. 눈물과 콧물, 침으로 이불이 축축해지고 얼굴을 파묻은 통에 점차 숨이 달릴 때쯤 물먹은 소리를 내며 이마를 비비던 더러운 이불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손에 바락 힘을 주자 이불 천이 부스럭 소리를 내며 구겨진다.
‘도망치자.’
지금 이 순간 드는 생각은 그게 유일했다.
‘아직은 도망갈 수 있어.’
빚을 진 당사자도 간 도망이라면 자신이라고 못 갈 것 없다. 길 잃은 빚이 덩그러니 남겠지만 그건 제 알 바가 아니었다.
주하얀은 주춤거리며 무릎을 세웠다. 머리가 빨리 돌았다. 도망가려면 지금뿐이다. 사채꾼들은 이미 한바탕 하고 갔으니 오늘 안으론 다시 오지 않을 테다. 언제고 들이닥쳐 자신을 몰아넣고 집을 엉망으로 만드는 꼴을 다시 볼 마음은 전혀 없었다. 자신이 지지도 않은 빚에 대한 책임을 떠넘기다니. 게다가 주하얀은 아직 학생이다. 아직 죽지도 않은 채무자의 빚이 미성년자 딱지도 못 뗀 자식에게 내려오다니. 빚이고 사채고, 아는 게 없는 주하얀이 보기에도 말이 안 됐다.
“어디로 가지. 어디로.”
집에 낡아빠진 컴퓨터 한 대 없는 게 이렇게 원망스럽긴 처음이다. 가난은 언제나 주하얀의 발목을 잡는다. 급한 대로 머릿속으로 동네를 그려보았다. 가까운 시외버스터미널이라면 몇 번 가본 적이 있다. 버스 번호는 가물가물했지만 정류장에 붙어있는 노선도를 보면 알 수 있으리라.
먼 곳으로 가야 했다. 사채꾼들이 귀찮게 뒤져야만 찾을 수 있는 곳으로. 그렇다고 너무 멀어도 안 된다.
“젠장.”
주하얀은 잇자국이 남은 볼 안쪽 살을 깨물었다. 아직 벗지 못한 교복이 이렇게 갑갑한 적이 없었다. 일주일만 도망가 있자. 아니 사흘……. 어차피 사채꾼들은 주하얀이 어떤 학교에 다니는지도 모른다. 학교와 이 곳간도 거리가 있으니 잘 피하면 걸리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적당한 장소를 정하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갖 지저분한 것이 말라붙어 끈적이는 얼굴은 물로 닦아냈다. 눈과 코가 빨갛다. 찬물을 끼얹어 볼까지 발개진 얼굴을 세면대에 달린 작은 거울로 확인한 주하얀은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훔쳤다.
“하나, 둘, 셋, 넷…….”
우선 집안 곳곳에 숨겨두었던 통장을 끄집어냈다. 장롱 뒤나 싱크대 아래 틈에 숨겨둔 것들을 꺼내는 동안 주하얀은 작은 소리만 나도 흠칫 놀라 현관을 쳐다보았다.
네 개의 통장을 모두 챙기곤 책가방을 뒤집어 안을 비웠다. 물건들이 쏟아져 내렸다. 입시 논술 책이 무겁게 떨어져 마구잡이로 구겨졌지만 아깝진 않았다. 제일 먼저 통장을 넣고 그 위로 당장 필요한 것들로만 가방을 다시 꾸렸다. 당장 쓸 거. 당장 쓸 거. 주문처럼 되뇌며 짐을 싸자 생각보다 무게는 가벼웠다. 이곳에서 3년을 넘게 살았건만 짐은 겨우 책가방 하나를 다 못 채운다.
애초에 내 집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이전에 살던 집에선 고작 반년에서 일 년을 넘기지 못했음을 생각하면 긴 시간이었지만, 그저 제 한 몸 뉘일 수 있음에 감사했을 뿐. 이젠 그마저도 잃게 생겼으나, 괜찮다. 어차피 저나 집이나 버려진 신세가 되니 감상에 젖지도 않았다.
마지막으론 집을 뒤져 애써 정리했던 물건들을 다 끄집어냈다. 혹시 몰라 주하얀이 다니는 학교나 주변인을 특정할 수 있는 물건들은 귀퉁이를 찢거나 칠해두자 집안은 도둑맞은 것처럼 난장판이었다.
“터미널. 터미널 가는 버스가….”
집에서 제일 가까운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벽에 붙은 노선표부터 확인했다. 모든 노선을 두 번씩 읽어보았으나 시외버스터미널이 적힌 것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일단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이라면 버스도 많을 것. 작은 마을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주하얀은 불안스레 창밖을 내다보았다.
시내에 도착해 드디어 시외버스터미널을 들르는 버스 번호를 찾아낸 그때까지 주하얀은 자신이 강박적으로 혼잣말을 하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심장이 두방망이질 친다.
이번 정류장은 시외버스터미널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꼬박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조급증이 돋아 빨리 동네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앞섰지만, 택시를 타기엔 한 푼이 아까워 얌전히 버스를 타려니 시간이 배로 걸렸다.
“승차권 4,200원입니다. 4,200원 받았습니다.”
주하얀은 손에 쥐고 있어 뜨끈해진 동전과 꼬깃한 지폐를 다림질하듯 펴 내밀었다. 구질구질한 꼴이 불편한지 눈가를 움찔이며 돈을 받은 직원은 곧 매표소의 좁은 구멍으로 손바닥만 한 종이를 내밀었다. 빳빳한 쪼가리 버스표였다.
주하얀은 매표소에서 돌아서며 주위를 살폈다. 도착지는 차로 1시간 반을 가야 하는 도시로 정했다. 당장 출발을 앞둔 차편 중 제일 소요시간이 긴 것이었다. 오래 갈수록 더 먼 곳으로 간다. 나름 합리적인 추론이다.
끼긱-
지어진 지 오래된 터미널 대합실의 초록색 의자는 무게가 실릴 때마다 기분 나쁜 쇳소리를 냈다. 편히 앉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썩일 때마다 째지는 소리를 내는 통에 옆에서 신문 읽는 아저씨의 눈총을 받았다. 물론 그런 시선 따위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주하얀은 무감하게 정면의 티브이를 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꾸만 뒤쪽의 시계를 돌아보았다.
16:00
이십 분 후 출발.
터미널 내에 별도로 전광판이 있지 않아 수시로 유리문 밖 승차장과 표를 번갈아 확인했다. 애석하게도 앉은자리에서는 표에 적힌 플랫폼이 보이지 않아 목을 주욱 빼야 했다. 혹시 놓치기라도 할세라 마음이 불안해져 자꾸 시계를 확인했다.
결국 1분도 지나지 않은 사이 시계를 세 번이나 돌아보고서야 주하얀은 차라리 밖에 나가 기다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좌불안석으로 뻐기느니 추워도 눈앞에 두는 게 속이 편할 것 같았다.
16:10
십분 후 출발.
옆자리에 올려두었던 가방을 무릎 위로 끌어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곤 다시 가방 앞주머니에 고이 집어넣은 후, 등에 가방을 걸쳤다.
두꺼운 패딩 위로 가방을 매려 상체를 숙인 주하얀은 귀를 세웠다. 시야가 좁아짐에 따른 본능적 행동이었다. 주말 오후 터미널의 소음이 쏟아진다. 두 줄 앞 대각선에 앉은 중년의 큰 통화 소리나 매표소의 마이크 소리, 타일 바닥에 부딪히는 발자국 소리. 그리고 낡은 쇳소리.
우상 시외버스터미널은 지어진 지 오래됐다. 모든 집기는 낡아 녹이 슬었고, 특히 대합실 초록 의자는 조금만 무게가 실려도 찢어지는 쇳소리를 냈다. 아주 가까이서 들을 때면 귀가 다 아플 정도로.
끼긱―
마치 지금처럼.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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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Dear my security)
잔희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