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춥다아.”
시간은 열 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대다수 사무실은 문을 닫아 거리가 어둡다. 이따금 옆으로 자동차만 지나치는 거리를 혼자 걷는 건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 아직 히터 기운이 다 빠지지 않아 몸은 따듯한 채로 찬 공기를 들이마시니 상쾌하기까지 했다.
잠시 이대로 바람을 쐬며 걸어갈까 생각하던 주하얀은 곧 고개를 저으며 발을 버스정류장으로 돌렸다. 버스를 타도 20분이 드는 거리는 걸어가자면 한 시간은 족히 걸렸다. 모험을 하기엔 날이 안 좋다. 괜히 청승을 떤다는 생각도 떨칠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타며 인사를 건네는 기사님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버스 안은 한산했다. 여유로운 자리 중 타이어 위 창가 자리에 앉은 주하얀은 무릎을 굽혀 몸을 말았다.
습관처럼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면 이종훈의 문자가 하나 와있다. 놀자는 부름을 무시하고 기어이 알바를 간 주하얀에 대한 푸념이었다. 친화력이 좋은 이종훈이라면 주하얀이 있든 없든 잘 놀았을 거면서 괜히 저런다. 옅게 웃음을 흘리곤 내일 점심 전에 만나자는 답장을 보냈다. 그 후로 문자함이나 전화 목록을 뒤져보았으나 다른 연락은 없다. 잠시 더 핸드폰을 만지작대던 주하얀은 곧 그것을 주머니에 넣었다.
통, 통, 통.
버스가 흔들리며 창에 기댄 머리가 자꾸만 유리에 부딪힌다. 피곤하다. 주하얀은 가물한 눈을 감았다.
오전엔 학교, 밤엔 아르바이트. 고단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불행의 시기가 수능이 끝난 다음이라는 것이다. 하다못해 이 주 전만 되었어도 매여있는 신분과 환경에 속절없이 흔들리기만 했을 게 뻔하다.
그런 점에선 나름의 고려를 해준 건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제가 봐도 우스워 헛웃음을 흘렸다. 자식 버리고 도망가면서 배려라니. 아무리 제 꼴이 아쉬워도 위안 삼아 변명해줄 사람이 아니다.
삐빅-
창으로 스미는 한기와 더운 히터 바람으로 정신이 노곤해질 즈음 버스를 내린 주하얀은 버스정류장 뒤쪽 좁은 길로 향했다. 오래된 빌라가 옹기종기 모인 골목을 오르며 하늘을 올려보았다. 별 하나 없이 까맣기만 하다. 숨을 길게 내뱉어 입김으로 담배연기를 흉내 내다 띄엄띄엄 주황색 불빛을 내는 가로등을 끼고돌았다.
“킁, 크흥.”
추위에 찡해진 코를 훌쩍이며 주하얀은 코앞에 도착한 빌라로 뛰어 들어갔다. 유리문 한 겹일 뿐이지만 골목의 바람을 막아주기엔 충분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 본 다른 집 우편함에 두툼하게 우편물이 꽂혀있다. 주하얀은 저도 모르게 떠오르는 공과금 영수증이나 핸드폰 요금 내역서 따위를 애써 털어냈다. 일단 등록금 하려고 모아뒀던 돈으로 충당하고 다음 달 월급이 나오면 메워야 할 성싶었다.
요 며칠 빌라 출입구에 있는 전구가 나갔는지 사람이 지나다녀도 빛은 감감무소식이다. 까맣기만 한 시야를 더듬어 계단을 내려가자면 꼭 자신의 처지처럼 위태롭고 어둡다. 주하얀은 걸음마다 주의를 기울여 조심히 발을 디뎠다.
철컥.
주머니에서 내내 짤랑거리던 열쇠로 현관문을 열었다. 피로에 전 어깨가 절로 늘어진다. 비록 온전한 제 집은 아니지만, 익숙한 공간이 주는 안도감이라는 게 있다. 어쩌면 집 자체의 안식보다는 하루를 무사히 버텼다는 안심일지도 모르겠다.
이대로 현관에 쓰러져 누워 자고 싶다. 마음만은 벌써 등이 굽도록 바닥으로 몸을 숙였다. 등교 전 보일러를 외출로 틀어두었으니 춥다 해도 견딜 만할 것이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태세로 막 신발을 벗어 방 안으로 발을 내디딘 주하얀은 양말 밑으로 전해지는 온기에 순간 주춤했다.
“어?”
바닥은 후끈하다 싶을 정도로 따뜻했다. 실수로 보일러를 외출모드로 돌려놓지 않았나. 오늘 아침을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그럴 리가 없다.
“따듯하네….”
의문스러움에 움직임이 굼뜨다. 손 본지 오래돼 깜빡깜빡하는 현관 조명이 뒤늦게 켜졌다.
주하얀은 고개를 들었다. 현관이라는 말이 무색하도록 공간이 분리되지 않은 원룸은 작은 빛으로도 속이 훤히 보일 만큼 형편없다.
“……?”
빛은 쉽게 집 안을 침투했다. 현관 오른쪽의 화장실 문이라거나, 휑하니 비어있는 부엌. 그리고 아침에 미처 정리하지 못해 어질러진 방, 그 중앙의 인영 같은….
“악!”
순간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난 주하얀은 발에 스미는 냉기에 무의식적으로 아래를 내려보았다. 다시 현관까지 내려온 발 옆에 못 보던 검은색 구두가 있었다. 아무리 어두워도 못 봤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반짝이는.
주하얀은 긴장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집 안에 누가 있다. 집 안에.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심장이 크게 뛰어 갈비뼈를 아프도록 두드린다.
“아빠?”
일단 가장 가능성 있는 호칭을 불렀다.
하지만 곧바로 인영의 주인이 아빠가 아님을 알아챘다. 흐린 빛 아래 보이는 사람의 옷차림이 낯설다. 끝이 바닥에 닿은 코트와 빳빳한 바지, 그 위를 짚은 핏줄이 선 손등.
주하얀은 문득 최근에 만났던 사람을 기억해냈다.
“아드님. 왜 이렇게 늦게 다녀.”
어둠에 싸인 인영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자 드디어 얼굴이 빛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은 주황색 불빛 아래에서도 돋보였다. 눈썹 산 아래로 음영이 져 눈이 분명히 보이지 않았으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건 알겠다. 어둠 속에서 눈이 마주친다.
주인 없는 집의 침입자, 신이혁은 오늘도 웃는 낯을 했다.
“…안녕하세요.”
“안녕.”
오랫동안 침묵했는지 목소리가 꺼끌하다. 그가 언젭터 이 집에 있었던 건지 가늠도 못 하겠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기 위해 바삐 눈을 굴리는데 별안간 현관 센서등이 꺼졌다. 당황한 주하얀이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갑자기 환해진 실내에 눈이 따가운지 눈썹 부근을 짚은 신이혁의 눈이 곧 주하얀에게 돌아온다. 찌뿌둥하게 구겨졌던 눈가가 얼핏 누그러진다.
“뭐야. 눈사람이야?”
뜬금없는 지적에 주하얀은 제 빵빵한 패딩 위를 손으로 더듬었다. 한겨울의 추위는 매섭다. 특히나 안락한 환경을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에겐 더. 보온성만 생각해 겉옷을 겹겹이 입었더니 몸이 본래보다 비대했다.
“난 또 하도 안 오길래, 아드님도 나랑 숨바꼭질하자는 줄 알았네.”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시답잖은 농담처럼 흘리는 말에 딱히 할 대꾸가 생각나지 않아 궁금한 것을 물었다. 겁먹은 목소리가 자꾸만 사그라든다.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 같던 피곤은 사라지고 등이 빳빳해지는 긴장만 남았다.
“어떻게 들어오긴. 그냥 문 열고 들어왔는데.”
신이혁은 대단한 의지가 없단 걸 보여주려는지 방만하게 몸을 늘어뜨렸다. 편한 소파 하나 없는 탓에 서랍장에 등을 기댄 것뿐이었으나 그의 태도를 나타내기엔 충분했다.
다시 찾아오겠다고 했으니 일주일 내내 그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만나게 되다니. 낡은 빌라 문은 열쇠라서 스페어 키가 있지 않은 이상….
방으로 들어오고도 더 다가오지 못하고 멈춰 선 주하얀을 보고 신이혁이 입을 열었다.
“왜 거기 서 있어.”
딱히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말없이 눈치만 살피는 주하얀을 바라보던 신이혁은 알아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담보 확인 차원 이랬잖아. 어디로 내빼지만 않으면 딱히 터치할 생각은 없어. 그렇게 일일이 겁먹기도 피곤하겠다.”
“…….”
“미리 말까지 해줬는데 뭐가 무섭지? 혹시 따로 계획 있어?”
신이혁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물으면 주하얀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불안하게 가방끈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첫 만남이 그랬으니 이해는 하겠는데, 익숙해져 보자고 서로.”
“…….”
“대답해야지. 아드님.”
신이혁은 천천히,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분명히 말했다. 특별히 친절한 말투는 아니었으나 주하얀을 신경 쓴 모양새다.
이번엔 다른 의미로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꾸 없는 상대에 고개를 든 신이혁과 눈이 마주쳤다.
주하얀은 그제야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는 내내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던 신이혁이 작게 웃음을 흘린다.
“그래. 들어와.”
고개를 까딱이며 하는 말에 주하얀은 굼뜨게 발을 옮겼다. 그의 말을 들으니 더 뭉개고 서 있기도 애매했다. 당장 도망치고 싶은 위협감에서 벗어났다 뿐이지, 신이혁을 향한 신경마저 느슨해진 건 아니다. 한 번 더 신이혁을 힐끗 살피며 옷장 앞으로 다가섰다.
어색함을 견디며 겉옷을 벗었다. 구색만 갖춘 얇은 패딩과 후드 집업을 벗고 불편한 교복 재킷까지 어깨 뒤로 넘겼다.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신이혁의 시선은 주하얀의 가슴팍에 꽂혀있었다.
“주하얀.”
교복 조끼에 달린 이름표를 빤히 본 신이혁이 따라 하듯 발음했다.
“네.”
딱히 할 말이 있어 부른 건 아닌지 잠시 기다려도 돌아오는 답이 없다. 다시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을 동안 신이혁은 그저 아까의 자세 그대로 주하얀을 보고 있었다. 이따금 시선이 마주치면 미세하게 눈을 접어 웃는 얼굴을 해 보인다.
신이혁은 주하얀이 겉옷을 벗고 뒤를 돌았을 때야 입을 열었다.
“최근에 주길우 씨 만난 적 있어?”
“네?”
“혹시 그새 다녀갔나 해서.”
아빠가 집에 돌아오길 제일 바라는 건 자신이다. 주하얀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아는 한은 없어요. 아, 혹시 아까 아빠라고 말한 것 때문이면…. 집 열쇠를 가진 사람이 아빠밖에 없어서 그런 거예요. 다른 사람일 거라고 생각을 못 해서….”
비록 이젠 신이혁도 가지게 되었지만. 이러다 집 열쇠가 공공재가 될까 무섭다.
답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나 싶던 신이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따져봐도 그럴듯하게 들렸나 보다. 어쩌면 의례상 한번 물어본 것뿐일지도 모르겠다.
그 주제를 치워둔 신이혁은 이번엔 다른 말을 했다.
“항상 이렇게 귀가가 늦은 편인가? 꽤 오래 기다렸는데.”
이번엔 딱히 할 말이 없다.
“죄송합니다….”
“밥은.”
“네?”
“밥. 먹었냐고.”
“아, 아니요.”
뜬금없는 물음이다. 맥락 없는 말에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질문을 확인하고서야 고개를 뒤로 뺐다. 카페에서 음료를 한 잔 만들어 먹었지만 식사는 아니었다.
어깨를 웅크리는 주하얀을 본 신이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누웠던 자리 옆에 놓인 종이가방을 끌어왔다. 검은색 봉투엔 한자가 크게 박혀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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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Dear my security)
잔희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