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주하얀은 막 카운터로 다가온 손님에게로 몸을 숙이며 말했다.
“손님. 죄송하지만 저희 곧 홀 마감인데 괜찮으세요?”
“음…. 네. 그럼 가져갈게요.”
“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음료와 머핀 주문을 받고, 계산을 마친 후 바로 뒤를 돌았다. 마감 중이라 어수선한 싱크대를 헤집어 커피를 내리고 빵을 데웠다. 손님에게 포장한 음식을 건넨 주하얀은 한 테이블을 빼고 비어있는 홀을 둘러보았다. 오늘은 손님이 밀리는 일 없이 간격이 있어 일하기 수월한 날이다.
“으으.”
계속 서 있던 탓에 아픈 다리를 접었다 펴며 계산대 옆에 있는 커피 머신 앞에 섰다.
주하얀은 고민에 빠졌다.
“어쩌지….”
음료를 만들어 가져갈지, 말지.
하루 종일, 사실은 이종훈의 말을 들은 후부터 갈팡질팡하느라 오히려 결단이 더 힘들어져 버렸다.
자신의 텀블러에 얼음을 담아놓고도 결정을 못 내려 주하얀은 차츰 녹아내리는 얼음을 흔들었다. 얼음과 물이 섞여 소음을 만든다.
달그락달그락―
이종훈의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땐 자신이 신이혁에게 뭘 해줄 수 있을까 싶었다. 어느 것이든 자신보다 더 많이 가졌으며, 더 많이 경험한 사람일 텐데. 그렇다고 비싼 걸 사주자니 지갑이 얄팍해 사실상 불가능했다.
커피를 생각해낸 건 일종의 계책이었다. 매번 방문 전 식사를 하고 오는 신이혁이었기에 흐름도 괜찮고, 카페에서 커피는 원하는 대로 마시라고 했으니 경제적으로 부담도 없었다.
선물을 하는 와중에도 돈을 따지는 자신이 못나 보여 머쓱했지만 자신의 상황을 이유로 들어 생각을 떨쳐냈다. 한 번 정도는 괜찮겠지. 떨떠름한 합리화였다.
“커피 좋아하시겠지.”
어른들은 다들 생명수처럼 커피를 마시곤 하니까. 기본적으로 커피와 친하지 않을뿐더러, 마셔봐야 싸구려 믹스커피가 다인 주하얀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근데 오늘 안 올지도 모르는데….”
자고로 도움을 받았으면 보답할 줄 아는 게 어른스러움이라는 마음으로 다잡아도 자꾸만 괜히 민망해진다. 근무 중 마실 수 있는 공짜 음료도 마다하고 지금까지 버텼건만 막상 퇴근을 앞두니 손이 가지 않는다.
주하얀의 말을 기분 나빠하면 어떡하지. 채권, 채무자가 서로 밥을 사주고 커피를 챙겨준다는 그림도 이상하다.
자꾸만 용기를 잃고 쪼그라드는 마음에 커피 머신을 만지작거리던 주하얀은 마감을 다 했냐는 다른 직원의 말에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커피 머신만 하면 돼요. 제가 할게요!”
고민은 결정을 어렵게 할 뿐이다.
작게 침음 한 주하얀은 결심한 듯이 테이블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녹아 물이 생긴 얼음도 싱크대에 따라버리고, 원두 그라인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제발, 오늘 그가 집에 찾아오지 않기를.
* * *
머리를 정갈하게 묶은 종업원의 손이 테이블을 바삐 오간다. 신이혁은 잔머리 하나 없이 정리한 머리를 바라보았다. 딱히 의도를 가진 시선은 아니었고, 잠시 눈을 쉬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장이라도 하던 말을 잇고 싶어 입을 들썩이는 상대를 보고 있자니 벌써 피로한 기분이 밀려온다.
“그래서 회장님껜 연락드리셨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맞은편에 앉은 김 팀장은 종업원이 트레이를 정리해 방을 나서자마자 입을 열었다. 원래도 과묵한 편은 아니었는데, 우상동에 온 후로 수다쟁이가 다 되었다.
풀어진 물수건에 손을 닦은 신이혁은 느긋하게 대꾸했다.
“아니요. 시간이 안 나서.”
“통화 몇 분 한다고 시간이 안 나십니까. 한 끼 먹는 시간 쪼개 해도 열 번은 하겠습니다.”
“그럼 마음이 없는 거로 해두죠.”
손가락 하나하나를 닦으며 선심 쓰듯 말했다. 그리고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입가를 비트는 김 팀장을 알면서도 못 본 체했다. 운전기사를 두는 건 몸이 편하나 간혹 귀가 따가운 일이다.
차라리 아무 집으로 찾아갔다면 떼어놓고 오겠는데 식당이면 이게 애매하다. 신이혁은 물 잔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을 찡그렸다. 저녁시간이 겹쳐 식당으로 향한 게 잘못이었다.
“환자는 치료 잘 받고 있다던가요.”
“네. 당연하죠. 회장님이 무척 신경 쓰고 계십니다.”
“쓸데없는 짓을.”
쯧. 혀를 차는 소리에 김 팀장은 결국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젓가락질을 멈추었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마주한 신이혁의 눈썹이 들썩인다.
뭐. 말을 하지 않아도 읽혔다.
“원래 자식이 잘못하면 부모가 욕먹는 법입니다. 신 회장님이 한동안 안 회장님 앞에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신 거 아시지 않습니까?”
“시끄러운 놈 잡은 거 가지고 무슨 유난들인지. 그래도 죽이진 않았잖아요.”
“죽일 뻔은 했죠!”
신이혁은 김 팀장의 말에 무슨 과장스러운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비웃었다.
사실 별일도 아니었다.
“다들 쓸데없이 호들갑은.”
물론 순전히 그의 입장에서는.
그날의 신이혁은 평소와 달리 신경이 예민했다. 간밤 꿈자리가 뒤숭숭하여 수면의 질이 좋지 않았고, 업무가 바빠 하루 종일 밀려드는 결재서류에 시달렸다. 다른 곳에서 뺨 맞고 와 화풀이하는 노인네를 상대하는 데에서 이미 인내심은 고갈되었고, 설상가상 오랜만에 방문한 술집의 음악은 갈작갈작 두통을 유발했다.
그에겐 도무지, 평소에도 썩 달갑지 않던 놈이 걸어오는 소소한 시비를 대응해줄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신이혁은 시끄러운 입을 닫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눈앞에 양주병이 있기에 집어 들었고, 두꺼운 유리병은 기특하게도 머리를 내리쳐도 깨지지 않는 강도를 보여주었다. 술기운에도 감탄한 신이혁은 공평하게 온몸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게 끝이다. 그 후 신이혁은 조금 상쾌해진 마음으로 자리를 떴고,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은 다음 날에야 들었다.
“그나마 안 회장님이 호탕하셔서 망정이지. 만약 사장님이 당하셨으면 회장님은 더 심각하셨을 겁니다.”
“나는 그렇게 멍청하겐 당하지 않지.”
“그런 얘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걘 좀 맞을 필요가 있었어요. 제 아버지도 어쩌지 못하는 망나니를 잡아뒀으니 안 회장님은 오히려 고마워했을걸.”
그러니 하나뿐인 자식이 전치 4주가 나오도록 얻어맞고 와도 쉽게 넘어가 준 거겠지. 사건 이후 안 회장은 사람을 통해 주의 말씀을 전달한 게 다였는데, 오히려 길길이 날뛴 것은 아버지인 신 회장이었다. 덕분에 이런 시골에 처박혔으니, 값은 차고 넘치도록 치렀다.
신이혁은 이미 지나간 얘기에 지루한 표정을 했다. 더 듣지 않을 기색을 알아챈 김 팀장만 한숨을 푹 쉬었다.
“이후에 일정 있습니까.”
“없습니다.”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즉답이 돌아온다.
원체 바쁜 걸 즐기지 않는 신이혁에게도 이곳의 생활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여러 집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죽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얼른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채워 귀양인지 휴양인지 모를 처사를 끝내야지 싶었다.
식사를 마치고 방을 나서자 주인 내외가 가게 문 앞에 나와 있었다. 첫 방문 때 굳이 물리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매번 이렇다. 주인장은 언제나 신이혁에게 필사적이었다.
“식사 맛있게 하셨나요?”
“네. 잘 먹었습니다.”
“자주 찾아와 주시고, 감사합니다.”
“이 근방엔 입에 맞는 곳이 몇 없어서요.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원래 동네에서 작은 일식집을 운영하다 벌이가 좋아 매장을 확장 이전한 곳이라고 했다. 그 과정에서 사채를 끌어다 썼을 뿐, 이자와 원금을 꼬박 잘 갚고 있어 특별 관리 대상도 아니라고. 신이혁이 시간 죽이기로 채무자를 만나고 다니는 건 사실이지만, 이 집은 아니다.
무엇보다 사실, 그는 채무자들이 돈을 갚든 말든 안중에도 없었다. 적당히 시늉만 하다 돌아가면 그만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회사끼리의 커넥션이 있다 뿐이지, 이곳은 어디까지나 별개의 사업체였다. 뭐, 그 덕에 좀이 더 쑤시긴 했지만.
어쨌든 신이혁의 방문은 순전히 맛을 따진 것인데 채무자의 부담감 때문인지 사장은 그의 의도를 순수하게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저희는 감사드리죠.”
거듭한 주인의 인사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그리 감사하다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쓸데없는 말씨름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김 팀장이 계산을 마치는 동안 가게 안을 둘러보던 신이혁은 무심코 시선을 내렸다가 주인의 다리 옆에 붙어 서 있는 작은 꼬마를 발견했다. 딸인 모양이었다.
“안녕.”
고개를 삐딱하게 숙여 아이를 내려보았다. 한 손으로 제 아빠의 바지를 말아쥔 아이가 손을 꼼지락거린다.
“안녀하세요.”
아빠의 손에 뒤통수가 눌려 고개를 꾸벅인 아이는 부끄러운지 몸을 반쯤 숨기고서도 신이혁을 올려보았다. 낯선 사람이라 부끄러워하는 건가. 김 팀장을 대할 때와 달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름이 뭐야?”
“혜지니요.”
“혜진이.”
신이혁이 천천히 말을 따라 하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줍은 기색으로 제 입가를 가리고 키득거린다. 아이의 큰 눈은 동화책에서 그리던 왕자님을 만난 듯 신이혁의 얼굴에서 떠날 줄 몰랐다.
“저희 둘째입니다. 위로 오빠 한 명이 더 있긴 한데.”
“그렇습니까?”
웃으며 아이를 내려보던 신이혁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손을 뻗었다. 카운터 한쪽에 올려진 바구니 속 사탕을 꺼내 아이에게 내밀었다. 사탕을 가져가기 위해 다가온 아이의 손은 겨우 그의 손바닥만 했다.
“감사합니다, 해야지.”
“감다합니다.”
남의 것으로 베풀어놓고 감사 인사를 다 받는다. 마침 계산을 마친 김 팀장이 다가오는 게 곁눈으로 보인다. 사탕 봉지를 바스락거리며 중얼거리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있어, 혜진이. 인사를 건네고 숙였던 몸을 일으킨 신이혁이 막 가게를 나서려는 순간, 제 손을 잡아채는 것에 뒤를 돌았다.
아이였다. 한 손에 그가 준 사탕을 쥔 아이는 다른 손을 제 바지 주머니에 넣더니 한참을 꼬물대다 무언가를 꺼내었다. 달걀을 쥔 듯 헐겁게 만 주먹이 풀리고, 작게 포장된 초콜릿이 작은 손에서 큰 손으로 떨어진다.
“고마워. 잘 먹을게.”
기브 앤 테이크인가. 어린 나이에 교육이 잘됐네. 신이혁은 비닐포장지에 싸인 초콜릿을 내려보다 픽 웃으며 말했다. 손이 닿기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나선 아이의 부드러운 볼을 꼬집듯 매만졌다.
가게를 나설 때까지 아이의 인사를 받은 신이혁은 입구 앞에 주차된 차에 올라탔다. 먼저 운전석에 앉아있던 김 팀장이 어깨를 틀어 뒷좌석을 돌아본다.
“어디로 모실까요.”
“집으로 갑시다. ”
뻐근한 목덜미를 주물렀다. 어째 한 게 없으니 더 피곤한 느낌이다. 몸을 시트에 푹 기대며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신이혁은 자꾸만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었다. 아이가 준 초콜릿이 손가락에 걸린다.
“김 팀장님은 결혼 안 합니까.”
뜬금없는 말에 룸미러로 빼꼼 눈이 올라온다. 뜬금없을 뿐만 아니라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들었단 표정이다. 확실히 요 근래 주말도 없이 사람을 불러내 기사로 부려 먹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최근 김 팀장이 마주한 사람을 꼽으라면 거의가 그의 상사였다.
“일이 바빠서 아직은 생각 없습니다.”
“핑계는.”
김 팀장의 마음도 모르고 신이혁은 픽 웃어 보였다.
“애들 귀엽잖아요. 조그맣고, 연약하고.”
“아까 본 꼬마 말씀이십니까? 주인분 딸이라고 했던가요.”
“걔도 그렇고.”
양 갈래로 곱게 머리를 땋은 아이가 떠오른다. 잠시 말을 멈춘 신이혁은 목받이에 고개를 편히 기댄 채 눈썹을 찡그렸다.
“근데 난 애들은 딱히.”
태초부터 글러 먹은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그것관 별개로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아이가 예쁘다는 말을 잘 모르겠다. 물론 일반적인 의미로 예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를 넘어선 사랑스럽다거나 직접 품에 안고 싶다는 생각은 딱히.
오히려 가까이 두기 흥미로운 건…, 그것보다 조금 더 나이가 있는 쪽이 나았다.
“최소한 말은 통해야지.”
그래. 적어도 자신의 말을 하며, 상대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지. 신이혁에겐 무조건적인 해맑음보단 영리하게 빛나는 눈이 더 귀여웠다. 이를테면 자기 존재의 보전을 위해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는 모습이나, 제 행동에 따라 달라지는 반응. 예상할 수 있는 반항, 예측하지 못한 응답.
“흠.”
그는 문득 최근 만난 아이 한 명이 떠올랐다. 당연히 방금 본 꼬마보다는 훨씬 컸지만, 신이혁의 관점에선 다 비슷한 아이였다.
수적, 체력적 열세에서도 쉬이 포기하지 않는 성격으로 보였다. 아마 얻어맞은 것도 그래서겠지. 회수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이야 뻔했다.
아이는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자신을 돌봤다. 눈물은 흘릴지언정 서둘러 흔적을 닦아내는 자존심. 영 샌님처럼 생겨서는 두려운 와중에도 똘똘하게 구는 게 마음에 들었다.
척 봐도 순순히 절망적 상황에 좌절해있을 성격은 아닌 것 같아 신이혁은 채무자의 집을 나서고도 한참 골목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차에서 얼마의 시간을 버렸을까. 결국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집을 나서는 아이의 모습을 보았을 때의 기분이란. 기특함에 머리를 죄 헝클어 주고 싶을 정도였다.
회장님이 조금만 더 정정하셨으면 그런 동생이 있을 수도 있겠는데. 신이혁은 시답잖은 생각을 했다.
“차 돌려요. 갈 데가 생각났어.”
얼굴이나 보고 갈까. 따로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만남을 미룰만한 이유도 없다. 목적지 변경을 명령한 신이혁은 잠시 세웠던 상체를 물렸다.
어느새 사위가 어두워졌다. 오늘은 얼마의 시간을 보내면 될까. 지난번처럼 아이가 골목에서 한참을 배회할지도 모르겠다. 신이혁은 주하얀의 집으로 향하는 잠시라도 눈을 붙일까 싶어 몸을 이완시켰다.
곧 차의 방향지시등이 켜지고, 창밖의 풍경이 한 바퀴를 빙 돌았다. 잔잔하게 틀어둔 피아노곡이 느리게 흘러간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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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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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희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