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천장에 닿을 것처럼 높은 옷장 옆, 겨우 두 뼘만 한 서랍장 위에 놓인 뚱뚱이 텔레비전은 낡아 화면 중앙에 두꺼운 까만 줄이 그어져 있다. 분홍색으로 바래 나오는 화면엔 십수 년 동안 자라지 않은 소년이 어린 모습 그대로 모형총을 들고 이리저리 얄밉게도 뛰어다닌다.
“…just want my family….”
크기가 작아 귀퉁이가 잘려 보이는 티브이 화면에 뜬 자막을 주욱 읽던 주하얀은 간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를 따라 하며 끌어안은 베개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성탄절에 북적이는 설렘은 주하얀이 사는 동네와는 먼 이야기였다. 이날이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누가 태어난 날이라더라, 하는 얘기도 무색하게 매년 지겹도록 틀어주는 성탄특집 영화만이 일주일도 남지 않은 연말을 알려준다.
알바를 하는 동네만 해도 시가지라 그런지 꼬마전구를 뒤집어쓴 나무가 하나 걸러 하나에, 저번 주부턴 카페 내부에도 작은 트리를 세워두었다. 퇴근하는 밤에는 사방에서 반짝이는 전구빛에 거리가 저녁처럼 밝았다. 그 사이를 총총 걸으며 벌써 나의 청소년기도 끝나가는구나 하고 제법 감성적인 생각도 했다.
이 동네는 동심과 설렘을 표백시킨다. 분명 버스에 오르기 전만 해도 눈이 와도 예쁘겠다 생각했는데,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올라가는 길엔 올 휴일은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아님에 안도했다. 가뜩이나 보행자의 안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오르막길은 눈이 얼면 다치기 십상이었다.
“배고파.”
멍하니 화면만 응시하던 주하얀이 눈을 끔뻑하고 들었다. 오전 느지막이 일어나 뭉기적거리다 보니 벌써 점심이 훌쩍 지났다. 뭐라도 주워 먹으려면 일어나야 할 때다. 결심을 하고도 앉은자리가 너무 아늑해 잠시 더 엉덩이를 뭉개던 주하얀은 기어코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나태하게 늘어진 몸이 굼뜨게 부엌을 뒤졌다. 먹을 게 마땅치 않아 라면으로 때워야 할 성싶다. 찬장을 열어 번들로 묶인 라면 봉투를 뜯어 한 개를 꺼냈다. 냉장고에서 계란도 하나 꺼내왔다.
요 근래 집에서 먹는 음식이라곤 내내 이런 것이었다. 편의점 음식과 카페에서 참으로 먹는 빵들. 그 외에는 거의 라면이다. 애초 요리를 잘 해 먹는 타입도 아니었지만 그나마의 식재료값도 아끼려면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보글보글 끓는 물에 면을 풀어 넣었다. 그래도 요즘은 기대 않은 챙김을 받은 덕에 가끔이라도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그의 호의를 거절하려 했다는 게 참 배부른 생각이었다 싶었다.
자연스럽게 생각은 낯설고도 익숙한 남자에게로 흘러간다. 주하얀은 끝에 수프 물이 든 나무젓가락을 입에 물었다.
“샌드위치 맛있었는데.”
이젠 기억도 희미해진 햄샌드위치의 맛을 떠올렸다. 분명 이 근처에서 사 왔을 텐데 이름만 들어선 어디 있는지를 모르겠다.
그날 음식과 주하얀을 덜렁 놓고 떠난 신이혁은 다행히 크게 화가 나 보이진 않았다. 자기 딴엔 나름 신경 써준 것을 불편하다 한 꼴이니 기분이 좋을 일은 아니지. 그 와중에 고맙다고 주고 간 초콜릿은 다음날 간식으로 먹었다.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싼 초콜릿이 딱 주하얀의 입맛에 맞았다.
“배고프다.”
다시 매운 내를 풍기는 냄비로 고개를 돌린 주하얀은 잘 익어 투명하게 색이 변한 면발을 뒤적이다 냄비 모서리를 툭 쳐 계란을 깨트려 넣었다.
아무리 상상 속 샌드위치가 맛있어도 눈앞의 라면 냄새엔 군침이 돈다.
주하얀은 뜨겁게 익어 김이 풀풀 올라오는 라면을 상에 내려놓았다. 음식을 앞에 두니 자연히 다른 생각이 밀려난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신이혁을 신경 쓸 이유가 따로 없었다. 아니면 무서운 만큼 더 예민해졌나. …애초에 아직 그가 무섭기는 한가?
입안 가득 면발을 씹으며 티브이를 응시하던 주하얀은 불쑥 이불속에 던져두었던 핸드폰을 끌어왔다.
조심성 없이 굴린 탓에 모서리가 다 헤진 폴더폰을 열어 제일 위에 있는 문자함에 들어갔다.
[뭐해?]
답장은 뜬금없는 문자를 보낸 지 일 분이 채 되지 않아 돌아왔다.
[나 성당 왔음]
[지루하다. 집에 좀 데려다줘ㅜㅜ]
[아 ㅇㅋ 기도 열심히 해라]
[넌 집?]
[ㅇㅇ 내가 어딜 가]
[혼자?]
[엉]
[그럼 나 이따 놀러 가도 돼? 차피 미사 이따 저녁에 하니까]
[ㄴㄴ 너네 엄마 극대노하심]
[하 ㅅㅂ 나 지금도 걍 엄빠 따라다니는 중. 아침부터 뭐하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지루하긴 했는지 기다렸다는 듯 문자가 밀려든다. 자꾸만 진동하는 핸드폰을 든 주하얀은 입안 가득 문 라면을 우물거리다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집에서 만나는 건 곤란했지만 밖이라면 괜찮았다.
[그럼 이따 잠깐 얼굴이나 보자. 내가 성당 쪽으로 갈게]
[오 대박]
[오면 내가 커피 사줄게]
[나 한 4시쯤엔 도망갈 수 있을 듯. 천천히 와]
[ㅇㅇ]
[도착할 때 연락할게]
타닥거리며 자판을 치는 손이 곧 전송 버튼을 눌렀다. 주하얀은 그대로 넓적한 폴더를 접어 핸드폰을 다시 이불더미에 툭 던졌다. 앞으로 두 시간 남았으니 여유롭게 준비하기 충분하다.
금방 바닥을 드러낸 냄비를 싱크대에 놓고 가득 물을 받은 후, 젖은 손을 바지에 비벼 닦으며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 * *
딸깍, 딸깍.
천장의 빛이 희미한 가운데 눈을 찌르도록 밝은 빛을 내는 모니터 앞에 바짝 붙어 앉았다. 긴장으로 굳은 등은 의자 등받이에서 떼어진 지 오래고, 가슴팍이 책상에 눌릴 만큼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어떡해. 3분 후야.”
큰 모니터 가득 여러 창을 띄워두고 마우스 커서로 빈 공간을 의미 없이 클릭하던 주하얀이 턱 아래 바짝 댄 핸드폰에 말했다. 후우. 저도 모르게 숨이 크게 쉬어지고 목소리엔 바짝 언 긴장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야. 내가 보기엔 너 백퍼 붙어.
“진짜?”
-진짜. 솔직히 논술 그렇게 상향 지원도 아니지 않아? 지원할 때 무조건 붙을 거랬으면서 뭐 이제 와서 쫄아.
“그렇긴 한데….”
주하얀은 상대에겐 보이지도 않을 고갯짓을 하며 말끝을 늘렸다. 긴장을 풀기 위해 홈페이지에 타이틀로 크게 쓰인 글자를 의미 없이 드래그했다.
[20XX학년도 한국대학교 합격자 조회]
그것도 모자라 입시 홈페이지를 새로고침 해 몇 번이나 확인하느라 너덜너덜해진 수험표를 보고 수험번호를 다시 입력했다.
“시험 볼 때도 이렇게 떨리진 않았는데.”
-내 말이. 난 뭐 니 이미 합격한 줄.
시험 전날엔 긴장보단 합격해야겠다는 결의에 차 있었다. 격려해주겠다고 나선 친구들이 되려 민망해할 정도로.
오늘처럼 새벽부터 눈이 떠진다거나, 집에 컴퓨터가 없는 탓에 피시방을 찾으면서도 마음이 초조해지거나, 혼자는 겁이 나 주말 아침부터 늘어지게 자고 있는 이종훈을 깨워 통화하는 일도 없었다.
불안해하는 주하얀에게 이종훈은 핀잔과 격려를 같이 주었다. 함께 감정을 나눌 친구가 있다는 게 이럴 땐 도움이 된다.
-야 곧이다.
그 사이에도 시간은 갔다. 오른쪽 하단에 작게 띄워놓은 ‘한국대 XX학번 소취!’라고 쓰인 시간 알림방의 폰트가 빨갛게 변했다. 주하얀은 표준시간이 59분으로 바뀌자 헙,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1분 남았어. 미친. 떨려….”
심경을 대변하는지 빈 화면을 발작적으로 클릭한 주하얀이 괜히 몸을 들썩여 다시 자세를 잡았다.
“제발, 제발, 제발.”
시기가 임박해지자 시간은 더 빨리 가는 것 같았다. 들고 있던 핸드폰도 내려놓고 시계만 쳐다보다 막 50초가 넘었을 때 조회 버튼에 커서를 올렸다. 스피커폰을 켜 소리를 죽인 핸드폰에서 “할 수 있다!!” 따위의 소리가 작게 들린 것도 같다.
시계가 10시 정각을 알림과 동시에 버튼을 누른 주하얀은 빈손으로 제 눈을 가렸다. 거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이 손을 내려야 확인을 할 텐데, 확인하는 게 너무 무섭다. 결국 숨을 크게 한번 고르고 나서야 손을 내린 주하얀은, 그러고도 꼭 감아 시야를 차단한 눈을 천천히 떴다.
“와…. 와아아!! 와!”
언젠가 대학교에 합격하면 진짜 기쁘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제는 그런 상상 따위에 비할 바가 안 됐다. 주하얀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는 입을 틀어막았다. 절로 눈가가 뜨거워진다.
정각이 되자마자 “어떻게 됐어?” 하고 외치던 이종훈이 함성을 들었는지 같이 소리쳤다. 그 후에도 멍하니 화면에 뜬 “합격을 축하합니다.”라는 글자를 확인하다 핸드폰을 들어 귀에 댔다. 스피커폰이라 소리가 귀를 아프게 울렸지만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야. 나 합격했어.”
목소리가 울망하게 나갔다. 대학에 합격했다고 울 줄은 몰랐는데. 요 근래 주하얀은 자신도 모르게 모든 상황에 휩쓸려만 가고 있었다.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만든 온전한 성취가 가슴을 후려친다.
-내가 뭐랬어! 합격할 것 같다고 했잖아! 와 대박이다. 축하해.
“나 진짜 열심히 했어. 맨날 늦게까지 공부하고…….”
-어어 알지, 알지. 쉬는 시간에도 공부하는 거 내가 봤는데.
“와. 나 기분 너무 좋아. 이렇게 좋아도 되나?”
상체가 들썩일 정도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토해내다시피 내쉬었다. 그러나 들뜬 마음이 가라앉긴커녕 요동치는 심장박동만 더 선명해진다.
-나 같아도 기분 째질 듯. 우리가 이것 때문에 몇 년 동안 구른 거 생각하면.
“이종훈 이따 나와. 내가 밥 사줄게.”
-오 웬일? 진짜 기분 좋은가 보네.
“응. 아침부터 내 전화 받아줬으니까.”
-이래 놓고 김천 가면 뒤진다.
“걱정 마. 오늘은 비싼 거 사줄게.”
-나 준비하려면 삼십 분 정도 걸려.
“그래. 그럼 난 여기서 좀 있다 출발할게. 상동 영화관에서 봐.”
-어야.
전화를 끊은 주하얀은 제 볼을 꼬집어보았다. 아린 통증에 미간이 찡그려지는데도 기분이 상하지 않는다. 이 감격스러운 순간을 저 혼자 맞이함이 아쉬웠지만 기쁨이 커 그런 속상함은 티끌처럼 느껴질 뿐이다.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어쩌지 못해 비실비실 웃음을 흘린 주하얀은 이종훈을 기다리기 위해 컴퓨터를 하다가도 불쑥불쑥 대학 홈페이지를 찾았다. 행복해.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라 손바닥에 얼굴을 푹 묻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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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Dear my security)
잔희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