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어 마이 세큐리티-15화 (15/61)

15화

“정말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주하얀은 청소하던 중에 멈춰 어정쩡하게 들어 올린 손을 천천히 내리며 겸연쩍게 웃었다.

“그럼 오늘만 부탁드릴게요.”

“네. 그렇게 해요. 대신 머신 청소랑 파우더 정리만 마저 해줄래요?”

“네. 감사합니다.”

“나한테 감사할 건 없지.”

나도 도움받았는데 뭐. 너스레를 떠는 직원에 마주 웃은 주하얀은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커피 머신의 부품을 닦고, 파우더 통이 있는 선반을 닦고, 모자란 통까지 채워두자 퇴근까지는 25분 여가 남아있었다.

주하얀은 부엌을 나와 슬금슬금 신이혁에게 다가갔다. 그는 창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부러 인기척을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며 다가가는데 별안간 고개가 휙 주하얀 쪽으로 돌아갔다. 덕분에 다가오던 그대로 굳어 흠칫 떠는 주하얀을 보며 신이혁은 흘리듯 웃었다.

“왜. 일 안 하고.”

“아…. 저 이제 퇴근하려고요. 다른 분이 마감 대신해준다고 하셔서….”

“그래? 고맙네.”

신이혁의 시선이 힐끔 주방 쪽으로 향했다. 동의하는 바이기에 주하얀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저 옷만 갈아입고 나올게요. 잠시만요.”

서둘러 주방 안쪽에 딸린 사무실로 들어갔다. 옷 갈아입는다고 해봐야 입고 있던 앞치마를 벗고 패딩을 주워 입는 게 다였다. 좁은 공간에서 부산스럽게 옷을 갈아입은 주하얀이 가벼운 책가방까지 매고 사무실을 나섰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응. 들어가요.”

먼저 주방에서 마감이 한창인 직원에게 인사한 주하얀이 곧장 홀로 나갔다. 신이혁은 어느새 자리를 정리하고 매장 문 근처에 서 있었다. 얼른 다가가 옆에 서자 먼저 문을 나선 신이혁이 주하얀이 나오기 쉽도록 문을 잡아주었다.

“타.”

그의 차는 매장 앞에 있었다. 당연스럽게 뒷좌석에 오르는 신이혁을 보고 주하얀은 따라가야 할지, 조수석으로 가야 할지 몰라 잠시 멈칫했다. 그 기색을 눈치챘는지 신이혁이 제가 연 반대편 문을 턱으로 가리켰다.

“옆에 타.”

고민을 들킨 게 좀 머쓱했으나 선택을 못해 우왕좌왕하는 것보단 나았다. 얼른 신이혁의 옆에 올라타자 아까 전 사라졌던 김 팀장이 운전석에 앉아있었다. 매장으로 다시 들어오지 않아 아직 돌아오지 못한 줄 알았는데, 차에 있었나 보다.

주하얀이 자리를 잡자마자 차는 부드럽게 앞으로 움직였다. 든 게 없어 등에서 납작 눌린 가방을 앞으로 끌어와 안았다. 넓은 좌석은 편히 앉아 무릎을 양옆으로 까딱여도 어디 부딪히는 곳이 없다.

“하얀이 그동안 잘 지냈니?”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틀자 신이혁의 고개 또한 주하얀을 향해 있었다. 하릴없이 흔들거리는 무릎에 가있던 시선이 곧 몸을 타고 올라와 눈을 맞췄다.

“어…, 네 잘 지냈어요.”

잘 지내다 뿐인가. 합격 발표 이후엔 계속 마음이 붕 뜰 만큼 행복했다. 등굣길에 사람이 부대끼는 버스나 매일 영화나 틀어주는 수업 시간도 재밌다. 알바가 일찍 끝나고, 추운 날에 차를 타고 편하게 퇴근하는 것도 좋았다.

절로 다시 흥겨워지는 마음을 꾹 억누른 주하얀이 무난하게 답했다. 그리곤 너무 성의 없어 보였나 싶어 얼른 물음을 덧붙였다.

“사, 사장님은 잘 지내셨어요?”

“사장님?”

신이혁을 호칭으로 불러보는 건 처음이었다. 뭐라고 부르기도 조심스러워 언제나 ‘그, 저기, 저.’하고 얼버무렸으니까. 그래도 제일 무난하게 쓰이는 호칭으로 한 건데. 게다가 다른 사람도 모두 그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던가.

그도 어느 정도 납득했는지 웃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애석하게도 나는 잘 못 지냈는데.”

“…왜요?”

“글쎄. 하얀이를 못 봐서?”

이번 말엔 뭐라고 답할지 몰라 어색한 웃음으로 반응을 때웠다.

“…는 장난이고. 웬 노인네 하나가 자꾸 귀찮게 구네.”

한숨처럼 나온 말에 앞좌석에서 큼, 하고 목 가다듬는 소리가 났다. 신이혁은 졌다는 시늉을 하며 양손을 가볍게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소음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어 앞좌석을 내다보던 주하얀은 별안간 다가온 손가락에 볼을 쿡 찔렸다.

“어디 봐.”

“앞에….”

물음에 답하던 주하얀은 한 박자 늦게 그가 진심으로 답을 원하고 한 말이 아님을 깨닫고 말을 멈췄다.

의자 목 받침에 고개를 툭 기댄 신이혁이 시선을 맞춰온다. 어색함에 잠시 입을 달싹거리던 주하얀이 물었다.

“지금은 괜찮으세요?”

“응?”

“방금. 누가 귀찮게 군다고….”

주하얀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꿈뻑이던 신이혁은 곧 아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을 당한 사람처럼 놀람과 유쾌함이 눈에 섞인다.

“응. 하얀이 덕분에 괜찮아졌어.”

졸지에 옆에서 민망함을 견디던 주하얀이 목을 움츠렸다.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눈을 굴리자 신이혁은 그마저도 마음에 들었는지 팔을 뻗는다.

머리를 헝클어뜨릴 줄 알았던 손은 뒷목을 쓸고는 귓불을 장난스레 잡아당기더니 떨어졌다.

주하얀의 집으로 이동하는 내내 옆자리의 남자는 한바탕 웃음을 흘린 후에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이따금씩 신이혁은 그저 주하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도 해, 주하얀은 자신이 너무 편하게 굴었나 조금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자.”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다음에도 또 데려다줄게.”

“감사합니다.”

허리 숙여 인사한 주하얀에게 손을 흔들어준 신이혁은 곧 군데군데 가로등이 꺼져 어두운 골목을 떠났다. 잠시 멀어지는 차 뒤꽁무니를 바라보던 주하얀은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생각보다 그를 너무 반겼나 싶어 히터 바람에 건조해진 볼을 긁적였다.

오늘의 밤은 조금 이르게 찾아왔다. 얼떨떨하긴 하지만 모두 신이혁 덕이었다. 주하얀은 집에 들어가 괜히 지상으로 반쯤 올라온 창을 한번 쳐다보았다.

* * *

“형님, 누님들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저희는 학교에 남아 지식과 교양을 갈고닦을 테니 선배님들은 먼저 사회로 나가시어….”

운동장 앞 단상에 오른 학생회장의 축사가 넓은 공간을 꽉 채운다. 주하얀은 그를 한 귀로 듣고 그대로 흘려버렸다. 하릴없이 발아래 모래를 신발 밑창으로 문지르는데 등으로 무게가 툭 전해진다.

“으으, 시발. 존나 추워.”

“야 앞에서 담임이 봐.”

등에 제 몸을 부대끼며 엉겨오는 이종훈을 돌아본 주하얀은 앞을 힐끔 쳐다봤다. 줄지어 선 학생들의 선두엔 담임이 마주 보고 서 있다.

“보라 그래. 어차피 곧 있으면 이 지긋지긋한 학교도 바이다.”

“그래도.”

“아니 추워 뒤지겠는데 꼭 이 날씨에 운동장에서 졸업식을 해야겠냐.”

날이 춥긴 했다. 워낙 찌는 더위나, 손 시린 추위 따위에 강한 주하얀도 발끝이 오그라드는 날씨였다. 게다가 허허벌판인 운동장은 바람을 맞기 딱 좋은 구조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종훈 말고도 저들끼리 삼삼오오 뭉쳐 있는 애들이 몇 명 더 보였다.

“그냥 반에서 방송으로 하지. 따듯한 교실 두고 이게 뭐야.”

“그러게. 바람 장난 아니다 진짜.”

머리 위를 스치는 바람이 매서웠다. 목을 웅크려 두르고 있는 목도리에 입가를 숨기자 숨이 축축하게 달라붙는다. 아침에 등교했을 때까지만 해도 드디어 졸업이라는 사실에 다들 들떠있었는데, 졸업식이랍시고 운동장으로 몰아넣자마자 감격은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대신 학교에 대한 험담만 머릿속에 떠돌았다.

“미친. 이런 날에 무슨 졸업식이야.”

종래엔 동상이라도 걸리려는지 땡땡하게 감각이 없어진 발을 제 자리에서 구를 때가 되어서야 졸업식은 끝이 났다. 신발에서 발을 꺼내서 만져보고 싶은데, 신발을 벗는 순간 찬 공기에 도리어 발이 얼 것 같았다. 급한 대로 신발을 세워 발끝을 톡톡 땅에 두드렸다.

“학부모님들은 앞으로 오셔서 아이들 고생했다, 안아주세요.”

학생들 뒤에 모여 있던 학부모들이 사이로 끼어들자 열 맞췄던 줄은 금방 흐트러져 저들끼리 뭉쳤다. 그 사이에서 홀로 붕 뜬 주하얀은 어정쩡하게 이종훈의 옆에 붙어있다 그나마 말을 텄던 반 아이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졸업 축하해.”

“너도 졸업 축하해! 야 우리 사진 찍자!”

인사를 할 때마다 붙잡혀 사진을 찍었다. 평소라면 굳이 사진까지 찍을 사이는 아니었겠지만, 고양된 순간에 그런 사실은 중요치 않아진다.

이종훈에게 팔이 붙들려 그의 가족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고등학교 내내 붙어 다녔던 탓에 주하얀을 아는 부모님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네가 하얀이구나. 종훈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안녕하세요.”

“그래. 부모님은 어디 계시고?”

“아, 일이 바쁘셔서 오늘 못 오신다고 하셨어요.”

“아이고 내가 괜한 걸 물어봤네.”

짐짓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아주머니를 보고 주하얀은 괜찮다는 뜻으로 웃음 지었다. 옆에 있던 이종훈이 둘 사이로 불쑥 들어온다.

“엄마, 엄마. 나 사진 찍어줘. 야, 나랑 사진 찍자.”

“그래. 뒤로 가봐. 하얀이 핸드폰도 있으면 줘봐. 찍어줄게.”

“아, 네. 잠시만요.”

주하얀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를 켜 건넸다. 이종훈은 주하얀의 폴더폰을 보고 탄식하듯 숨을 뱉었다.

“야 이제 핸드폰 좀 바꿔라. 수능도 끝났잖아.”

“바꿔야 되는데 귀찮아서. 대학 들어가기 전에 바꿔야지.”

이종훈의 타박에 웃음으로 뭉갰지만 사실 백만 원을 웃도는 요즘 핸드폰 가격에 도통 결심이 서지 않았다. 산다고 해도 혜택과 보조금을 긁어 싸게 살 수 있는 기종으로 할 예정이었다.

이종훈은 자신이 다 들고 있기 힘들다며 주하얀에게 꽃다발 한 개를 넘겨주었다. 함께 사진을 찍은 후에 돌려주려고 할 때는 자신에게 짐을 지운다며 뻐기는 탓에 졸지에 꽃다발은 주하얀의 몫이 됐다.

“고마워.”

아직 꽃이 다 피지 않은 봉우리들을 검지로 건드리며 말하자 이종훈은 스스로도 머쓱했는지 주하얀의 등을 퍽 쳤다.

“진짜 같이 안 가도 되겠냐?”

“응. 괜찮아. 나 어차피 알바도 가야 하잖아.”

“무슨 이런 날까지 알바를 하냐. 알았어. 그럼 나 먼저 간다!”

“어, 잘 가.”

졸업식이 얼추 마무리되고, 다들 점심을 먹기 위해 학교를 빠져나갈 때 이종훈은 자기 가족과 함께 점심을 먹자며 주하얀의 패딩을 잡고 늘어졌다. 졸업식을 홀로 보낸 주하얀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주하얀은 웃으며 그런 이종훈을 타일렀고, 결국 아르바이트 시간을 이유로 대고서야 이종훈은 아쉬워하며 물러났다.

“잘 가!”

“야. 다음에 한번 놀자.”

“연락해!”

주하얀은 북적이는 사이를 걸으며 품에 안은 꽃다발을 추켜올렸다. 포장지가 바스락거리는 꽃다발에 코를 박았다. 반쯤 피다 만 봉우리의 꽃향기는 옅었지만, 옆에 딸린 풀냄새가 진하게 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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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Dear my security)

잔희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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