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어 마이 세큐리티-17화 (17/61)

17화

“꽃향기 맡아보실래요? 저는 좋던데.”

말 돌릴 거리를 찾던 주하얀이 꽃다발을 들어 내밀었다. 사실 꽃향기보단 풀 내음이 더 나지만 좋았던 건 사실이니까. 아까부터 꽃만 보고 있기에 의외로 꽃을 좋아하나 싶기도 했다.

신이혁은 잠시 자신에게 내밀어진 꽃다발과 주하얀을 번갈아 보다 그것을 받아 들었다. 잠시 꽃 가까이 고개를 숙이더니 곧 그것을 제 다리 위에 내려놓았다.

“고마워.”

그리곤 낮보다 끝이 조금 더 벌어진 꽃봉오리를 만지작거린다.

“어…….”

덕분에 당황한 건 주하얀이었다. 잠시 향을 맡게 해 준다는 거지 아예 준다는 얘기가 아니었는데. 자신도 선물 받은 것이기에 돌려받긴 해야겠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주춤대며 팔을 앞으로 뻗으면서도 섣불리 뭐라 말을 뱉지 못하는 주하얀을 가만 본 신이혁이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귀엽긴.”

불시에 다가온 손가락이 톡 장난스럽게 볼을 건드린다. 신이혁은 상체를 세우더니 운전석에 앉은 김 팀장에게 말했다.

“가는 길에 꽃집 먼저 들릅시다.”

“꽃집이요? 시간이 늦어서 연 곳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검색해보세요. 그래도 한 곳은 열었겠지.”

“네.”

너무나 손쉽게 김 팀장을 닦달하는 신이혁에 놀란 주하얀이 안 그러셔도 된다고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의 말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이십여 분이 더 지나서 차는 어느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기다리라 말하며 직접 차에서 내렸던 신이혁은 곧 새 꽃다발과 함께 차로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축하해.”

꽃집에 남아있는 꽃들을 다 쓸어온 건지 꽃다발은 원래 주하얀의 것보다 두 배는 컸다. 줄기 부분이 끈으로 동여매진 꽃들은 너무 많아 흘러넘치려고 했다. 그 자태에 말을 잃은 주하얀이 한 박자 늦게 더듬더듬 감사의 인사를 건네자 신이혁은 웃으며 말했다.

“교복 입은 하얀이도 마지막이네.”

어쩐지 홀가분한 투였다. 몸을 타고 내려간 눈이 하얀 신발부터 다시 올라온다. 찬찬한 시선의 끝에 주하얀이 조금 의아한 눈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말을 더 붙이지 않았다.

“이제 정말 어른이네.”

“네.”

“그래. 따로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고.”

주하얀은 놀라 얼른 거절의 뜻을 비쳤지만 신이혁은 좋은 일이니 기념하고 싶다는 말로 일축했다. 우리가 서로 선물을 주고받을 사이였던가. 이런 일에 제일 먼저 축하를 보내야 할 인물은 정작 행방이 묘연한데. 어색함을 숨기지 못해 얼굴을 긁적이며 생각해보겠다고 웅얼거렸다.

“내가 기뻐서 그래. 신경 쓸 거 없어.”

조금 아리송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고개를 숙이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보다 더 늦은 시간에 동네에 들어선 차는 조용히 낡은 빌라 앞에 정차했다. 양팔에 꽃다발을 버겁게 든 탓에 김 팀장의 에스코트를 받은 주하얀은 볼을 붉히며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다음에 올 땐 화병을 사 와야겠네.”

흡사 꽃에 파묻힌 모양새를 보고 신이혁은 즐거이 웃었다.

“화요일쯤 시간이 날 것 같으니까…. 집에서 봐.”

차 밖의 주하얀과 차 안의 신이혁은 열린 차창을 사이에 두고 얘기했다. 그가 정확한 방문 요일을 짚어준 건 처음이다. 주하얀은 입술을 길게 늘여 한일자로 만들곤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 고개를 주억거린 신이혁은 품에 안은 꽃다발을 내려보다가 다시 얼굴에 시선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서로 밤 인사를 건네고,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다가 빌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 이어짐을 주하얀은 굳이 꼬집어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자연스러웠다.

* * *

우웅―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돌아가는 기계 앞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아까 전보다 겨우 2분 남짓이 지났을 뿐이지만 주하얀은 발을 동동 굴렀다. 이윽고 완료 안내와 함께 ATM기에서 통장이 뱉어지자 얼른 짐을 챙겨 부스를 빠져나왔다.

발걸음을 빨리 움직이기 무섭게 핸드폰이 진동했다.

[20XX학년도 한국대학교 예치금 입금 완료. 별도 공지는 홈페이지 확인]

전방과 핸드폰을 빠르게 주시하며 겨우 내용을 확인했다. 그 김에 다시 확인한 시간은 출근까지 겨우 3분이 남았다.

애초에 백수의 삶을 즐긴다며 늑장을 부린 게 화근이었다.

“아씨, 어디 뒀더라.”

늦은 오전이 돼서야 느긋하게 일어나 눈만 꿈뻑이던 주하얀이 느릿느릿 출근 준비를 마친 게 한 시간 전이었다. 오늘은 가는 길에 대학 예치금도 입금해야지. 보물처럼 간직해둔 통장을 찾아 옷장을 다 뒤지면서 일이 꼬였다.

미수로 그친 도주 준비를 하느라 통장을 모두 끄집어냈던 주하얀은 꼭꼭 숨겨둔답시고 그것들을 새로운 곳에 옮겨두었다. 물론 모두 다른 곳에. 그 후 내내 꺼내 보지도 않았으니. 당연하게도 어디 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이 거지 같은 집구석에서 꼭 탈출하고야 만다. 일념처럼 간직한 대입의 꿈을 위해 야금야금 등록금을 모아 온 주하얀은 용의주도하게도 가진 돈을 여러 개 통장에 분산해서 가지고 있었다.

찾아야 할 것이 몇 배로 늘어났다는 뜻이다.

“아씨, 어딨어.”

그중 제일 큰 금액이 들어있는 통장을 분명 옷장에 둔 것 같은데 도통 보이지 않았다. 결국 몇 없는 옷가지와 이불을 다 들춰본 주하얀은 급기야 옷걸이로 옷장 바닥을 긁어내고서야 통장을 찾을 수 있었다. 그때가 평소 출근하는 시간보다 정확히 15분 지난 때였다.

“2분, 2분.”

하필 신이혁이 방문한다고 한 요일인 것도 지각의 이유가 되었다. 통장을 찾느라 엉망이 된 집을 차마 두고 나오지 못하고 대강이라도 정리를 한다는 게 10분을 더 잡아먹었다.

결과적으로 최대한 빨리 움직인 게 잘해야 지각을 겨우 면할 시간이었다.

뛰는 와중에도 손에 든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막 시간은 57분에서 58분으로 넘어갔다. 저 앞에 있는 코너만 돌면 길 건너 바로 카페다. 다다른 고지에 걸음을 재촉하던 주하얀은 한창 공사 중이라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을 미처 보지 못했다.

“어어!”

발에 무언가 치인다 생각했을 때는 이미 몸이 앞으로 다 기운 후였다. 반사적으로 손을 짚어 얼굴이 갈리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졸지에 땅에 대고 절하는 꼴이 되었다. 알알하게 올라오는 무릎의 아픔에 잠시 몸을 웅크렸던 주하얀은 제일 먼저 핸드폰을 살폈다. 손으로 땅을 짚은 탓에 그대로 충격을 받은 핸드폰에 흠집이 낭자했다.

“아씨….”

“학생 괜찮아?”

이걸 얼마나 더 써야 할지도 모르는데. 핸드폰을 살피던 주하얀이 액정에 뜬 시계를 확인하곤 바닥에 찌그러졌던 몸을 단번에 폈다. 멀리서 놀라 다가오는 인부에겐 괜찮다고 말하고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릎을 직통으로 박아 따끔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지금은 그런 거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안녕하세요!”

“오, 주하얀 씨. 아슬아슬하게 왔네요.”

“하하…. 죄송합니다.”

박차듯 카페 문을 열자마자 자신을 반기는 점장님에 주하얀이 머쓱하게 고개를 숙였다. 매장 벽에 걸린 시계 분침은 딱 숫자 12에 가 있었다. 다행히 지각은 면했어도 눈치 보이는 출근인지라 얼른 사무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뛰어오느라 한겨울에도 이마에 땀이 맺힌다.

곧 주하얀과 교대하는 점장이 퇴근하고 시간은 평소대로 흘러갔다. 몸을 빨리 움직일 때나 무릎을 굽히면 팽팽해진 바지가 살을 눌러 따끔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겨우 그걸로 일을 미룰 순 없는 노릇이다. 마침 바지도 빡빡한 청바지라 추켜올려 확인하기도 힘들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내일 봬요.”

그나마 시간이 지나자 통증도 좀 익숙해졌는지 이따금 콕콕 쑤실 뿐 신경 쓰일 만큼은 아니었다. 주춤거리는 걸음으로 어제와 같은 주황색 가로등 빛을 몇 개 지나 빌라 아래로 들어갔다.

“안녕, 하얀이.”

약속대로 집에는 손님이 와있었다. 미리 이야기가 되었던 방문이기에 주하얀은 놀라는 대신 곧장 마주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신이혁은 어쩐지 종이 뭉치를 들고 있었다. 이 집에 올 때면 대개 늘어져 있기 바빴기에 낯선 모습이었다. 바른 자세로 벽에 기대앉아 한 손엔 서류를 든 신이혁은 다른 손으론 담배를 굴리고 있었다. 그러다 주하얀이 방 안으로 들자 시선을 올린다.

“냉장고에 밥 넣어뒀어. 먹어.”

“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인 주하얀은 하지만 냉장고 대신 먼저 옷장으로 향했다. 주하얀의 집은 좁은 반지하다. 입식 테이블은 당연히 없다. 밥을 먹으려면 작은 책상에서 먹어야 하는데 딱 맞는 청바지가 무릎을 꽉 조여올 게 뻔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헐렁하고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는 게 나았다.

문제는 어디서 갈아입느냐였다. 평소 겉옷을 벗거나 상의를 갈아입는 정도야 남이 있어도 신경 쓰지 않았으나 바지를 벗긴 다소 민망했다. 이제 성인이라고 해도 예민한 청소년기에서 겨우 며칠 지났을 뿐이다. 그렇다고 화장실에 가서 갈아입으면 너무 의식하는 느낌이지 않을까.

자신도 모르게 뒤를 힐끔거리며 고민하는 주하얀에게 문득 시선이 닿았다. 위에서부터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나 보다.

“뭐해?”

“아…. 옷 갈아입으려고요.”

“갈아입어. 편하게.”

신이혁은 뭐 그런 걸로 고민하냐는 듯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래서야 화장실로 가 갈아입는다고 하면 분명 이상하다고 생각할 거다. 아…. 잠시 말을 끌던 주하얀은 결국 신이혁에게서 등을 돌렸다.

먼저 상의를 갈아입고 손이 바지춤을 붙들었다. 느릿느릿 버클을 풀다 오히려 이게 더 이상하지 싶어 바지를 확 내려버렸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발목에 걸린 청바지를 빼내는데 목소리가 들린다.

“주하얀.”

“네?”

갑작스러운 부름에 숙이고 있던 그대로 몸을 비튼 주하얀은 바로 마주치는 눈에 일순 당황했다. 태연히 옷을 갈아입으라기에 다시 서류나 보고 있겠지 싶었다. 혹시 자신을 계속 보고 있었나, 엉거주춤하게 신이혁을 보고만 있자 곧 다음 말이 떨어졌다.

“다쳤네.”

그제야 주하얀은 시선을 제 무릎으로 내렸다. 저도 처음 보는 상처였다. 바지를 벗으려고 다리를 비틀 때 보였나 보다.

“그냥 아까 길에서 넘어져서 좀 까졌어요.”

“좀이 아닌 것 같은데.”

“별로 아프진 않아요. 이따 약 바르면 돼요.”

“이리 와 봐.”

상처를 직접 보려는지 신이혁이 주하얀을 불렀다. 이미 마음을 먹었는지 꽤 단호한 시선에 주하얀이 그럼 잠옷 바지만 입겠다고 몸을 트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거듭된 재촉이었다.

“이리 와.”

“…….”

“얼른.”

어린아이 어르듯 일순 다정하기까지 한 부름에 결국 느리게 발을 옮겼다. 좁은 집은 몇 걸음 걷지 않아 신이혁에게 당도했다. 손엔 입지 못한 잠옷 바지가 구겨져 들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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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Dear my security)

잔희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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