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어 마이 세큐리티-18화 (18/61)

18화

“어쩌다 다쳤어.”

“출근이 늦어서 급하게 뛰다가 앞을 잘 못 봤어요.”

“카페에는 구급약이 없었나?”

“제가 딴생각하다 넘어진 거로 호들갑 떨기 좀 그래서요.”

“음.”

“그리고 못 견딜 만큼 아픈 것도 아니고.”

상처는 사실 그리 심하진 않았다. 일단 바지가 두꺼워 충격이 덜했던 모양이다. 마찰로 무릎 주위 살이 하얗게 일어나고 점점이 빨갛게 핏물이 올라와 굳어있었다. 무릎 중앙은 살이 벗겨져 선홍색 피부가 보이긴 했으나 그 정도 상처야 학교에서 축구하다가도 생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이혁은 신중하게 상처를 살폈다. 상처 가까이 얼굴을 내렸다. 다리를 잡아 고정한 손이 무릎 뒤를 어루만지다 종아리를 쓸어내렸다.

“아팠겠네, 하얀이.”

“…네.”

“그래. 약 바르자. 어디 있어?”

신이혁은 주하얀의 팔을 잡아 자리에 앉혔다. 습관적으로 양반다리를 한 무릎을 펴주기도 했다. 서랍장 첫 번째 서랍에 철제 박스 안에 있어요. 손으로 가리키며 한 말에 잠시 자리에서 일어난 신이혁은 아예 철제 케이스를 들고 돌아왔다. 딱히 구급상자라고도 할 수 없는 게 단추나 십 원짜리 동전이 같이 굴러다니는 속에서 소독약과 연고, 밴드를 꺼냈다.

“아프면 말해.”

주하얀의 무릎을 끌고 와 제 허벅지 한쪽에 올린 신이혁이 빨간 약을 쓸린 상처 위에 발랐다. 플라스틱 팁이 핏방울 진 상처 위를 스칠 때면 이따금 발끝이 오그라들었다. 소독약을 바른 후엔 연고를 짜 피가 진 곳마다 콕콕 찍고, 밴드를 까 상처 위에 겹겹이 붙였다. 겨우 까진 상처를 치료하는 것뿐이지만 손길이 제법 능숙했다.

“감사합니다.”

“그래. 씻을 때 조심하고.”

처치를 끝낸 신이혁이 환부 근처를 엄지로 쓸었다. 네. 당부에 대답한 주하얀은 그가 다리를 놓아주길 기다렸다. 티를 내지 않고 있지만 멀쩡히 옷을 다 차려입은 사람 앞에서 홀로 속옷 차림으로 다리를 벌리고 있기가 심히 민망했다. 넓게 펴 이불 삼아 덮은 바지도 의지가 되진 못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사정 따위 신경 쓰지 않는지 좀체 다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무릎 근처를 매만지던 손이 차츰 허벅지로 올라왔다.

“말랐네, 하얀이는.”

“아, 저기….”

“밥을 그렇게 먹였는데도 살이 안 쪄.”

“저, 사, 사장님.”

“이렇게 마르면 힘들 텐데.”

홀로 골몰하는지 살결을 쓰다듬던 손이 점점 올라와 급기야 허벅지 중간까지 오는 트렁크에 닿자 주하얀이 놀라 신이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뭐…. 뭐 하세요.”

그제야 신이혁이 고개를 들어 주하얀을 마주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주하얀은 사위가 어두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밤이 긴 겨울 자려고 불을 끈 방에 드는 어둠처럼. 분명 방은 불을 켜 환한데, 반지하의 먹먹한 어둠이 가까이…. 자신의 앞에.

“하얀아.”

“…네.”

저도 모르게 신이혁과 눈을 맞춘 채로 굳은 주하얀이 조곤히 대답했다. 그런 주하얀을 가만히 응시하던 신이혁이 곧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입꼬리를 위로 당겼다. 그 순간 아까 전의 눈빛은 사라지고 평소와 같은 웃음기가 서린다.

“이렇게 말라서 어떡해.”

“…….”

“키도 작으면서.”

“…키는 군대 가서도 큰다던데.”

말랐다는 말엔 가만히 있더니 키 작다는 말엔 발끈한다. 크게 말도 못 하고 웅얼대며 반박하는 것을 웃으며 보던 신이혁이 덥석 주하얀의 골반을 잡았다.

“이렇게 가볍고.”

그리곤 대뜸 몸을 번쩍 들어 제 허벅지 위로 당겨왔다.

“악!”

불시에 들린 몸에 놀란 주하얀이 반사적으로 신이혁의 어깨를 쥐었다. 팔을 세워 상체를 뒤로 젖혔으나 골반이 잡힌 터라 물러나지도 못했다.

“이게…, 잠깐!”

졸지에 무릎에 올라앉은 꼴이 됐다. 게다가 바투 붙은 몸은 서로 닿기 직전이다. 삽시간에 얼굴이 벌겋게 오른 주하얀이 불안하게 눈을 굴렸으나 신이혁의 낯빛은 평온하기만 했다. 얼핏 즐거운 기색도 보인다.

그렇게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시간은 신이혁의 몸이 들리며 끝났다. 앉아있던 몸을 일으키자 자연스레 주하얀의 몸이 뒤로 넘어진다. 바닥으로 떨어질까 어깨를 잡았던 손으로 얼른 목을 두르자 귀 옆에서 웃는 소리가 들린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같은 남자끼리.”

“아니….”

“자꾸 놀리고 싶게.”

딸려간 몸이 이번엔 바닥에 눕혀졌다. 불안했던 것과 다르게 안정적인 착지였다. 안고 있던 목을 놓아주자 상체를 조금 들어 올린 신이혁이 아래에 누운 주하얀을 감상했다.

그리곤 몸을 숙여 검지로 주하얀의 입술 옆을 톡 두드렸다. 겁먹은 코알라처럼 엉겨 붙은 몸을 지그시 맞대던 신이혁이 작게 숨을 내쉬며 멀어졌다.

“맛있는 거 사 왔으니까 먹고 얼른 크자.”

이내 신이혁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바닥에 내려두었던 서류를 정리해 손에 들고 떨어진 담배도 주워 갑에 집어넣는다. 그 과정을 멍하니 보고 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주하얀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 걸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깔끔하게 자리를 정리한 신이혁은 아쉬운 것 없이 곧장 현관으로 사라졌다. 바람처럼 왔다가 안개처럼 스러지는 걸 보는 기분이다. 덕분에 그 자리엔 주하얀만이 남아 얼떨떨하게 손이 닿았던 볼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동아줄처럼 움켜쥐었던 잠옷은 선명하게 구김이 남아 있었다.

“뭐야 진짜….”

3. (Shy) Security

철컥. 현관 잠금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열리고 주하얀이 느리게 들어왔다. 꾸물꾸물 신발을 벗는 몸이 벌써 구부정하게 굽었다. 반지하라서 중력을 더 강하게 느끼는 건가. 추가 달린 듯 무거운 발을 내딛던 주하얀이 곧 현관 앞에 무너지듯 주저앉아버렸다.

“아…. 피곤해.”

유난히 바쁜 하루였다. 분명히 오전까진 대개 백수의 삶처럼 빈둥댔는데. 하루의 형국은 출근을 하자마자 바뀌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자마자 주간 재고조사로 창고를 다 뒤집어엎었다. 그리곤 무려 스물네 잔을 시킨-그중에 스무디가 네 종류로 총 열다섯 잔이었다- 단체 손님을 소화하느라 제조하고 설거지하고를 수차례 반복했고, 저녁엔 개인 카페가 커피가 왜 이리 비싸냐고 빈정대는 손님을 상대했다. 아예 날을 잡았는지 마감이 가까워질 때까지 빠지지 않는 손님에 조심히 나가 달라 요청했다 저들끼리 구시렁대는 척 투덜대는 불만을 그대로 맞았다. 그 상태로 마감 청소까지 끝냈을 때는 다른 직원과 나란히 K.O. 패 당한 선수처럼 늘어져 버렸다.

오늘처럼 집이 시내와 가깝길 바란 적이 없다. 여차저차 낡고 지친 몸을 끌고 오긴 했으나 딱 현관을 지나자마자 에너지가 모두 방전되었는지 한 걸음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바닥에 볼을 대고 웅크린 몸으로 바닥의 한기가 스민다. 오늘 보일러를 켜고 갔던 것 같은데. 두툼한 옷 안으로 스미는 냉랭함에 몸이 허하다.

“…씻어야 하는데. 귀찮다.”

이대로 그냥 자버릴까. 주하얀은 딱딱한 바닥에 비비적대며 생각하다가 곧바로 ‘아이.’ 소리를 냈다. 이렇게 잤다간 입 돌아갈지도 모른다. 아침나절 지지직거리는 TV로 본 일기예보에서 오늘 밤이 겨우내 가장 추운 날이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었다. 아직 앞길이 창창한 어린 나이에 입이 돌아가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누가 나 좀 씻겨줬으면 좋겠다. 지구 반대편 사람하고 얘기하는 기계는 있는데 왜 씻겨주는 기계는 없는 거야.”

이래서 이과들은. 되지도 않는 말을 지껄이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양치와 세수라도 하려면 겉옷을 벗어야 할 텐데 집이 너무 추워 패딩만 겨우 벗었다. 팔이 길게 오는 후드 집업을 팔꿈치까지 걷어 올리자 서늘한 기운이 달라붙는다. 창문 하나 없어 답답한 화장실은 집보다 더 서늘했다.

턱.

“응?”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레버를 최대한 왼쪽으로 돌려 위로 올렸다. 하지만 둔탁하게 걸리는 소리만 나고 정작 물이 나오지 않았다.

“뭐야. 왜 이래.”

당황한 주하얀이 레버를 내렸다 다시 올렸다. 역시 물은 나오지 않았다. 혹시 몰라 레버를 오른쪽으로 끌어봐도 결과는 같았다.

순간 당황한 머릿속에 오전에 들었던 뉴스 음성이 스쳤다.

<…… 때문에 수도가 동파되지 않도록 주의하셔야겠습니다.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도록 틀어놓으시거나 장시간 외출 시 보일러는 외출모드로 켜 두셔야 피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때아닌 한파는 모레까지 지속되겠습니다.>

당장 화장실을 박차고 나와 싱크대로 달려갔다. 급한 손길로 수돗물을 틀었지만 물 두 방울이 떨어지곤 소식이 없다.

“아, 제발.”

반응 없이 덜컹 소리만 내는 수도꼭지를 쥐고 애원하던 주하얀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화장실 옆 벽으로 다가갔다.

안 그래도 오전의 뉴스를 보고 보일러를 외출 모드로 돌려놓았다. 집에 훈기가 돌만큼은 아니어도 독한 추위를 몰아낼 순 있을 텐데. 귀가했을 땐 집이 마치 골방처럼 추웠다. 둘 중 하나라도 멀쩡하길 바라며 보일러를 살핀 주하얀은 감감한 보일러 화면을 보고도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작동시킨 지 오래돼서 꺼졌나 보다. 오래 묵은 것이라 종종 그랬다.

불안한 손길로 보일러 난방 버튼을 눌러봐도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작동은커녕 현재 집안 온도도 보여주지 않는 화면에 보일러에 달린 버튼을 마구잡이로 누르던 주하얀이 곧 풀썩 주저앉았다.

“아 진짜 미쳤냐고…. 나한테 왜 이래.”

그 와중에도 발아래로 찬기가 계속 들었다. 엉덩이를 대고 주저앉았다간 단번에 얼얼해질 만큼.

하필 오늘. 하필 나에게!

[안녕하세요. 저 지하 101호 세입자인데요. 집에 물이 안 나와서요. 보일러도 안 되고.]

주하얀은 쭈그려 벽에 몸을 기댄 채 집주인 아저씨에게 문자를 보냈다. 차갑게 얼어드는 발바닥을 반대쪽 발등 위에 비볐다.

시간이 늦어 전화 대신 문자를 보낸 건데 다행히 자고 계시진 않았는지 주하얀의 핸드폰이 울렸다. 단조로운 기본 벨소리에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여보세요. 101호라고요?

“네. 집에 와보니까 수도가 얼었는지 물이 안 나와서요. 보일러도 먹통이고.”

-그래요? 이상하다. 오늘 한파라길래 안 그래도 아까 기사님 와서 수도 다 봐주고 갔거든요.

“어……. 근데 왜 이럴까요.”

-내 말이. 아니 아까 기사님 계실 때 집집마다 돌면서 확인했거든. 물 잘 나오나.

“그럼 저희 집도….”

-아이 거기는 못 했지. 집에 사람도 없고, 연락도 안 받고! 그게 또 이렇게 되네.

기사님이 오가셨을 시간이면 늦어도 저녁인데, 그때면 한창 일하고 있을 때였다.

거기다 연락했다는 번호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8)============================================================

디어 마이 세큐리티

(Dear my security)

잔희 장편 소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