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그 후로 십여 분을 더 달린 차는 담이 높은 주택가의 거리에 멈춰 섰다.
“내려.”
신이혁을 따라 차를 내리며 듬성듬성 가로수가 심어진 거리를 관찰했다. 주하얀의 동네는 빌라가 다닥다닥 붙어있는데도 골목이 좁았는데 이곳은 정원을 낀 주택이 거리를 두고 있는데도 이 차선 도로의 폭이 넓었다.
이곳이 어딘지 알고 있다. 예전 주하얀이 가족과 다 함께 살던 아파트 밀집지보다 한참 더 올라가야 있는 고급주택단지였다. 버스를 탈 때면 이곳 외곽의 돌담 둘레만 지나가며 보았는데 안으로 들어와 보긴 처음이다.
김 팀장이 주택 옆에 딸린 차고에 주차할 동안 주하얀은 신이혁을 따라 집으로 향했다. 회색 담을 넘어 들어가면 보이는 작은 정원은 겨우내 색이 죽은 잔디가 깔려있었다.
“적당히 앉아있어.”
휑하던 정원과 달리 집이 살풍경하진 않았다. 기본적으로 검은색 위주였으나 나무 테이블과 책장이 있어 어두운 느낌을 중화시켰다.
집에 들자마자 코트를 벗어 든 신이혁이 안쪽으로 사라지자, 주하얀은 눈치를 살피며 검은색 소파에 앉았다. 부득. 가죽 부대끼는 소리가 나 최대한 조심히 자세를 잡으며 눈을 굴렸다. 거실이 반지하보다 커 보였다. 형광등 빛은 더 밝고, 곰팡내도 없이 코끝엔 달큼한 향이 미세하게 걸렸다.
당장 일어나 이곳저곳을 배회하며 구경하고 싶은 걸 참느라 괜히 가죽 무늬가 선 소파에 검지를 문질렀다. 마트 세일 때 산 싸구려 하늘색 패딩이 소파의 검은색에 둥둥 떠 보인다.
곧 들리는 인기척 소리에 고개를 드니 신이혁이 거실로 돌아왔다. 정장이 아닌 편한 면바지 차림은 처음 보았다. 다가와 주하얀이 앉은 곳에서 직각으로 뻗은 소파 자리에 앉은 신이혁은 빤히 시선을 주었다.
주하얀 자체를 본다기보단 주하얀이 앉은 소파와 뒤의 집 배경 전체를 음미하듯 살폈다.
“저….”
통 말을 할 마음이 없어 보이는 상대에 결국 주하얀이 먼저 입을 뗐다.
“여기가 어디인지….”
“집.”
“아아.”
그의 행동으로 예상은 했으나 확인차 한 질문의 대답이 허망할 정도로 짧았다. 집이구나. 그래, 누가 봐도 집이긴 했다.
“여기 사세요?”
“응.”
“가족들은….”
“같이 안 살아. 전에 얘기해준 거로 기억하는데.”
집은 꽤 넓었다. 아니 ‘꽤’라고 퉁치기에 과할 정도로. 주하얀이 앉은자리에서만도 문이 세 개가 보이는데 딸린 계단도 있다. 2층까지 한다면 두 배는 되겠지. 이런 규모의 집을 혼자 쓰다니, 용케 주하얀의 반지하 방을 견뎌주었구나 싶었다.
“집이 엄청 좋네요.”
“뭐, 지내기에 나쁘진 않지.”
어깨를 으쓱이며 하는 말이 혼잣말처럼 공기 중에 흩어진다.
겨우 나쁘지 않은 수준이 아닌데. 그러고 보니 신이혁은 이곳에 잠시 내려왔다고 했다. 짧은 기간 머물면서 이렇게 좋은 집을 구하다니. 새삼 눈앞의 남자의 재력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잠시 입을 다물고 다음 말을 고르던 주하얀은 애초 묻고 싶던 말을 꺼냈다.
“그런데 저를 왜.”
“음?”
“왜 집에 데려오신 건지, 싶어서요.”
그래. 차가 이 비싼 주택단지로 들 때부터 묻고 싶었던 것이다. 처음엔 당연히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줄 알았다. 달리 바쁜 사정이 있어 찜질방을 찾아볼 짬이 나지 않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통 아는 길이 나오지 않았고, 차가 낮은 건물 사이로 진입하고서야 목적한다는 게 다른 집임을 깨달았다.
손을 앞으로 삐죽 내밀며 나름 정중하게 말했으나 정작 신이혁의 표정은 감흥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주하얀의 질문이 의아한 기색을 띠었다.
“집에 물이 안 나온다며.”
“…네.”
“여기는 나와.”
“….”
“심지어 더 편하고, 돈도 안 들지.”
이 정도면 여기 있을 이유가 되지 않나? 나름 친절히 답한 신이혁이 집을 둘러보던 걸 멈추고 주하얀을 돌아보았다.
당연히 이유가 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질문에 대한 답의 방향이 틀렸다. 신이혁은 주하얀이 신이혁의 집에 머무를 이유에 대해 말했지만, 주하얀이 궁금한 건 주하얀을 집에 들인 신이혁의 의도였다.
“어차피 내 담본데 내가 챙겨야지.”
혼란스러운 마음을 알아챈 듯 신이혁이 덧붙였다. 아까 전 차에서도 같은 말을 했었다. 담보. 오랜만에 들어보는 호칭이다. 그가 바로 앉았던 몸을 뒤로 기울여 손을 뒤로 짚었다. 얇은 니트의 가슴께가 팽팽하게 당긴다.
“그래도…. 이건 좀. 너무 죄송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어물쩍 넘어가기엔 마음이 걸렸다.
“생각해주신 건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 문제는 알아서 해결할게요.”
“…….”
“잘 곳은 스스로 찾아가겠습니다. 늦은 시간에 실례 많았습니다.”
주하얀은 제 거절이 최대한 부드럽길 바라며 고개까지 꾸벅 숙였다. 이대로 그냥 나가도 되겠지. 제 의견을 피력한 것치곤 눈도 살피지 못해 몸을 들썩이는데 수초가 지나 옆에서 한숨소리가 났다.
“하아….”
이래서 말로 하면. 힘 빠진 숨소리를 내며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작게 속삭인 신이혁은 훌쩍 자리에서 몸을 세웠다.
“일어나.”
이제 보내주나 보다. 몸을 일으킨 주하얀에게 팔을 뻗었다. 손을 잡으라는 의미는 아닐 테고, 느릿하게 다가가 옆에 서자 신이혁이 주하얀의 어깨를 감쌌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스킨십이었다.
신이혁은 주하얀을 이끌어 소파를 벗어났다. 방향은 현관과 반대되는 집 안쪽이었다.
“지낼 곳은 2층이야. 화장실도 방 옆에 있으니 지내기 어렵진 않을 거고.”
“아, 저….”
자신을 밀어 계단을 오르는 신이혁에 주하얀이 당황해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몸을 뒤틀어도 팔뚝을 둘러쥔 손이 떨어지지 않는다. 분명 손길은 부드러운데 속박당한 듯 주하얀은 딸려가기만 했다.
“손님방은 잘 안 써서. 그래도 기본적인 가구는 다 있으니 괜찮을 거야.”
“아니…. 저 정말로 괜찮은데요.”
“화장실은 맞은편 문 열면 있고.”
안절부절못하는 주하얀을 이끌고 신이혁은 어느 방문을 열었다. 주하얀이 사는 반지하와 엇비슷한 크기의 방은 생활감이 없어 보였을 뿐 침대와 책상, 작은 옷장까지 갖추었다. 하지만 주하얀은 이를 자세히 살필 여력도 없이 신이혁에게 매달렸다.
“저기, 제 말 좀.”
“찜질방이 그렇게 좋아?”
다급하게 그의 말을 자르려 들자, 그제야 시종 무시하던 시선을 돌렸다. 가깝게 붙어서 있던 탓에 생각보다 얼굴이 코앞에 붙었다. 놀란 주하얀이 순간 입을 다물자 이젠 신이혁의 차례였다.
“어차피 그곳도 숙박이 목적 아닌가.”
“…….”
“여기랑 다를 바도 없잖아. 난방되고, 물 나오고. 욕실엔 욕조도 있으니 몸을 담글 수도 있겠지.”
“아니….”
“심지어 여긴 침대도 있고, 더 좋은 조건 같은데.”
“그래도!”
“다른 점이라면 남들 다 보게 벗고 다닌다는 정도인데.”
“…….”
“그런 거 좋아해?”
그의 추궁인지 모함인지 모를 말에 주하얀은 말문이 막혀 잠시 멍했다. 물론 신이혁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하지만 목욕을 하려면 당연히 옷을 벗어야 하는 거고, 누가 거기서 남의 알몸 따위를 들여다보고 있겠나. 게다가 찜질방에 들어가려면 엄연히 옷을 다 갖춰야 했다. 뒤늦게 주하얀이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이번에도 신이혁이 더 빨랐다.
“원하면 여기서도 다 벗고 다녀도 돼.”
“…네?”
“너만 원한다면.”
황당한 말을 꺼낸 신이혁은 잠시 무얼 상상하는지 입을 다물다가 혼자 픽, 웃었다. 고개를 옅게 흔들더니 여태 문가에 서 있던 주하얀을 이끌었다. 손에 따라 방 안 침대에 앉혀진 주하얀은 마지막까지 고집을 놓지 못하고 입을 어물댔다.
“그래도….”
“하얀아.”
혼잣말이자 나름의 반박을 흘리자마자 이름이 불렸다. 마주 보고 선 탓에 고개를 들자 바로 눈이 마주친다. 머리꼭지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얼굴에 미소가 만연하다.
“내가, 그러자고 하잖아.”
“…….”
“따라주면 내가 많이 고마워하겠지?”
마치 부탁이라도 하듯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그 안의 속은 협박이자 통보였다. 주하얀은 이제야 그 뜻을 알아챘다. 신이혁은 이미 주하얀을 제 집에 머물도록 정했고, 주하얀은 그걸 따르면 된다. 다정한 말투와 미소에 간혹 간과하지만 둘의 위치는 동등하지 않다.
결국 제 패배를 감지한 주하얀이 고개를 떨어트려 끄덕이자 머리 위로 손이 올라온다.
“그래. 착하다. 일단 씻어. 용품은 다 욕실에 있을 거야.”
“…….”
“씻고 아래로 내려와. 뭐라도 먹어야지.”
“…네.”
고분해진 주하얀이 기꺼운 듯 몇 번이나 결대로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떨어져 나간다. 신이혁이 방에서 나가고 계단 아래로 발소리가 멀어지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비록 하루 이틀이겠으나 자신이 지낼 방을 둘러보았다.
이제야 알아챈 잘 정돈된 방에 괜히 입술을 삐죽였다. 방 더럽게 좋네.
2층 욕실에서 씻고 나온 주하얀은 어색한 마음에 시간을 끄느라 머리를 물기 하나 없이 말리곤 1층으로 내려갔다. 살면서 계단이 있는 집은 처음이다. 괜히 평소보다 더 조심히 걸었다. 먼저 씻고 나왔는지 신이혁은 소파에 앉아있었다.
아까 전 주하얀이 앉았던 자리였다. 거실을 몇 걸음 남겨두고 어디로 가 앉아야 할지 고민하는데, 그보다 먼저 인기척을 느낀 신이혁이 팔을 뻗어왔다. 뻗은 팔은 제 쪽으로 열려있었다.
“앉아.”
충분히 가까워질 때까지 내밀고 있던 손이 부드럽게 손목을 잡아 끈다. 신이혁은 얼마의 거리를 두고 옆에 앉은 주하얀을 훑었다. 버석하게 말라 붕 떠 있는 머리카락은 아직 뜨끈한 드라이기 열이 남아있었다. 부드러운 털가죽을 더듬듯 문지르던 신이혁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진다.
“옷 입고 나왔네.”
심상한 말투에 주하얀은 아까 전 대화가 생각나 조금 민망해졌다. 제집에서도 벗고 다니진 않았다. 하물며 남의 집에서.
“…네.”
“벗어봐.”
“네?”
주하얀은 아직 꽤 젊은 자신의 귀 건강을 의심했다. 내가 지금 들은 게 맞나. 멍청하게 바라보고만 있자 재차 재촉하던 신이혁도 설명의 필요성을 느꼈는지 짧은 말을 덧붙였다.
“바지 벗어봐. 저번에 난 상처 좀 다시 보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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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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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희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