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말과 함께 손을 뒤로 뻗은 신이혁이 제 옆으로 무언갈 당겨온다. 내내 옆에 두었을 텐데, 큰 덩치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구급상자가 주하얀의 시야에도 들었다.
단지 어린 청소년을 돌보는 어른의 의무감 따위를 피력하는 얼굴이 주하얀의 무릎 쪽을 검지로 가리켰다. 하지만 뒤늦게 신이혁의 의도를 이해했다고 순순하게 따를 만큼 주하얀이 창피를 모르진 않았다. 엄밀히 따지자면 더 이상 청소년도 아니었다.
“이제 다 나아서 괜찮아요.”
“그건 내가 보고 판단해.”
“그럼 그냥 바지를 걷을게요!”
“그 바지를?”
신이혁과 주하얀의 시선이 동시에 바지로 내려갔다. 얼마 전까지 매일 지겹게 교복을 입었던 탓에 주하얀은 아르바이트에 갈 때도 제법 옷을 갖춰 입었다. 그래 봐야 없는 살림에 옷이 많은 것도 아니라, 대강 학교 체육복을 주워 입지 않는다는 정도였지만.
그 덕에 주하얀은 몸에 달라붙는 검은색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여유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무릎까지 걷기도 빡빡한 소재였다.
“상처만 볼게.”
“…….”
“걱정돼서 그래.”
짐짓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얼굴을 보고 주하얀은 결국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초 그가 뜻했으면 주하얀은 따라야 할 일이다.라고 핑계를 댔지만 사실 자신을 걱정한다며 빤히 보는 시선에 마음이 몽글해졌음을 구태여 꼬집지 않았다.
마지못해 일어나 놓고 머뭇거리며 늑장을 부려도 신이혁은 재촉하지 않았다. 도리어 고개를 돌려 잘 정돈되어있는 구급상자 안을 헤집으며 만지작거리는 걸 보고 주하얀이 결국 결심한듯 손을 움직였다.
팍팍한 천을 밀어내며 소파에 앉자 그의 손이 다가온다. 몸을 숙여 버둥대는 주하얀을 밀어내고 대신 구겨진 옷을 완전히 벗겨내었다. 자연스럽게 마른 다리가 신이혁의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다행히 잘 낫고 있네.”
오금으로 손을 넣어 다리를 들어 올린 신이혁이 딱지도 떨어져 흔적만 겨우 남은 상처를 면밀히도 살폈다. 물기가 다 마르지 않아 찹찹하게 감기는 살결을 만지는 손은 거진 무의식인 듯했다.
덕분에 민망해진 건 주하얀이었다. 어디서 다쳤었다기도 민망할 정도로 깔끔히 나은 상처를 어루만지는 신이혁에 주하얀이 무릎을 제 쪽으로 당겼다.
“다 나았다니까요….”
“그러게, 다행이네.”
자연스럽게 다리를 빼내려던 주하얀의 시도는 도통 손에 힘을 빼주지 않는 신이혁 탓에 미수로 그쳤다. 이젠 상처 났던 부위를 눌러도 아픈 감각이 없다. 피부가 살짝 일어나 있는 곳을 엄지로 쓰는 모습이 꽤나 신중하다. 당장 의사한테 다친 부위를 들이밀어도 이보다는 덜 유난스러울 터다.
다리가 들리며 무게중심이 바뀌어 자연히 상체를 뒤로 기댔던 주하얀은 끙, 소리를 내더니 그냥 소파 위로 몸을 뉘어버렸다.
다 보고 나면 알아서 얘기해주겠지.
등받이로 세워진 쿠션을 끌어와 가슴 앞에 안은 주하얀은 신이혁이 제 허벅지부터 종아리까지를 더듬는 걸 고개만 들어 바라보았다. 그는 종아리를 감싸 무릎을 세우게 했다. 조심스러운 손길에 조금 민망해졌지만, 잠자코 있었다. 신이혁은 코를 박을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곧 무릎에 흡사 스펀지같이 부드러운 게 닿았다.
“……!”
머리 뒤에 팔을 괴어 턱을 내리고 있던 주하얀이 깜짝 놀라 팔꿈치를 세워 상체를 반쯤 들어 올렸다. 무릎에 입술이 닿았다. 비록 마른 입술을 스친 정도라 쪽, 하는 노골적인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도톰한 느낌이 닿았다.
갑자기 몸을 일으킨 주하얀에 다리가 크게 덜컹거렸다. 하지만 신이혁은 시선 한번 올리지 않았다. 도리어 조금 들어 올렸던 고개를 다시 내렸다.
“자, 잠깐만!”
이번에 신이혁은 조금 더 대담히 움직였다. 수분 없는 입술을 비비다 곧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인지 예상 가능한 습한 덩어리가 살 위에 닿았고, 아마도 앞니일 딱딱한 것이 살을 약하게 긁었다.
덕분에 이번에야말로 혼비백산한 주하얀이 손을 뻗어 얼른 신이혁의 어깨를 짚었다. 바위 같은 몸은 주하얀이 온 힘으로 밀어도 꿈쩍을 하지 않다가 신이혁이 고개를 들어 올리고서야 조금 떨어졌다.
“뭐 하는 거예요!”
“아직 어려서 그런가. 살이 부드럽네.”
너무 놀라 심장 소리가 귀에서 울렸다. 얼른 다리를 제 쪽으로 당겨 후드 소매로 젖은 흔적만 남은 무릎을 닦았다. 애초 그의 행동 중 주하얀이 이해할 수 있는 건 없다시피 했지만, 이번엔 정도가 심했다.
“더럽게 이게, 대체.”
이미 닦인 위를 재차 벅벅 문지르며 눈을 뾰족하게 떴다. 몸을 옹송그리고 노려보는 꼴이 놀랍도록 타격감이라곤 없어, 꼭 제 몫의 해바라기씨를 빼앗겨 씩씩대는 햄스터 같다.
그 꼴을 보며 겨우 웃음을 삼긴 신이혁이 어깨를 으쓱였다. 불쌍한 척을 한다고 제 가슴을 짚기도 했다.
“내가 사람 체온을 좋아해. 이런 걸 애정결핍이라고 하던가.”
콧방귀도 안 뀌어질 거짓말을 주하얀은 무시했고, 신이혁은 눈썹 끝을 떨어트렸다. 경계를 늦추지 않느라 몸을 웅크린 채로 미적미적 테이블 위에 구겨져 있는 바지를 끌어와 발을 꿰어 넣자 눈이 조용히 움직이는 다리를 따라왔다.
“입고 자기 불편하지 않겠어?”
“…….”
“그냥 벗고 있어도 되는데.”
“말도 안 되는!”
사람이 너무 놀라면 겁이 없어지기도 하는구나. 주하얀은 아까까지만 해도 눈치를 살펴야 했던 무서운 존재에게 버럭 화를 냈다. 사실 아예 겁이 안 나는 건 아니었지만 그보다 슬슬 오르는 약이 앞섰다.
“그래. 편한 대로 해.”
신이혁은 발발대는 상대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는 태연함에 주하얀은 마음 편히 삐딱할 수 있었다. 나 뿔났어요, 하는 기운을 온몸으로 뿜어내는 것을 보며 내내 모르쇠로 일관하던 신이혁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건너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곤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여전히 혼자만 여유로운 태도였다.
“늦었다. 피곤할 텐데 자야지.”
그를 따라 주하얀도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시침과 분침이 12 언저리에 가있다. 놀란 심장에 정신이 덩달아 깬 건지 2층에서 내려올 때만 해도 몰려오던 잠이 달아나 시간은 신경 쓰지도 못했다. 주하얀은 일어서는 신이혁과 반대로 소파에 몸을 털썩 주저앉았다. 눈을 감았다. 피로한 게 졸음 때문인지 신이혁때문인지 모르겠다.
“뭐라도 먹고 잘래? 아니면 그냥 잘래.”
“…그냥 잘래요.”
“배고프지 않겠어? 과일이라도 먹고 자.”
“…….”
“챙겨줄 테니까 네 방 올라가서 먹어.”
“…네.”
정확히 하면 내 방은 아닌데. 차마 말하지 못한 꼬투리를 속으로 삼키며 주하얀이 턱을 달랑달랑 흔들었다. 방금까지 떠든 탓인지 졸리긴 해도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과일이면 평소 비싸서 잘 못 먹으니까. 신이혁과 마주 앉아 먹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앉아있어.”
“제가 도울 일은….”
“과일 깎는 데 무슨 도움까지.”
“그래도 죄송해서.”
“그럼 와서 내 앞에 있을래? 끌어안고 있게.”
“그냥 여기 있을게요.”
사람 체온을 좋아한다느니, 애정결핍이라느니. 질 나쁜 장난이 아직도 안 끝났나 보다. 뻔뻔한 요구에 엉거주춤하게 세웠던 몸을 고분이 소파에 다시 앉은 주하얀을 보고 신이혁이 피식 웃는다. 큰 손이 살랑 부는 바람처럼 머리를 한번 흩트리고 떨어진다.
멀리 부엌에서 들리는 소리를 배경으로 발장난을 치던 주하얀은 곧 돌아온 신이혁에게 딸기와 망고 따위가 소복이 쌓인 접시를 받았다.
“…좋은 밤 되세요.”
잠시 고민하다 꾸벅 고개를 숙이자 역시 손이 다가온다. 이번에도 그 손을 피하지 못한 주하얀은 푸슬푸슬한 머리를 마구잡이로 흩트린 채 임시거처인 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난방을 얼마나 틀어놓는지, 집이 이렇게 넓은데 내내 훈기가 돈다. 부드러운 극세사 이불을 무릎에 덮고 앉아 과일을 먹은 주하얀은 배가 빵빵해질 때쯤 협탁에 접시를 올려두고 자리에 누웠다. 가장 약하게 켜 둔 침대 옆 스탠드 빛이 감은 눈 위로 스민다.
몸을 뒤챌 때마다 감겨오는 매트리스는 어제 집 안에 있는 모든 이불을 끄집어내 쌓아 올렸던 이부자리와 비교도 안 될 만큼 편안했다.
* * *
지난밤 새벽을 지새운 피로와 제 한 몸 누일 자리를 찾았다는 안도감이 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희미하게 정신이 깰라치면 포근히 감싸 오는 온기 또한 주하얀을 놓아주지 않았다.
덕분에 해가 창가로 길게 드리울 때까지 방 안은 고요했다. 멀리서 노크하는 소리도, 방문이 여닫히는 소리도 희미하다. 귓가에 내려앉는 목소리도 꿈결인가 싶었다.
“…소재지를―…. 네. 알겠습니다.”
볼과 머리에 무엇이 닿았다. 워낙 조심스러운 접촉은 더 간지럽기만 했다. 으으. 주하얀이 뭉그적대며 눈썹을 찡그렸다.
“아니. 일단 두세요…. 상황을 더 지켜보죠. …―네.”
물속에서 울리듯 멀던 목소리가 점차 선명해졌을 때 주하얀은 고개를 틀었다. 겨우 조금 틈이 생긴 눈꺼풀로 빛이 새어든다.
투정 같은 목울음을 내며 얼굴을 이불에 푹 파묻었다. 귀찮은 손을 떼어내려 한 것인데 침입자는 고집스레 손 닿는 곳 어디든 만지작댔다. 이번엔 실눈처럼 떴다 감기길 반복하는 눈두덩이를 살살 쓰다듬는다.
“주하얀. 아침이야.”
통화를 마쳤는지 남자의 말투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에에.”
“정신을 못 차리네. 아침 준비해뒀으니 일어나면 밥 먹어.”
“…….”
“일찍 들어올게. 혼자 놀고 있어.”
“으응.”
신이혁의 목소리는 속삭이듯 가만가만했다. 말을 하기도 몸이 무거워 겨우 목멘 소리로 대답을 퉁 친 주하얀은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숨을 길게 내쉬었다. 사위가 조용해지자 다시 잠기운에 빠지려 한다.
그때, 눈 위로 간지러운 바람이 이나 싶었다. 느슨히 감긴 왼쪽 눈 위로 무언가 내려앉았다.
“으으응.”
물컹한 감촉이 닿기 무섭게 목을 웅크려 이불에 고개를 처박았다. 어제부터 왜 자꾸 입술을…. 불만을 속으로 삼키고, 자꾸만 귀찮게 구는 것에 대한 반항으로 끙끙대는 소리를 내자 멀지 않은 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잘 자.”
그리고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문이 여닫히는 소리. 이번에야말로 다시 혼자가 된 주하얀은 거슬릴 정도로 머리에 가득 찬 졸음에 빨려 들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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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Dear my security)
잔희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