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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22화 (22/61)

22화

“하아암.”

다시 눈을 떴을 때 시간은 오전 11시가 넘었다. 해가 뜨다 못해 중천에 가까워졌을 때야 눈을 뜬 주하얀은 오래 잔 탓에 부은 눈꺼풀을 꿈뻑이다 계단을 내려갔다. 부엌 식탁엔 말대로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식어버린 음식은 대강 전자레인지에 데운 후 식사를 했다. 어딜 가든 그 사람에겐 얻어먹기만 하는구나. 양심상 손수 설거지까지 끝내고서야 낯선 집을 나섰다.

“읏자.”

주하얀은 낑낑대며 들고 나온 물을 수도계량기 파이프 위에 살살 뿌렸다. 그나마 가스불이 나오는 게 다행이다. 어제 잠시 짬 날 때 카페 사무실에 있는 컴퓨터로 찾아본 해결법을 그대로 따라 했다. 식수로 쓰려던 물을 죄 끓여 몇 번이고 반지하와 1층을 오고 간 주하얀은 벌써 저린 팔을 주물렀다.

오전부터 시끄럽게 난리통을 벌인다는 소리에 찾아왔는지 주인아저씨는 혼자 낑낑대는 주하얀을 보고 차 트렁크에 처박아뒀던 전기 릴선을 꺼내 주었다. 주하얀은 감사하다고 고개는 꾸벅거렸지만 애써 살갑게 굴진 않았다. 어찌 보면 이렇게 고생하는 데에 한몫을 한 사람이니까. 주인아저씨도 끝내 기사를 불러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제 잘못은 미뤄두고 자꾸 꽁해지는 마음에 주하얀은 곧장 일에 집중했다.

“내가 이 거지 같은 반지하. 꼭 벗어난다.”

부득부득 이를 갈며 냄비에 끓인 물을 컵에 따라 한 모금을 마셨다. 평생 쓸 일 없을 줄 알았던 크고 무겁기만 한 헤어 드라이기가 큰 역할을 했다. 이틀 전보다 날이 풀려 살인적인 한파가 가신 덕도 있었다.

덕분에 시원하게는 아니어도 싱크대에서 졸졸 흐르는 물을 구경한 주하얀은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하도 뛰어다니며 고생했더니 냉골 바닥이 다 시원했다.

“아 죽겠다. 힘들어.”

그나마 오늘이 주말인 게 천운이다. 이 상태로는 출근은커녕 손이 후들거려 커피도 못 내렸을 거다. 주하얀은 힘도 안 들어가는 손을 쥐었다 펴며 멍해졌다.

비록 하루지만 머물렀던 신이혁의 집 방 한 칸에도 비하지 못할 정도로 집이 낡고 허름했다. 아주 어렸을 때는 그 집보단 못해도 번듯한 아파트에 살았는데. 책상에 침대 하나가 끝이었지만 내 방도 있었다.

“미쳤나, 왜 또 이래.”

아침부터 발바닥이 저리도록 뛰어다니다 비로소 한가해지자 주하얀은 문득 서러워졌다. 그냥, 그냥 그랬다. 천장까지 곰팡기가 슨 집에 사는 것도, 언 수도를 해결해보겠다고 혼자 애를 쓴 것도. 앞섶이 다 벌어진 숨 죽은 패딩이며, 빨빨대며 다닌 탓에 고프다 못해 아픈 배까지 전부 다 주하얀을 서럽게 했다.

“씨이. 그 집 진짜 좋던데.”

마당이 딸린 2층 집은 아니어도 각자 쉴 방과 함께 모일 거실이 있었다. 이런 지저분하고, 사람을 좀먹는 반지하가 아니라. 혼자 버려진 게 아니라 사랑으로 보듬어줄 가족과 함께.

신이혁의 집이 편하고 좋았던 만큼 불유쾌하고 약이 올랐다. 결국 그곳은 주하얀의 집이 아니다. 이 어두컴컴한 방이 주하얀의 자리이다.

주하얀은 씩씩대듯 크게 숨을 골랐다. 가뜩이나 기운 없는데 울면 체력 낭비다. 더러운 패딩으로 눈가를 벅벅 문지르곤 뭐라도 하자 싶어 몸을 일으키는데 주머니에 곱게 자고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 앞에 달린 조그만 창으로 흘러가는 번호는 모르는 것이다. 그냥 무시할까 잠시 고민하던 주하얀은 끊이지 않는 벨 소리에 결국 핸드폰을 귀에 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네. 누구세요?”

낯선 목소리에 상대방의 존재부터 물었다. 등을 굽어 앉아 이미 눈물이 다 마른 눈가를 검지로 문질렀다. 들어본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아리송한 느낌에 눈만 끔뻑거리는데 목소리보다도 익숙한 말투가 들려온다.

-하얀아.

“아….”

-하얀아?

“아…. 네, 네. 듣고 있어요.”

요 근래 자신을 이렇게 다정히 불러준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주하얀은 그제야 발신인이 누군지 알아챘다.

-집에 없네. 어디 갔니?

“네. 잠깐 집에 왔어요. 수도 문제 때문에요.”

집. 집. 같은 단어를 얘기하지만 서로 뜻하는 바가 다르다. 주하얀은 새삼 어색하게 느껴지는 단어를 머릿속으로 굴렸다.

-음…. 해결은 됐고?

“네. 방금요.”

-그래. 거기 잠깐 있어. 데리러 갈게.

“네? 아니요 괜찮아요. 혼자 갈게요.”

-여기 어딘지도 잘 모르잖아. 그냥 있어.

“아니, 안 그러셔도 괜찮은데….”

-날 아직 춥다. 나와 있지 말고.

급히 만류하는 말을 자른 신이혁은 제 할 말만 하고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 잠시 핸드폰을 내려보던 주하얀은 곧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이 다시 나오기 시작한 마당에 그냥 자신의 집에서 지낸다고 할까, 고민했지만 이내 접어두었다. 수도를 고쳤다 뿐, 아직 보일러는 그대로다. 기록적 한파는 지나갔대도 온기 없는 밤을 지새우기는 아직 날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포근하던 잠자리가 아쉽기도 하고. 무엇보다 신이혁이 순순히 물러날까도 문제였다.

책가방으로 쓰던 가방에 옷을 담았다. 기껏해야 며칠 있지도 않겠지만 겨울옷은 부피가 커 옷 몇 개를 넣자 금세 가방이 빵빵해졌다. 핸드폰 충전기와 있으나 마나 한 지갑까지 챙겨 넣는데 현관문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젠 스페어 키가 있음을 숨기지도 않는 신이혁이 현관 잠금을 쉽게도 따고 집 안으로 들어선다. 주하얀도 놀라움 없이 그를 맞았다. 옷이 들어 가벼운 가방을 등에 둘렀다.

“보일러 고장 났다더니 집이 진짜 춥네.”

“그건 주인아저씨가 알아서 해주신다고 했어요.”

“이제 물은 나오고?”

“네. 날 따듯해지면 괜찮을 것 같아요.”

“다행이네. 가자.”

곧장 현관으로 걸어오는 주하얀에 신이혁이 닫았던 문을 열고 몇 걸음 물러났다. 덕분에 편히 신발을 신고 문을 나서자 그는 먼저 계단을 올랐다. 현관문을 잠그고 열쇠를 주머니에 넣은 주하얀이 뒤늦게 지상으로 향했다.

어두운 실내를 벗어나자 곧바로 쬐는 오후의 햇살에 눈을 찡그렸다. 빌라 앞에 나와 기다리던 신이혁은 고개를 숙이며 비틀거리는 주하얀을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엄지가 눈두덩이를 길게 쓸고 떨어진다.

혹시 빨개졌나. 아까 울고 난 후 눈이 건조해 몇 번 문질렀는데, 그가 알아챘을지도 모르겠다.

“바로 가도 되지?”

“네. 할 일은 다 했어요.”

“그래.”

등 뒤로 은근한 압력이 느껴진다. 평소처럼 뒷좌석으로 가려는 몸을 붙든 신이혁은 허리와 옆구리 사이 어딘가를 짚어 부드럽게 조수석으로 이끌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주말이지. 그는 주말이나 기분 내킬 때면 간혹 직접 운전을 했다.

“학생! 어디 가려고?”

“아, 네. 아저씨.”

조수석 문을 열어주는 친절에 고개를 꾸벅 숙이고 차에 오르려는데 수도계량기를 확인한다고 건물 밖으로 갔던 집주인이 돌아와 물었다. 숙였던 몸을 다시 세운 주하얀은 새삼 가깝게 서 있는 신이혁의 옆에서 한 걸음 떨어졌다. 허리를 감싸듯 닿았던 손이 떨어진다.

“보일러 기사는 내가 월요일에 바로 연락해볼게. 아마 늦어도 이삼일이면 될 거야.”

“네. 알겠습니다.”

“그래. 오늘 욕봤어. 어여 들어가.”

“네. 다음에 봬요.”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대처다. 고장 난 지 이틀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수리 연락을 안 했다니. 주하얀은 야속한 속을 감추고 집주인에게 인사를 건넨 후, 차에 올랐다.

주하얀이 자리에 잘 오른 것을 확인한 신이혁은 직접 문까지 닫아주고야 운전석에 올랐다.

“다음 주면 집에 돌아갈 수 있겠네.”

“네. 생각보다 오래 걸리죠.”

그러고 보니 보일러 수리가 늦어지는 만큼 그의 집에 머무는 시기도 덩달아 길어지게 생겼다. 하루 이틀만 신세 지면 될 줄 알았는데. 주하얀은 허벅지 위에 올려둔 손을 꼼지락거렸다.

“죄송합니다.”

“음?”

“제가 너무 민폐 끼치는 것 같아서요.”

“아…. 난 또 뭐라고.”

대뜸 죄송하다는 말에 눈썹을 들썩이던 신이혁은 이어진 말에 허무함까지 섞인 웃음을 흘렸다. 물론 그런 그의 반응은 주하얀에게도 예상 범위였지만, 스스로의 마음은 다른 문제다.

“이제 저도 어른인데, 이런 거 하나 해결 못하고.”

혼자 고민하더니 이내 부루퉁해진 주하얀을 힐끔 본 신이혁이 한적한 도로를 내다보곤 오른손을 조수석으로 뻗었다. 눈으로 보고 뻗은 게 아니라 손이 엉뚱한 데 닿았다. 볼 아래 턱선에 닿은 손은 그대로 미끄러져 턱 아래 살을 검지 등으로 살살 문질렀다.

“갓 20살 된 지 한 달도 안 돼 세상 모든 일을 혼자 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부모 등에 업혀 사는 사람은 없겠지.”

“저는 업혀 살 부모가 없잖아요.”

“대신 아빠 친구는 있잖아.”

우울한 표정의 주하얀이 운전석을 힐끔거렸다. 언제 적 말실수 가지고. 다행히 신이혁의 표정은 꽤 쾌적해 보였다. 아까부터 턱 아래를 간질이는 손길을 타고 그 기운이 조금은 넘어오는 듯도 했다.

“필요한 만큼 있어. 아니면 그냥 아예 들어와 살아도 되고.”

그가 심상히 한 말에 주하얀은 속으로 놀랐다. 요 근래, 아니 첫 만남 이래로 다정하기만 한 신이혁은 가끔 아무렇지도 않게 주하얀을 쿡 찔러온다. 손길은 부드럽고 말엔 웃음이 있으니 반쯤은 장난이었을 테지만 주하얀으로서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어제부터 입안에서 돌던 물음이었다.

“왜, 저한테 잘해주세요?”

“내가?”

주하얀의 물음에 신이혁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만연하던 웃음기로 대답한 신이혁은 무언가를 짚어보듯 잠시 말이 없다. 차가 막 고가도로를 빠져나와 교통이 안 좋은 주택가로 들어섰다. 핸들을 고쳐 쥐며 손이 멀어진다. 온기가 떨어진 턱을 아래로 숙였다.

“저희 집 동파된 것도, 사실 사장님이 신경 쓰실 일은 아니잖아요. 근데 집도 내어주시고. 퇴근할 때도 집에 데려다주시고. 또, 매주 찾아오시는 것도 귀찮으실 수 있으니까….”

“…….”

“밥…. 챙겨주신 것도 그렇고.”

뭐가 그리 감사하다고 주절주절 거슬러 올라가던 얘기가 결국 또 도돌이표라 신이혁은 미간을 찡그리고서도 웃음을 흘렸다. 전에 애먼 소리를 한다며 꾸중을 들어서인지 주춤대면서도 결국 말을 꺼낸 주하얀이 붙여 앉은 무릎 사이로 양손을 구겨 넣었다.

“사탕 준다고 모르는 사람 따라가면 안 된다는 건 어렸을 때 배우지 않나?”

“…….”

“어린애 구슬리기 참 쉽다, 하얀아.”

신이혁은 검지를 세워 핸들을 두드렸다. 조소인지 미소인지 모호한 웃음이 걸려있다. 웃으며 빈정대는 정도야 예상했기에 주하얀은 굳이 반응하지 않고 다리로 꽉 누른 손만 꾸물거렸다. 말투가 공격적일 뿐, 태도는 일전의 경험보다 누그러진 기색임이 다행일 따름이다.

“그러게. 내가 왜 잘해줄까.”

끝이 낮은 물음은 질문도, 의문도 아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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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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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희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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