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내가 굳이 어렵게 한번 가보려는데 그걸 안 도와주네.”
“…….”
“나 하얀이 아빠한테 받을 거 있는 빚쟁이야. 잊은 건 아니지?”
“…네.”
“내가 그 빚 받으려고 아빠한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순순히 잘해준대.”
요즘 애들은 원래 이렇게 헛똑똑인가. 가벼운 한숨을 흘리며 신이혁이 고개를 젓자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주하얀이 조곤히 대꾸했다.
“그건 아빠가 돈 빌린 거니까 받아내는 게 맞는 거죠.”
“뭐?”
“돈을 빌려줬으면 돌려받는 게 당연하니까. 그거에 대해 더는 나쁘게 생각 안 해요. 물론 잘…, 했다고도 못하지만…. 그리고 그거랑 별개로 저한테 잘해주시는 건 사실이잖아요. 길 가다 지나가는 사람 잡고 물어봐도 그렇다고 할걸요.”
“허…….”
이번엔 머릿속으로 꽤 정리를 했는지 풀이 죽는 대신 제법 반박해온다. 신이혁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부러 지지 않으려는 듯이 고집스레 말을 잇는다. 내내 고분 하더니 한집에서 잤다고 조금 풀어진 건지 말투도 한결 편하다. 이걸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신이혁은 신호에 차가 정차하자마자 옆으로 고개를 까딱이며 물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달갑잖음과 의아함, 즐거움 따위가 섞여 목소리가 붕 떠 흐른다.
재촉에 당황한 듯 주하얀은 섣불리 답하지 않고 잠시 침묵했다. 사실 신이혁이 무섭게 몰아붙여서 그렇지 계약 관계에서 나쁜 사람은 실상 아빠였다. 돈을 빌렸으면 잘 상환하든가, 그도 안 되면 다른 방법이라도 찾아봐야지 냅다 도망가는 게 뭔가. 신이혁은 큰돈이 아니라고 했지만 당장 주하얀의 4년 학비로 쓰고도 남을 돈이다. 누가 그 돈을 가지고 도망갔다면 주하얀 같아도 당장에 쫓아갔다.
주하얀은 점점 자신이 처한 상황과 신이혁을 따로 떼어 보고 싶어졌다. 부모도 버리고 간 사람을 거두어 돕는데 고마운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다.
“…감사합니다.”
제 뜻이 있어 관철시킬 때는 뒤 없이 나오던 말이 막상 결론을 꺼내려니 조금 쑥스럽다. 결국 어제부터 내내 진심으로 전하고 싶던 말은 하나였다. 주하얀이 목표를 달성함에 웃자 신이혁도 황당해하면서도 따라 웃었다.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고마워를 하든, 미워를 하든.”
거기까지 말하고 한 박자를 쉰 신이혁이 곧 뒤를 이었다.
“대신에 중간에 마음 바꾸고 내빼지만 마. 너까지 잡아다 놓을 생각 하면 머리 아파.”
담보는 담보답게. 한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한 신이혁이 주하얀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 사이 손길에 익숙해졌는지 주하얀은 더 이상 놀라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 * *
“들어가.”
그의 집에 돌아와서는 씻고 함께 식사를 했다. 직접 차려주겠다며 부엌을 오가는 신이혁의 뒤에서 어색하게 배회하다 들켜 졸지에 포옹을 당했다. 도망가려는 걸 붙잡아 가슴이 답답하도록 껴안은 신이혁은 머리칼 위에 두어 번 입을 맞추는 시늉을 하곤 주하얀을 거실로 쫓아냈다.
정수리 위에서 들리는 수상한 쪽쪽 소리에 얼른 손을 들어 머리를 가린 주하얀은 놀라 소파에 얌전히 앉았다.
어제부터 이상할 정도로 허물없이 굴긴 했으나 역시 스킨십은 못 견딜 만큼 어색하고 불편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친할수록 괄괄하게 굴며 욕을 하던 남자 청소년 집단에 있었다. 이런 식의 간지러운 접촉은 부모님에게도 받아본 기억이 까마득하다.
“으으.”
주하얀은 소름이 돋은 팔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정말 종잡을 수가 없는 남자다.
“메뉴 들어가면 목록 뜰 거야. 보고 싶은 거 골라봐.”
식사를 마치고 신이혁이 뒷정리를 하는 동안 주하얀은 티브이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 신이혁이 먼저 주말이니 느긋하게 영화를 보자고 제안했고, 주하얀은 기쁘게 승낙했다. 거실벽에 세워진 큰 티브이 옆엔 딱 그만한 스피커가 있어 소리가 제법 생생했다. 화면이며 소리며 지지직거리던 낡은 티브이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이리 와서 먹어.”
영화를 고르는 동안 후식이라며 과일을 챙겨 온 신이혁이 가까이 다가와 앉으라고 팔을 뻗었다. 주하얀은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스킨십을 좋아한다고 했던 게 선전포고였는지 그는 당연하게 주하얀에게 손을 뻗었다. 그에 순순히 응해주기 멋쩍을뿐더러, 소파가 이리 넓은데 굳이 붙어 앉을 이유도 없었다.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주하얀은 포크를 집어 과일 하나를 냉큼 집고는 다시 몸을 세웠다.
“잘 먹겠습니다.”
소파 위에 다리를 올려 무릎을 세워 앉은 후에 딸기를 우물거리며 고개를 흔들자 신이혁은 예상외로 선선히 손을 거뒀다. 웃는 낯이 수상해 보였으나 더 추근대지는 않았다.
Jane! Please be―…….
영화는 미국판 추적 스릴러였다. 출장차 해외를 방문했던 아내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에 남편은 연고 없는 나라로 출국한다. 하지만 어떻게 아내를 찾아야 할지 막막한 때, 범인에 대해 알고 있다는 주근깨 안경잡이 소녀가 찾아와 함께 수색에 나서는 내용이었다.
영화는 액션의 비중이 높았고, 연출이 꽤 뛰어났다. 하지만 그보다는 식사 후의 노곤함이 더 했다. 중간까지는 나름 집중했던 것 같은데 어느결에 눈이 감겼다. 웅크리고 있던 몸이 허물어져 소파 등에 늘어졌다.
마침 사건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부분이라 잠시 눈만 감고 있으려 했는데, 다시 눈을 떴을 땐 시야가 뒤집혀 있었다. 자신이 허벅지를 베고 누운 상태라는 건 한 박자 늦게 알아챘다. 담요 덮은 팔뚝을 토닥이던 신이혁은 꼼지락거리는 기척으로 일어났음을 알아채곤 눈가를 손으로 덮었다.
“더 자.”
한참 입을 다물고 있어서인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다. 언제부터 이렇게 기대 있었던 거지. 주하얀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당장 몸을 일으켜야 한다. 머리론 아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얼마간은 무거운 눈꺼풀을 고집스레 깜빡이다 결국 새까만 시야에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일어나야 하는데. 아마 상대방도 많이 불편할 텐데. 하지만 몽롱한 잠은 착실히 주하얀을 삼켰다. 이윽고 신이혁의 손이 멀어지는 기척과 함께, 멍멍한 귓가에서 북적이던 영화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 * *
“너 근데 혼자 핸드폰 바꿔본 적 있어?”
“아니. 당근 없지.”
“아, 또 호구 잡히는 거 아니냐.”
“야 최대한 인상 써. 인성 터져 보이게.”
이종훈의 말에 미간이 다 접히도록 인상을 쓴 주하얀은 곧 뻐근한 이마에 표정을 풀고 주름진 피부를 조물거렸다. 이게 지금 제대로 되고 있는 게 맞나. 핸드폰을 바꿀 때 잘못하면 호구 잡힌다는 말에 끌고 온 이종훈은 되려 주하얀보다 더 호들갑이었다. 매장 앞에서 떨린다며 부산 떠는 이종훈을 이끌고 투명한 유리문을 열었다.
핸드폰 매장은 필요 이상으로 밝았다. 벽엔 새로 출시된 핸드폰 포스터가 줄지어 있었고, 내부를 둘러 세워진 매대엔 샘플폰이 빼곡했다. 저도 모르게 그 정중앙에 있는 테이블로 다가가 핸드폰을 살펴보는데 안쪽 테이블에서 점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뭐 찾으시는 물건 있으세요?”
“아, 아뇨… 그냥…. 핸드폰 바꾸려고요.”
“그러시구나. 그 제품 이번 달 1일에 출시된 신제품이에요. 저번 시리즈보다 카메라가 많이 개선됐고 디자인도 잘 빠졌고요.”
점원은 핸드폰을 바꾼다는 말에 쏜살같이 달려와 주하얀의 옆에 섰다. 선이 연결된 핸드폰을 손에 들려주는 꼴이 꼭 이 핸드폰을 사야 할 것만 같았다. 그 옆에서 애매한 표정으로 설명을 듣던 주하얀은 곧 핸드폰을 매대에 내려놓았다. 신제품이라면 가격이 셀 텐데 그를 감당할 여력은 없다. 애초에 사려고 했던 건 따로 있었고.
“여기 공짜폰이나 보조금 많이 주는 폰이 뭐예요?”
주하얀은 플래그가 요란하게 걸린 매장 밖, 창문에 붙어있던 [공. 짜. 폰. 100% 지원] 문구를 손으로 가리켰다.
“아, 네에. 공짜폰 쪽 찾으시는구나.”
방금까지의 열성적인 태도를 한풀 꺾은 점원은 그래도 투철한 서비스 정신으로 주하얀을 친절히 다른 매대로 이끌었다. 매장 정중앙에서 모퉁이 한쪽으로 자리가 옮겨갔다.
“이 제품은 재작년에 출시된 모델인데 연말에 출시된 거라 거의 일 년 됐다고 보시면 되세요. 저렴한 가격 중에선 제일 최신으로 보시고요.”
“아아.”
“색상은 화이트, 블랙, 네이비 있는데 다른 색상도 보여드릴까요?”
“네.”
매대 아래 서랍을 열어 목업폰을 꺼낸 직원이 세 색상의 모형을 늘어놓았다. 이전까진 폴더폰을 썼던 탓에 어떤 기능에 대해 말하건 다 훌륭하게 들렸다. 입 아프게 설명하는 점원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주하얀은 기능보단 디자인을 위주로 살피다 그중 하얀색을 골랐다. 계약서를 쓸 때 점원은 이름이랑 같은 색상을 골랐다며 웃었고, 주하얀도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애초 핸드폰에 대해 잘 모르니 고민할 거리도 없었다. 그나마 제일 최신이라는 핸드폰을 고르니 서류 작성만 하면 되었다.
생각보다 싱겁게 진행되는 일에 이종훈은 옆에 앉아 하릴없이 무게만 잡는 걸로 제 역할을 다 했다. 기기값이 거의 없다시피 하는 대신 처음 세 달의 핸드폰 요금이 비싸다는 안내에 주하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입술 삐죽였다. 돈은 모아도, 모아도 샐 구멍으로 자꾸 빠져나간다.
“그럼 너 스마트폰 처음 써보는 거냐?”
“응. 신기하네.”
일을 마치고 가게를 나선 주하얀은 한 시간 후 개통이라 아직 통신 신호도 잡히지 않은 핸드폰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친구들 모두가 스마트폰을 썼기에 동작법은 어깨너머로 봤지만, 막상 내 것이 생기니 조금 생경했다.
기본 앱밖에 깔려있지 않은 앱 서랍을 살피는 주하얀을 딱히 보며 이종훈이 어깨에 팔을 걸쳤다.
“일단 어디 들어가자. 춥다.”
“밥 먹자. 어디 갈까?”
“난 다 좋음. 아, 와이파이 깔린 데로 가자. 어떻게 쓰는지 알려줄게.”
“그래. 근데 와이파이 있는지 어떻게 알아?”
“몰라. 일단 돌아다녀 보자. 안 되면 내가 핫스팟 켜줄게.”
호기롭게 주하얀을 이끈 이종훈은 제 핸드폰의 와이파이 검색을 켜 시내를 두 바퀴 돈 끝에 신호가 가장 강하게 잡히는 가게를 찾아냈다. 이종훈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스마트폰 작동법을 설명하느라 바빴고, 덩달아 주하얀도 그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결국 개통이 되기도 전에 열 개 가까운 앱이 깔린 핸드폰을 들고 식당을 나온 주하얀은 길을 걸으면서도 핸드폰만 바라보다 벌써 중독자가 된 거냐는 이종훈의 핀잔에야 머쓱하게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었다.
찌르르―
높은 담에 달린 초인종을 누른 주하얀이 끌어안고 있는 두루마리 휴지 더미를 추켜올리며 한걸음 물러났다. 혹여 인터폰에 얼굴이 비출까 민망해 자신을 숨긴 것이다. 하지만 잠시 기다려도 안에선 기척이 없었다. 분명 오늘 외출할 계획이 없다고 했는데. 결국 당황해 다시 초인종을 누르고 얼굴까지 카메라에 가까이 들이대고서야 대문은 철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조금은 의아하고 다소 안도하며 좁은 마당으로 올라가자 신이혁은 밖까지 나와 현관문을 열어 잡고 있었다. 주하얀은 걸음을 조금 더 빨리 해 다가왔고, 신이혁은 품 안에 무언가 빠듯하게 든 걸 보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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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Dear my security)
잔희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