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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25화 (25/61)

25화

좁은 반지하 방이 소음으로 가득하다. 급히 서랍을 여는 소리, 헤집은 장롱 안 옷감이 마찰하는 소리, 몸을 납작 엎드려 낑낑대는 소리가 요란하다.

“에휴 허리야….”

아침부터 온 집안을 뒤집어엎은 범인인 주하얀은 혹여 자신이 까먹은 것이라도 있을까 따로 번호까지 붙여놓은 공책을 옆에 펴두었다.

1. 옷장 아래 - XX은행/비밀번호:XXXX

2. 여름 청바지 주머니 - XX은행/비밀번호:XXXX

3. TV 서랍 핸드폰 사용 설명서 사이 - XX은행/비밀번호:XXXX

4. 싱크대 아래 나무벽 뒤 – XX은행/비밀번호:XXXX

총 네 개의 통장과 꾸깃하게 접힌 종이를 나란히 둔 주하얀은 통장의 마지막 장에 찍힌 잔액을 노트의 빈 부분에 옮겨 적어 모두 더했다. 1의 자리까지 전부 더한 결과는 종이에 적힌 목표액보다 딱 30만 원이 더 많았다. 물론 여기서 월세며 공과금이 빠지면 잘해야 제로에, 까딱하면 마이너스였지만 그래도 벌써 일을 해치운 것처럼 배가 불렀다.

신이혁의 집에서 지낼 적 쭈뼛거리며 컴퓨터를 쓸 수 있을지 물어봐 뽑아온 등록금 고지서를 손바닥으로 눌러 빳빳이 폈다. 죄 열린 통장 중 얼마 전 아르바이트비가 들어와 유일하게 잔고가 100만 원이 넘는 통장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곤 두꺼운 비닐에 통장을 끼워 넣었다.

“주하얀 부자다, 부자.”

등록금 납부 기한은 다음 주부터 시작이지만 벌써 설레고 걱정돼 기껏 숨겨둔 통장을 일찍이 끄집어내 버렸다. 미리 제일 자주 쓰는 통장에 돈을 옮겨둘 생각이다.

통장마다 안심번호 카드와 현금카드가 있기도, 없기도 했지만 주하얀은 대부분의 거래에서 통장 사용을 선호했다. 남은 잔고를 바로 확인할 수 있을뿐더러, 인터넷뱅킹이나 텔레뱅킹은 자신에겐 아직 어려웠다.

겹쳐 잡은 통장을 패딩 주머니에 넣은 주하얀은 혹시 길에 떨어트리기라도 할까 주머니 지퍼를 꼭 잠그곤 집을 나섰다.

위잉-

나란히 붙은 4대의 ATM 기기 앞에 줄을 선 주하얀은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알바 시간까진 한 시간 남짓. 전에 은행에 들렀다 지각을 한 탓에 서둘렀더니 오히려 출근까지 시간이 제법 남았다. 핸드폰을 켠 김에 습관처럼 앱 서랍을 돌아다녔다. 제일 싼 요금제는 데이터 크기가 작아 인터넷엔 들어가지 않았다. 메시지 창의 친구 목록만 뒤적이던 주하얀은 곧 부스럭거리던 앞사람이 자리를 뜨자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기계 앞에 섰다.

[화면을 보고 원하시는 거래의 버튼을 눌러주세요.]

먼저 잔고가 제일 적은 통장의 잔액을 옮겼다. 통장에 적힌 잔고와 똑같은 금액이 기계에 찍혔다. 대조하듯 아르바이트비 통장을 화면 옆에 놓고 계좌번호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무사히 돈을 옮긴 주하얀은 빈 통장을 옆에 치워두고 다음 통장을 집어 들었다. 동일한 과정을 진행했다.

기계의 단계를 따라가니 일은 일사천리였다. 다시 잔고가 0이 되어 기계에서 뱉어진 통장을 치웠다.

마지막으로 아르바이트비 통장을 제외하고 제일 잔고가 많은 통장을 집어넣었다. 이곳에 남은 육십만 원만 옮겨두면 일단 준비는 끝이다. 절로 신이나 무릎을 까딱이며 비밀번호를 입력한 주하얀은 넘어간 다음 화면을 보곤 몸을 뚝, 멈춰 세웠다.

잔액 3,524원

사람이 너무 놀라면 정말 심장이 쿵 내려앉는구나. 아빠가 도망간 이래 몇 달 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제 자리에 멀쩡히 있을 심장이 떨어지기라도 한 듯 가슴팍에 무언가 확 부딪혀온다.

“…….”

급히 취소 버튼을 눌러 통장을 빼낸 주하얀은 처음부터 다시 기계를 작동했다. 오류이길 바라는 마음이 우습도록 화면에 뜬 잔액은 아까의 숫자에서 변동 하나 없었다. 또 시도해보아도 같은 결과. 쿵쿵대는 맥박이 가슴에서도, 귀 옆에서도, 심지어 손끝에서도 울린다.

주하얀은 기계 위에 널브러진 빈 통장을 쓸어 쥐고 바로 몸을 틀었다. ATM 기기가 모여있는 곳 옆 계단을 뛰어 올라가 은행 창구로 향했다. 점심시간을 빗긴 평일 오후의 은행은 한산했다. 당장 번호표를 받아 확인하면 앞으로 고작 두 사람의 대기인이 있었다. 하지만 참을 수 없이 초조해진 주하얀은 쓰리도록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띵동

알림음과 함께 창구에 주하얀의 대기번호가 뜨자 달군 의자에 앉았던 듯 벌떡 일어나 얼른 다가갔다.

“저 제 통장 잔고가 알고 있던 거랑 다른데 이게 맞나 모르겠어서요.”

이전 업무를 마무리하느라 몸을 틀고 앉았던 직원이 채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먼저 용건을 꺼냈다. 창구에 놓인 플라스틱 바구니에 통장도 올려두었다. 은행 업무를 볼 적에 조급히 구는 사람은 많다. 고객의 다급함을 알아챈 직원이 친절히 응대해주었다. 단순 조회였기에 잔액 결과는 빠르게 나왔다.

“잔액 삼천오백이십 사원으로 나오세요.”

“그, 근데 저는 그 통장에서 돈을 쓴 적이 없거든요.”

“이 통장 사용하신 적이 없는데 잔액이 빠져있단 말씀이시죠?”

“네.”

“혹시 최근에 돈을 뽑아오라거나, 이체하라는 류의 전화를 받으신 적 있을까요?”

“아니요. 없어요.”

아마 보이스피싱을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최근 핸드폰을 바꾸며 인터넷뱅킹을 알게 됐다. 텔레뱅킹도 마찬가지다. 유일한 수단인 통장은 집안 어딘가에 처박혀 있었으니 건드린 적도 잘 없었다.

고개를 젓는 주하얀을 보고 직원도 덩달아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음…. 그럼 일단 최근 한 달 사용 내역 뽑아드릴게요. 확인해보시겠어요?”

“네, 네…. 부탁드릴게요.”

주하얀이 끄덕이는 고개를 따라 같이 고개를 주억거린 직원이 모니터로 고개를 돌린다. 창구 테이블 위로 올린 손을 만지작거렸다. 키보드를 두드리고 마우스를 움직이던 직원이 곧 자리에서 일어난다. 돌아온 손에는 종이 한 장이 들려있었다.

“여기 내역이고요. 확인 한번 해보세요.”

종이를 넘겨받은 주하얀은 날짜순으로 정렬된 목록을 훑었다. 이미 한 달 이전부터 돈이 빠졌는지 1번에 기재된 잔액도 주하얀의 기억과는 달랐다.

당연하지만 전혀 모르는 내용이다. 심지어 지역명인 듯 상호 이름 앞에 반복적으로 보이는 글자는 존재조차 모르던 곳이다. 심각한 눈으로 종이를 내려보고 있자 직원이 덩달아 종이에 관심을 두었다.

“내역이 사용처명으로 나오는 거 보니까 체크카드 사용하신 것 같은데, 혹시 카드 같이 가지고 계신가요?”

“…카드요?”

“네. 어….”

잠시 말꼬리를 끌며 컴퓨터를 두드린 직원이 다시 주하얀을 돌아본다.

“통장 개설 당시에 현금카드 겸용으로 체크카드도 동시 발급받으셨거든요.”

주하얀은 바로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통장 비닐을 확인했다. 하지만 통장을 빼 흐느적거리는 비닐은 비어있었다. 혹시 몰라 다른 통장까지 다 꺼낸 주하얀은 통장 옆에 끼어있던 카드를 빼 들이밀었지만, 카드번호가 달랐다. 남은 카드라곤 주하얀이 주로 쓰는 월급통장의 체크카드밖에 없었다.

통장에 딸린 카드를 어떻게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을까. 심지어 자주 쓰는 통장이 아니라 주하얀도 간혹 저축할 때나 한 번씩 꺼내본 게 다였다. 어딘가에서 떨어질 리도 만무하고….

거기까지 생각한 주하얀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벼락처럼 스친 생각 때문이었다.

“아빠….”

주하얀이 집안에 숨겨둔 통장에 손을 댈 사람이라면 한 사람밖에 없다. 물론 그 사람으로부터 숨기려 부러 숨바꼭질하듯 통장을 숨긴 거였지만 집을 혼자 쓰는 것도 아니고, 찾아낸대도 놀라울 일은 아니다. 자식까지 버리고 간 인간이 그 자식의 돈에 손을 댄 것도 역시, 놀라울 일이 아니다.

주하얀은 순간 허탈해 무너지듯 몸을 뒤로 기댔다. 고객용 의자에 허리 위까지 오는 등받이가 있어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그대로 넘어졌을지도 모른다. 한참 심각히 굴다가 갑자기 허물 듯 멍해진 주하얀을 보고 직원이 “고객님?”하고 불렀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직원에게 작년 12월 말부터의 사용 내역을 다시 뽑아줄 수 있겠냐고 요청했다. 처음 받았던 내역보다 4건이 더 추가된 종이를 받아 든 주하얀은 감사하다며 고개를 떨어트리듯 숙이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

* * *

“…얀아. 주하얀.”

차에 탄 후 내내 생각에 잠겨있던 주하얀은 뒷목에 닿는 미온한 손길에야 다시 현실로 토해져 나왔다.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목뒤를 부드럽게 주무르는 손에 어깨를 늘어트렸다.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굳히고 있었나 보다. 옆자리에 앉은 신이혁의 몸이 조금 가까워진다. 제대로 마사지를 해주려는지 손이 어깨와 등 언저리에도 내려앉는 걸 느끼며 주하얀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계획을 전면적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다.

소중히 모은 등록금 일부가 주길우 손에 날아간 건 통탄할 일이었지만 마냥 아쉬워한다고 돌아올 돈이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주하얀의 평일 아르바이트비가 적지 않았다. 생활비를 줄이고, 집주인에게 월세를 다음 달에 한 번에 내겠다고 양해를 구한다면 등록금을 낼 수 있다. 아빠가 통장거래에 밝지 못한 데 더해 연체되기 일쑤였기 때문에 월세 날이 되면 주인아저씨가 직접 집에 찾아와 월세를 받아 가곤 했다. 아마 싫은 소리를 들을지언정 사정을 한다면 면전에 대고 매정하게 굴진 않을 테다.

“아아….”

단단한 손끝이 피부 위를 누를 때마다 고통과 동시에 시원함이 올라온다. 절로 앓는 소리를 내며 손길에 따라 몸을 흔들거리던 주하얀은 척추 옆을 엄지로 꾹 눌러 내려간 손이 허리까지 닿자 구부정하던 상체를 세웠다. 팔을 두른 자세 덕에 신이혁에게 끌어안긴 꼴이 됐다.

“몸이 왜 이리 뭉쳤어. 어린놈이.”

“모르겠어요. 청소를 너무 열심히 했나.”

“알바 잘 뒀네.”

낮게 웃은 신이혁이 등을 손바닥 아래로 꾹 눌렀다. 끄응 소리를 내며 앞으로 밀린 주하얀은 바투 붙어 자꾸만 턱 아래 스치는 코트 때문에 힘을 줘 몸을 빳빳이 세우다, 이내 힘에 부친 지 볼을 묻어버렸다. 기댈 곳이 생기니 절로 몸에 힘이 빠져 늘어진다. 웃음의 울림이 몸을 타고 주하얀에게까지 옮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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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Dear my security)

잔희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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