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도박 중독자가 도망가 할 일이 따로 있진 않았겠지. 용케도 그 지역 장을 찾아낸 모양이야. 밑천이야 있을 리 없으니 빌렸을 테고.”
“…네?”
“하필 찾아도 질 나쁜 놈들에게 물렸어. 하긴 신원 보장 안 되는 도망자한테 돈 대줄 곳이야 뻔하지. 그나마 오래지 않아 이 꼴이 난 덕에 액수가 크진 않아. 오백도 안 되니까.”
죽을 뻔한 경험이 되려 살린 꼴이지. 신이혁은 습관처럼 안주머니를 뒤지다 빈손을 빼내곤 제 입술을 가만가만 만졌다. 아마 담배를 피우려다 장소 탓에 그만둔 성싶다.
주하얀은 문득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제 됐다고 생각했다. 비록 지금의 상황이 버겁고, 일순 허탈하게 만든다 해도 자신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그저 존재함 이상의 역할을 못 하는 가족이나 자신을 가두던 어린 나이에서 벗어나 이제야말로 정말 자립의 기회가 온 거라고. 사회에 나오기도 전에 매일 끼니 걱정을 해야 하며, 담보 취급하는 사채업자가 있어도 그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새까만 어둠엔 바늘구멍을 통해 드는 빛도 너무 찬란하고 커 보이니까. 그 빛으로 나를 다 적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겨우 기어올라 그 빛에 다다랐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오르고 있는 게 아니라 미끄러지고 있었나 보다. 언제나와 같은 이유로, 수단으로.
“하얀이 이제 저당 잡힌 곳이 두 군데가 됐네.”
타인의 절망을 말하면서 그는 즐거워 보였다. 그럴 수밖에. 그는 주하얀이 어둠 속에서 목도한 인물이다. 언뜻 빛에 가까워 보여도 결국은 어둠이었다.
“안심해. 그래도 이미 담보 설정한 걸 다른 곳에 내주진 않으니까.”
“…….”
“귀엽게 겁먹어서는.”
신이혁의 손이 주하얀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금세 부스스해진 머리를 빗어 정리해주는 동안에도 주하얀은 고개만 떨구었다.
“품 필요해?”
“…….”
“품. 안고, 토닥토닥.”
그의 말에 잠시 들었던 목을 다시 숙이며 고개를 저었다. 우스운 얘기다. 누가 누굴 위로해주겠다고. 하지만 당연하게도 신이혁은 손을 뻗어 어깨를 감쌌다. 당기는 힘에 기우뚱한 몸이 곧 딱딱한 가슴팍에 기대이고, 수그린 고개가 목 옆으로 끼워진다. 애초에 품이 필요하냐는 건 물음이 아니라 통보였나. 이런 행태도 그다워 발버둥이라도 치려던 주하얀은 곧 몸을 늘어뜨렸다. 저항하는 것도 일이다. 머리가 복잡하니 몸을 움직이는 데에 더 큰 힘이 필요하다. 닿은 몸으로부터 전달되는 웃음의 진동을 느끼며 주하얀은 신이혁의 허벅지 위로 늘어뜨린 손끝만 퉁겼다.
* * *
“오늘은 내 집에서 자고 가.”
“네?”
“딱딱한 바닥보단 침대가 낫지 않겠어? 피곤할 텐데.”
“…….”
“특별히 숙박비는 안 받을게.”
조수석 등받이에 걸친 팔이 아래로 늘어져 주하얀의 머리칼 끝을 건드린다. 농 친 말에도 웃지 않고 가만하던 주하얀이 곧 푹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혁은 입꼬리를 올려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차를 몰았다.
그의 말대로 몸도, 정신도 피로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지금 주하얀에겐 깨끗한 욕실과 편한 잠자리가 간절했다.
“감사합니다.”
“뭐가.”
“옆에서 도와주신 부분…. 그냥, 이거 저거 다요. 감사합니다.”
절망적인 소식을 듣고 품에 기대 있기도 잠시, 주하얀이 해야 할 일들은 꽤 많았다. 병원에 환자의 아들임을 밝히고 보호자를 자신으로 바꿨으며, 대략적인 치료 경과를 들었다. 틈틈이 받은 치료에 따른 병원비도 검색해보았다.
그 모든 것은 신이혁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다. 입원 경험은커녕 병원이라곤 동네 의원밖에 모르는 주하얀이 할 수 있는 건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니고, 앵무새처럼 그가 일러주는 말을 하는 것뿐이었다.
후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늦은 오후가 되도록 안내를 명목으로 주하얀의 허리를 끌어안고 병원을 오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귀찮은 내색 없이 시종 친절한 태도를 보였다.
“별말씀을.”
“…….”
“감사는 위치 잘 보고 떨어진 네 아버지한테 해. 안 그랬으면 지금쯤 흰 천 쓴 모습을 봤을 테니까.”
신이혁은 주하얀이 진심으로 감사를 표할 때마다 어딘가 불편한 듯 굴었다. 이번에도 공치사를 거절하며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하지만 주하얀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고, 이번 일은 분명히 감사해야 할 일이다. 처음 병상에 누운 아버지를 보러 간 이후 고집스레 병실로 향하지 않고 병원을 배회하는 주하얀의 옆을 그는 어떤 재촉 없이 지켜주었다. 종일 그의 주의에 감싸여있었다. 오늘 자신에게 더없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래도…. 감사해요. 정말.”
주하얀은 숨과 함께 작게 속삭였다. 혼잣말에 가까웠고, 이번엔 그도 달리 부정의 말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은 무의식 중 신이혁을 좋은 사람이라고 치부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는 자신에겐 대개 부드러웠다. 대부분 다정했고, 때때로 친절했으며 드물게 무서웠다. 그 간극에 주하얀은 간혹 아리송했다. 그가 자신에게 바라는 건 무엇인가, 자신이 그에게서 보는 것은 무엇인가.
“아. 깼다.”
몸으로 전해지는 차체의 진동이 멎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불편하게 제 어깨에 볼을 기대 졸던 주하얀은 저를 옥죄는 벨트가 탁, 풀어지는 느낌에 어렴풋이 잠에서 깨어났다. 곧 목 아래 등 뒤와 무릎 뒤로 비집는 팔에 몸을 뒤척이며 멍멍한 눈을 뜨자 엉거주춤하게 다가온 남자가 보인다. 막 자신을 안아 올릴 것처럼 가까이 다가온 신이혁이 아쉬운 듯 웃었다.
“집 다 왔어. 일어나.”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살피는 주하얀의 눈두덩이를 문지른 신이혁은 어깨를 눌러 밀어내는 힘에 순순히 몸을 바로 세웠다. 깨어나면 이럴 걸 알아 조용히 안고 갈 심산이었는데. 쯧. 작게 혀를 차는 소리에 아쉬움이 묻어난다.
“저녁은.”
“입맛 없어요….”
“조금이라도 먹지.”
거듭된 권유에도 고개를 젓는다. 풀 죽은 모습을 본 신이혁도 지금 필요한 게 밥 보단 휴식이라 생각했는지 곧 수긍했다.
“그래. 그럼 얼른 씻고 자. 옷 몇 벌 사다 놨으니까 씻고 그거로 입고.”
힘이라곤 죄 빠져 알겠다고 대답한 주하얀은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개중 익숙한 방을 알아서 찾아 들어갔다.
뭉기적거린다고 침대에 누웠다간 그대로 잠들 것 같아 바로 욕실로 가서 몸부터 씻었다. 지난번 쓰던 칫솔까지 그대로 있는 욕실에서 한참 따듯한 물을 맞던 주하얀은 손끝이 쭈글쭈글해지고서야 서랍장에 있는 샤워가운을 꺼내 입었다.
무슨 근거로 자신이 또 이 집에 올 거라고 생각했는지, 옷을 사두었다는 그의 말에 지난번 텅 비어있던 장롱 문을 연 주하얀은 서랍을 가득 채운 옷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해봐야 편한 옷 한두 벌이 있겠지 싶었는데, 종류별로 정리된 옷을 봐선 이것들로 1년도 날 수 있을 것 같다. 총 3단의 서랍장을 다 열어본 주하얀은 그중 포장도 뜯지 않은 속옷과 부드러운 소재의 잠옷을 꺼냈다. 손님용 옷일 테니 편히 입어도 되겠지.
잘 때도 낡은 티셔츠와 추리닝만 입어봤던 주하얀은 몸에 달라붙는 실크 잠옷이 어색해 앞섶을 몇 번이나 잡아당겼다.
“으, 느낌 이상해.”
차갑고 간지러운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움직일 때마다 살랑거리는 원단이 차갑게 닿는다.
“꼭 안 입은 것 같아.”
몸을 이리저리 꼬아 반질한 옷을 내려보던 주하얀은 침대에 올라가 앉았다. 잠시 가부좌를 틀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머리가 대강 마를 때쯤 침대에 누웠다.
하루 종일 시달린 마음의 피로가 수면제 역할을 해주었다. 물에 감싸인 것처럼 감각이 일렁인다. 이른 밤임에도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 주택가는 고요하다. 간혹 들리는 자동차 소리도 둔해진 귀에 먹혀 멀어진다. 내내 머릿속에 돌던 생각이 사소해지고, 숨만 겨우 쉴 수 있을 만큼 잠기는 수면에 곧 정신이 아득해졌다.
화장실이 가고 싶어 깨어난 건 앞도 분간하기 힘들 만큼 어둠이 앉은 후였다. 듬성듬성 세워진 가로등 빛은 새벽의 어둠을 다 몰아내기엔 역부족이다. 밤새 차가 오가는 번화가에서도 거리가 있는 고급주택단지는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집은 주하얀은 눈이 아프도록 밝은 빛에 미간을 찡그렸다. 겨우 밝기를 죽이고 확인한 시간은 새벽 3시에 달했다. 아직도 아린 눈가를 쓸어내리고 배터리가 5%인 핸드폰을 충전기에 연결한 후 방을 나섰다.
화장실이 코앞이니 다녀와 바로 다시 잠들 생각으로 눈을 비비적대며 걷던 주하얀은 어쩐지 어둡지 않은 집안에 주위를 살폈다.
주하얀의 방이 있는 2층 복도의 불은 꺼져있었지만 1층에서 불빛이 올라오고 있었다. 혹시 아직 잠에 들지 않은 건가? 벌써 시간은 새벽이다. 아무래도 자러 갈 때 불 끄는 걸 까먹은 성싶어 우선 화장실을 다녀온 주하얀은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귀찮은 마음이 들긴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아끼던 것이 습관이 되어 이런 걸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혹시나 소리가 날까 뒤꿈치를 들고 걷던 주하얀은 거실에 다다르자 보이는 모습에 깜짝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
“하얀이 깼어?”
자는 줄만 알았던 신이혁은 거실 소파에 퇴이하게 앉아있었다. 술을 마시고 있었는지 얼음이 든 큰 컵을 둥글게 돌리던 신이혁은 거실 끝에 멈춰 선 주하얀을 보고 손을 뻗었다.
“가서 더 자지 왜 나왔어.”
말과 달리 내밀어진 팔은 주하얀이 닿을 듯 가까워질 때까지 내려가지 않았다. 결국 걸음을 옮긴 주하얀은 손을 피해 적당한 거리로 다가가 테이블을 내려봤다. 갈색 술병은 평소 알던 소주나 맥주병과 달랐다. 아마 양주이지 싶었다. 과일과 치즈 따위가 올려진 접시를 훑은 시선이 먼 벽에 붙어있는 티브이에 닿았다. 저를 배려한 건지 음소거된 티브이는 화면만 연신 바뀌었다.
그러고 보니 저녁을 먹지 않았지. 허기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놓인 뜯지도 않은 크래커 박스를 끌어왔다. 뒤늦게야 양해의 말 하나 구하지 않았음에 찔려 고개를 드는데, 신이혁은 오히려 음식이 올려진 접시를 주하얀의 앞으로 밀어 넣어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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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Dear my security)
잔희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