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어 마이 세큐리티-29화 (29/61)

29화

“잘 잤어?”

“네.”

“그래. 그래 보이네. 눈이 부었다.”

신이혁의 손이 눈썹을 쓴다. 주하얀은 눈을 감았다 떴다.

“내일도 아빠 보러 갈 거야?”

“아니요.”

마음 같아선 타지에 내팽개치고 싶지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주하얀은 아빠를 우상동 인근 대학병원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환자의 치료 경과가 양호해졌을 때로 예정했으니 아마 멀지 않은 시기가 되겠지. 그때나 한번 방문할 생각이었다. 애초에 가까이 두게 되었다고 자주 들여다볼 마음 따위는 들지 않았다.

“그럼 내일은 뭐 할까.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아, 저는 집에….”

“왜?”

당초 날이 밝으면 바로 집으로 돌아가려던 주하얀은 말문이 막혀 멈칫했다. 왜라니. 자신이 이 집에 더 머무를 경우야말로 '왜'가 필요한 상황 아닌가.

“월요일에 가도 되잖아.”

주하얀의 당황쯤은 애초에 고려 범위가 아니었나 보다. 기색을 살피는 눈치조차 없다. 아예 들고 있던 술잔까지 내려놓고 주하얀 쪽으로 몸을 돌려 앉은 신이혁은 소파 등받이 위에 팔을 괴었다.

“쇼핑 갈까. 하얀이 옷이나 사주게. 고르는 건 내가 해줄게. 입는 것도 도와줄 수 있고.”

그가 왜 자신의 옷을 사주는가. 그리고 어린아이도 아니고 옷 입는 걸 도와준다니. 주하얀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상한 문장에 인상을 쓸 동안 신이혁은 즐거운 듯 소파에 놓인 손등 위를 두드렸다. 건반을 누르듯 투둑 떨어지는 손끝이 차갑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인 주하얀은 곧 이유를 알아채곤 테이블에 덩그러니 놓인 술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게 먹어봐야 냉동실에 넣어뒀다 먹는 소주와 달리 양주는 직접 얼음을 담가 먹나 보다. 전에 뉴스에서 양주에 불을 붙여 먹다 크게 다친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이 술은 다른 건지 모르겠다.

딱히 그의 말에 맞장구칠 거리를 찾지 못한 주하얀은 차라리 다른 곳에 관심을 돌렸다. 물론 신이혁은 헛생각에 빠진 것을 귀신같이 알아챘다.

“먹어보고 싶어?”

듣는 둥 마는 둥 넘기던 소리가 불쑥 귀 옆에서 들리자 주하얀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놀라 홉 뜬 눈으로 고개를 돌리면 가까이 다가왔던 신이혁이 슬슬 물러난다. 이미 숨이 다 흩어진 귀를 만지작대는데 그가 물었다.

“술 먹어본 적 있어?”

“…네.”

잠시 생각하던 주하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이었지만 마셔보긴 했다.

“뭐 마셔봤는데.”

“음… 소주요.”

“성인 되고?”

“네. 어, 고등학교 때도 조금….”

수능이 딱 백일 남았을 때에 백일주라며 혼자 몰래 마셔보았다. 아빠가 드물게 집에 올 때면 항상 술을 사 왔기에 굳이 힘들여 살 필요는 없었다. 상에 안주랍시고 먹을 것도 차려두고 차가운 소주병을 땄지만, 코를 찌르는 알코올향에 반도 채 먹지 못했다.

그때의 기억이 있어 1월 1일을 벼르고 있던 이종훈이 술집에 끌고 갔을 때도 자신은 맥주만 홀짝였다. 물론 맥주라고 맛있진 않았다.

“생각보다 발랑 까졌네, 하얀이.”

의외였는지 놀라는 목소리가 붕 뜬다. 검지와 중지 등으로 꼬집듯 볼을 쓴 신이혁이 여태 늘어뜨리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잠시 고민스러운 듯 주하얀을 살폈으나 열심히 음식을 주워 먹는 꼴을 보더니 조금쯤은, 하고 작게 혼잣말을 한다.

자신이 마시던 잔을 옆으로 밀어 두고 그거보다는 작고 길쭉한 잔을 앞으로 끌어와 잔을 채운다. 술의 색은 병과 같은 갈색이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병은 투명했다. 갈색은 온전히 술의 색이었나 보다.

“마셔볼래?”

“음….”

“겁나면 안 마셔도 돼.”

“…. 주세요.”

잔의 반도 되지 않을 정도. 딱 한 모금의 양이 따라진 잔을 보며 주하얀은 고심하듯 입을 한일자로 다물었다. 신이혁은 어린아이를 어르는 말투를 했다. 눈빛을 보아하니 정말 강권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아마 끝내 거절한다 해도 그럴 줄 알았다며 잔을 거두겠지.

하지만 주하얀은 못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었다. 반쯤은 치기 어린 행동이었다.

“목에 바로 털어 넣어.”

“네.”

“혀에 닿지 않게 바로 목구멍으로 넣는다고 생각하고.”

그는 잔을 건네며 당부했다. 자신은 술에 얼음을 넣어서 먹더니 그냥 먹을 때도 방법이 다른가보다. 잔을 건네받아 냄새를 맡아보았다. 술이니만큼 좋은 향은 아니었지만, 기억 속의 소주 향과 달랐다. 독한 냄새에 움찔해 고개를 들어 올린 주하얀이 그의 말을 되새기느라 시선을 앞으로 고정하는 동안 그는 가만히 눈을 맞추었다.

혀에 닿지 않게, 목구멍에 바로. 설명서에 적힌 순서를 곱씹듯 속으로 몇 번 중얼거린 주하얀이 조금은 급하다 싶게 잔을 입술에 댔다.

“윽.”

역시 설명으로 듣는 것과 직접 해보는 것엔 차이가 컸다. 신이혁의 말대로 술잔을 털 듯이 입안에 부어 넣기까지는 괜찮았는데 순간 목구멍이 닫혀 단번에 넘기지 못했다. 졸지에 입안과 혀를 알코올로 샤워한 후에야 술을 겨우 넘긴 주하얀은 순식간에 화해지는 입안에 엉덩이를 들썩였다.

“아! 으.”

물을 찾으려 테이블을 훑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이젠 목 아래까지 뜨거워져 당황한 주하얀이 썰어둔 과일을 집어 입에 물었다. 급한 결에 포크를 쓸 정신도 없어 손으로 집었다.

그 사태를 보고 신이혁은 예상한 바인지 웃음만 흘렸다. 되려 주하얀의 목 안쪽부터 가슴까지를 검지로 쭉 그으며 술이 내려가는 게 느껴지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게 잘 먹으라고 했잖아.”

웃음기가 밴 목소리로 말하며 신이혁은 내려두었던 자신의 잔을 다시 끌어와 쥐었다. 그 술을 한 모금 가득 마시고도 평온하게 치즈 조각을 주워 먹더니 순식간에 아롱해진 주하얀의 눈꼬리를 더듬었다.

“아직 하얀이가 먹기엔 너무 독했나 보다. 미안. 뚝 하고.”

순순히 사과한 신이혁은 물론 미안한 기색 하나 없었다. 오히려 귀여운 어린아이의 재롱을 감상하는 식의 반응이었다.

“냉장고에 소주가 있긴 할 텐데 그거 가져다줄까. 아, 소주는 잘 마시나?”

“…아니요. 그냥 이거 더 주세요.”

금방이라도 일어날 기세로 상체를 반쯤 세운 신이혁이 막 몸을 들썩일 때 주하얀이 불쑥 말했다. 혹시 못 알아들었을까 던지듯 내려뒀던 잔까지 다시 집어 오는 게, 이미 눈엔 대상을 모를 승부욕이 그득했다.

“양주 별로인 거 아니었어?”

“처음, 큼…. 처음 마셔봐서 그래요. 이제 괜찮아요.”

“하얀아. 술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먹는 거야. 무리하지 말고. 아니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그냥 음료수 가져다줄 테니까 그거 마셔.”

“괜찮다니까요? 저 지금 완전 더 마실 수 있어요. 이제 속도 괜찮아요.”

거짓말이다. 아직 입안과 식도에 화끈한 기가 남아있었지만, 자신을 애 취급하는 그의 태도가 고집을 부리게 한다.

그 와중에도 예의를 차린답시고 두 손으로 술잔을 내밀고 있는 주하얀을 바라보는 신이혁의 눈 끝이 슬쩍 접힌다. 못 마시겠으면 얘기해. 억지로 마실 필요 없어. 어르듯 말하면서도 그는 아까와 같이 술잔을 조금 채워주곤 물을 가져와 술 위에 몇 방울을 떨궈주었다.

“혀에 닿지 않게, 목구멍에 바로.”

술잔을 입 앞에 댄 주하얀이 주문처럼 말했다. 이미 한 번의 고통을 느꼈던 몸이 절로 긴장한다. 잠시 손을 움찔이며 망설이다 눈을 꼭 감고 술을 털어 넣은 주하얀은 이번엔 매끄럽게 술을 넘겼다. 혀끝에 닿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아까처럼 양치하듯 온 입안을 다 적시진 않았다.

자신이 해놓고도 놀라 앞을 쳐다보자 신이혁은 웃으며 입에 멜론을 넣어주었다. 과일과 함께 손끝이 입안에 들었다 나간 것도 모르고 주하얀은 제 목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달큼한 과일을 우물거렸다.

“잘했네. 이번엔.”

“네. 완전 완벽, 윽.”

자신의 쾌거에 즐거워하던 주하얀은 어김없이 식도를 뜨겁게 달구며 내려가는 술에 잠시 진저리를 쳤다. 수분을 넘겨야 할 것 같아 입이 비지 않도록 넣어주는 과일을 열심히 씹었다.

한번 성공하자 두 번 세 번은 쉬웠다. 화끈하니 뜨겁던 속이 진정될 때마다 술을 받은 주하얀은, 매번마다 안주에 기대느라 과일접시를 다시 채워와야 할 쯤에는 꽤 술이 올라있었다. 세 번째 잔부터는 스스로 한답시고 그를 따라 잔을 채우다 물을 제법 많이 타 마셨음에도 그랬다.

“하얀이 괜찮아?”

신이혁이 자리를 비운 사이 테이블에 놓인 온 더 락 잔을 가져와 한 모금을 마신 주하얀은 묘하게 밍밍한 맛에 혀를 쭉 뺐다. 이미 마비된 감각에 속이 화한 느낌도 무뎌졌다. 그대로 소파에 쿵 쓰러져 누운 주하얀은 풀린 눈만 깜빡였다. 곧 부엌에서 돌아온 신이혁이 그 꼴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일단 위태롭게 쥐고 있는 잔을 뺏어 테이블에 도로 올려놓고, 겨드랑이 아래로 팔을 넣어 몸을 일으켜주었다. 묵직하게 들리는 체중에 잠시 어쩔까 고민하던 신이혁은 소파에 앉아 자신의 허벅지 위에 주하얀을 올려두었다. 뒤로 자빠질까 무릎을 세워 지탱했더니 몸이 쭉 미끄러져 내려온다. 배 위에 애매하게 걸터앉아 자세가 영 편하진 않았지만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

“아 뭐에요오.”

감감하던 주하얀이 뒤늦게 자신의 자세를 알아채고 몸을 뒤틀려고 할 때마다 입에 과일을 넣어주었다. 그럼 씹는데 집중한 몸이 다시 늘어진다. 손끝에 묻은 물기를 쪽 빨아먹던 신이혁이 잔뜩 풀어져 입만 오물거리는 모습에 참지 못하고 양 볼 옆을 손으로 감쌌다.

“하얀아. 왜 이렇게 귀여워. 볼은 불덩이가 돼서는.”

취기로 화끈거리는 얼굴 만면에 되는대로 입술을 찍자 귀찮은지 고개를 젓는다. 평소라면 진즉 펄쩍 뛰며 2층으로 도망갔을 텐데 확실히 정신이 온전치 못한 모양이다.

처음 무릎이며 눈두덩이 따위의 신체에 입 맞춘 후 유난히 예민하게 굴어 다시 입술을 비비는 일은 없었다. 신이혁은 지금을 즐길 요량으로 뜨끈한 볼을 크게 물어 당겼다. 사실 이전에 주하얀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배웅을 핑계로 칙칙한 반지하 방을 방문했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다.

처음엔 입술로만 무나 싶더니 곧 이를 세워 흉이 지지 않을 정도로만 잘근거리자 대번에 우는소리를 낸다.

“하이마아. 아프….”

“하지 마? 왜 하지 마. 조금만 물고 있을게.”

“아파아…. 이제 그만.”

그러며 그의 손 옆으로 손바닥을 대 볼을 감추는 행동이 퍽 앙증맞다. 결국 참지 못한 신이혁이 코끝을 앙앙 물다 입술을 꾹 누르듯 붙였다 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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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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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희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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