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어 마이 세큐리티-31화 (31/61)

31화

“이번 계약은 하얀이랑 할 거야.”

“……네?”

뜬금없이 불린 자신의 이름에 주하얀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과 어떻게 계약을 한다는 거지. 애초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갈 구석이 있는 이야기인가.

“원래 채권 양도양수는 채무자 의사 없이도 진행돼. 그러면 단순히 빚 갚을 채권자 이름만 바뀌는 건데, 나는 그게 딱히 안 끌리거든.”

“…….”

“쉽게 말하자면…. 내가 추가로 돈을 빌려줄 테니 그걸로 혹 달아온 빚 갚아. 대신 빌리는 사람은 주길우가 아니라 주하얀으로.”

신이혁은 사소한 것 하나도 짚어줘야 하는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듯 차분하게 말했다. 친절하지만 단호한 말투로 보아 이미 그의 선에서 계산이 다 끝난 상황으로 보였다. 하지만 주하얀은 아니었다. 그의 설명이 길어질수록 점점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그의 말만 놓고 본다면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왜? 이유 없는 친절은 없는 법이다. 지금 제시한 방법을 통해 그는 자신에게서 무엇을 얻길 원하는 걸까? 그 지점이 주하얀을 모호하게 했다. 원인 없이 결과만 늘어놓는 대화는 겉만 맴돌 뿐이다.

“어차피 이래저래 금전적으로 여의치 않았잖아. 대학 등록금에 생활비, 이젠 주길우 씨 치료비까지.”

“…….”

“일단 천 정도면 급한 불은 끄겠어?”

“천…, 천만 원이요?”

주하얀이 살며 한 번도 욕심내 본 적 없는 액수였다. 자연히 대답을 찾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놀라 되묻는 목소리에 신이혁은 자신의 돈을 쓰겠다고 나선 사람치고 별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에겐 그리 크지 않은 액수일지도 모른다. 덤덤한 상대방의 태도에 주하얀의 마음도 조금 가라앉았다. 잘 실감이 가지 않는 금액인 이유이기도 했다.

“근데 저는 갚을 능력이 없는, 데요.”

문제는 그거다. 타인이 돈을 준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만 빌려준다면 말이 다르다. 게다가 그 큰돈을. 이제 주하얀은 사채란 단어만 들어도 진저리가 쳐졌다.

“감안한 거니까 걱정할 거 없어.”

벌써부터 걱정이 앞서는 주하얀을 쓰다듬으며 얼굴을 기울인다. 하지만 그의 표정 없는 얼굴을 마주 보면서도 막막한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무엇을 감안했다는 걸까. 주하얀의 가난? 혹은 신분? 그렇다면 어디까지 감안해줄 수 있을까. 감안해준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애초에 손해를 보겠다고 나서는 사채꾼은 말부터 이상했다.

“주길우씨가 게임 기록 경신하는 마냥 추가해온 삼백팔십만 원을 먼저 갚아야겠지. 그 돈은 계약상으로만 넘어갈 뿐 정말 너한테 받아낼 생각은 없어. 빚은 진 놈이 갚아야지. 번지수 혼동 없으니까 걱정 말고.”

“…….”

“여타 금액은…. 글쎄. 하얀이 하는 거 봐서.”

방금까지 세심하게 안심시키는 말을 하던 사람치곤 꽤 얄미운 소리다.

결국 제멋대로 하겠다는 거다. 거기에 주하얀의 탓까지 더해서. 절로 불안한 눈을 한 주하얀이 덩달아 흐려지는 시야 안으로 신이혁을 노려보았다. 물론 그 시선을 받는 당사자는 되레 간지러운 눈빛을 받은 양 웃었지만.

결국 제 눈만 뻑뻑해짐을 깨달은 주하얀이 표정을 허물었다. 울렁울렁, 몸을 타고 흐르는 술기운에 표정을 지운다는 게 조금 울적한 얼굴이 됐다.

“근데… 왜 그러시는 거예요?”

“음?”

“왜 저한테 그렇게까지 해주시냐고요.”

“…….”

“저는 그냥 빚 진 놈 아들이고, 쥐뿔도 없는데.”

말해놓고 보니 스스로 제 치부를 드러낸 것 같아 우울해졌다. 마음이 싱숭생숭해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진다.

사실 꽤 오래전에 했어야 하는 질문이다. 비록 당사자는 별거 아닌 일로 새삼스럽게 군다고 하겠지만, 받는 사람 입장에선 괘념치 않을 수준을 진작에 지나쳤다. 더욱이 그들의 관계 국면에선 더 그럴 수밖에 없다.

대출이니, 사채니. 인터넷은 잘하지도 못하고, 세상을 접하는 창은 지지직거리는 TV가 전부인 주하얀이라도 그의 태도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건 안다. 이쯤 되니 모르는 척은 접어두고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었다.

“글쎄…….”

어쩌면 싫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자신만이 편히 넘나들 수 있는 선을 그어두는 남자이니까. 주눅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더라도 마음 쓰진 말자고 홀로 결심했는데, 예상외로 신이혁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웃을 뿐이었다. 얘기해줄까 말까, 주하얀을 살피던 그가 대수롭잖게 말했다.

“당연히, 하얀이 꼬셔보려고?”

“…네?”

“예쁘게 생겼잖아. 난 예쁜 거에 약해서.”

주하얀은 종종 그의 발언에 말문이 막히곤 했다. 그는 서슴지 않고 독설을 내뱉는 사람이었고, 주하얀은 간혹 그의 말에 찔려 사냥꾼을 앞에 둔 사슴처럼 굳어버렸다. 이유는 다를지언정 이번에도 신이혁은 손쉽게 주하얀의 입을 막았다.

예쁜 데다 어리고 상처받은 존재에게 마음 쓰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눈 위로 길게 드리운 앞머리를 가만가만 매만지는 손길이 조심스럽다.

“아예 모르고 있던 것도 아니고.”

신이혁은 애써 숨겨둔 진실을 끄집어내 직시하게 만든다. 주하얀은 그 눈을 마주하면서도 어떤 답을 꺼낼지 몰라 입만 달싹거렸다.

알고 있었다. 어떤 방향으로든, 어떤 형태로든 그가 자신을 특별히 여긴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처음부터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집을 엉망으로 헤집고 자신을 몰아붙인 이들의 위에 앉은 자면서 작은 상처나 눈물 따위에 신경을 썼다. 회유책으로써의 친절이라기엔 자신에게 딱히 바라는 바도 없었다. 무조건적인 관심과 온기. 주하얀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일반적인 경우 개인을 향한 애정의 보급처로 작용하며, 응당 그러기를 기대하는 가족에게도 받지 못한 손길이다. 관계의 아이러니를 끌어안는다 해도 기대지 않을 수 없었다. 익숙해진 건 어쩌면 애정을 갈구한 주하얀의 목마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가 자신의 손을 어루만졌을 때도, 껴안았을 때도, 입을 맞췄을 때도 당장의 반항으로 상황을 모면할 뿐 진심으로 떨쳐내지 못했다. 벗어나야 해. 그렇지만 조금만 더. 어렴풋한 가정을 부정하고, 명확함을 필요치 않다고 미뤄두었다. 어쩌면. 사실. 그래서.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조금쯤은.

의도적인 게으름의 결과로 주하얀은 어떤 항변도 하지 못했다. 신이혁은 그럴 줄 미리 예상했는지 되묻지도, 설명하지도 않았다. 눈에 서린 웃음이 그의 뜻대로 행해짐을 짐작케 했다.

“잠시만…….”

신이혁의 손이 어느 사이 뒷목에 닿았다. 물러서지 못하는 주하얀에게 성큼 다가온다. 오늘만 몇 번인지 모를 입맞춤이 또다. 도둑 뽀뽀를 하듯 빠르게 닿았다 떨어지던 아까와 달리 느리게 입술을 덮었다. 혀도 쓰지 않고 단순히 입술만 부비는 행위에도 자꾸 마음이 술렁인다. 서로 짓눌린 입술이 우물거릴 때마다 주하얀은 어깨를 웅크렸다.

그는 손을 내려 여태 주하얀이 동아줄처럼 쥐고 있던 잔을 빼앗았다. 타의로 허전해져 허공만 매만지던 손이 더듬더듬 그가 입은 얇은 홈웨어를 틀어쥐어 붙잡는다.

아랫입술을 꼬집듯 입술로 문 후 조심스레 혀를 대자 놀랐는지 몸을 흠칫 떤다. 물러나지 못하도록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신이혁은 달래듯 쥐고 있는 뒷목을 손으로 쓸었다.

“흐.”

주하얀이 차오르는 숨에 우는 소리를 낼 때가 되어서야 그가 천천히 몸을 물렸다. 물린 입술이 늘어나 딸려가다 퉁기듯 제자리로 돌아온다. 보지 않아도 피가 몰려 빨개졌을 뜨끈한 살덩이를 안으로 말아 물었다. 맥박이 입술에서 뛰는 느낌이다. 방법 없이 붉게 달아오른 주하얀의 얼굴을 뜯어보는 눈빛이 만족스러운 빛을 띤다.

“하얀이 꼬시는 데 참 애 많이 쓴다. 그렇지?”

놀리는 투로 말끝을 올려 묻는다. 수치를 모르는지 당당한 태도였다. 대답을 갈구하듯 그의 얼굴이 가까워질 때마다 주하얀의 고개는 내려갔다. 푹 숙인 고개 아래로 얼굴을 들이밀 것처럼 장난을 치던 신이혁이 주하얀의 등을 감싸 제 품으로 세게 안았다.

졸지에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주하얀이 버둥거릴 새도 없이 그는 훌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상체가 뒤로 기우뚱한 바람에 놀라 악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다행히 엉덩이 아래를 양팔이 단단히 받쳐 들고 있었다.

“와. 열렬하네.”

온몸을 긴장한 채 매달리는 데에만 온정신을 집중하자 그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럼 민망해진 주하얀은 고개를 비비적대면서도 몸에 힘을 풀진 않았다.

덕분에 신이혁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 많이 부끄러운가. 고작 입술을 맞댄 게 전부인데. 따지자면 속 얘기를 꺼낸 건 이쪽인데 곤란해 보이는 건 주하얀이다. 물론 언어 이외의 것으로 많은 것들을 얻어낸 것도 이쪽이긴 했다. 얇은 옷감을 뚫고 어깨로 전해지는 열기를 즐기며 그는 곧장 2층으로 발을 옮겼다.

아무리 어리고 가볍다고 해도 건장한 남자이다. 걸을 때마다 아래로 처지는 몸에 혹시나 떨어질까 매미처럼 달라붙어 굳어있다 계단에 들어서자 그의 목을 꽉 안았다. 몸을 받친 팔이 꽤 안정적이었음에도 본능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답답했을 텐데도 그는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았으며, 고개를 기울여 얼굴을 맞대 왔다. 오히려 무사히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눕혀진 주하얀은 팔이 다 얼얼해 주먹을 쥐었다 폈다.

“빈속에 술을 많이 마셔서 아침에 좀 힘들 거야.”

“…….”

“하얀이는 어디 가서 술 마시면 안 되겠다.”

자신이 취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말했듯이 특수한 경우이기 때문임을 피력하고 싶었지만 주하얀은 참고 눈만 흘겨 떴다. 이불을 끌어와 목 아래까지 덮어준 신이혁은 그 시선에 웃음을 흘리며 벌써 반쯤 감긴 눈 위로 제 손을 덮었다.

“일단 자. 바로 대답하라는 거 아니니까 잘 생각해보고.”

“…….”

“오늘은 내가 했던 말을 잊지 않는 것만 하자.”

잠에 들기 전 한 침대에 누워 속삭이듯이 작은 목소리다. 주하얀은 입을 벌렸다. 네. 늘어지는 대답 소리는 매우 작아, 어쩌면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울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픽 하고 새는 숨소리만으로도 답을 알아챘는지 그래,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곤 미세하게 틈이 벌어진 입술 옆을 어루만졌다. 조심스러우나 그만큼 간지러운 손길에 주하얀이 볼을 움찔이자 이내 기척이 멀어진다.

울렁거리는 새벽이다. 분명 자신은 누워있음에도 세상이 빙빙 도는 기분이다. 푹신한 이불에 감겨서도 멀미를 할 것 같은 취기를 견디며 색색거리는 동안 신이혁은 눈 위에 얹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 어둠 아래 늦은 밤을 보내는 둘은 그렇게 한참 서로의 숨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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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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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희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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