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어 마이 세큐리티-32화 (32/61)

32화

쿵. 쿵.

주하얀은 차창에 기대 통통 튀는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며 편한 자세를 찾으려 애썼다. 뻑뻑한 눈은 꾹 감았다 떠도 건조하다. 요 며칠 생각에 빠져 잠을 설쳤더니 몸이 금세 죽는소리를 낸다.

이번 정류장은 하신대병원. 하신대병원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곯아떨어져 얼마나 달렸을까. 희미한 가닥으로나마 깨어있던 정신에 쨍한 안내음이 끼어든다. 불편한 쪽잠을 자느라 무거워진 머리로 몽롱히 버스 앞쪽에 뜨는 안내 스크린을 확인한 주하얀은 버스가 내려야 할 정류장에 막 진입하고 있음을 알아채곤 서둘러 하차벨을 눌렀다. 우왕좌왕 채비도 필요 없이 주머니에서 교통카드를 꺼내고 자리에서 훌쩍 일어섰다.

삐익―

“하암.”

버스에서 내리고서야 한발 늦게 하품이 나온다. 꿍하게 굳은 몸을 풀기 위해 기지개를 쭉 켠 후에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을 스마트폰으로 바꾼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젠 제법 익숙해져 없으면 허전할 정도다.

지도 앱을 켜 현 위치와 목적지를 찍고 화면에 뜬 아이콘이 이끄는 대로 길을 따라갔다. 시가지 끝 언덕배기 위에 있는 병원은 차로 스치듯 봤을 때보다 더 크고 높아 보였다.

경사진 정문을 걸어 오르자니 패딩 안쪽으로 후끈하게 열이 오른다. 후드 목부분을 잡아 팔랑거리던 주하얀은 병원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외부에 놓인 벤치에 쓰러지듯 앉아 열을 식혔다.

“아, 더워…. 피곤해.”

패딩을 어깨 아래로 내려 어중간하게 걸친 주하얀은 속의 열과 찬 바람에 발갛게 익은 볼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옷을 팔락일 때마다 뜨끈한 열기가 훅훅하고 빠져나간다.

일단 도착은 했다만 자신이 왜 이 먼 곳에 왔는지 잘 모르겠다.

“하…….”

차오른 숨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 내쉬었다. 전경이랄 것도 없는 병원 정문에 의미 없이 시선을 두었던 주하얀은 돌연 몸을 고꾸라트려 머리를 감쌌다. 요 근래 가만히 있을 때마다 자동으로 떠오르던 기억이 또 그려졌기 때문이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주하얀. 정신 안 차리냐.”

자신을 책망하는 말에 한숨이 오 할이다. 그나마 긴 고뇌 끝에 몇 푼의 체념을 얻긴 했지만 답답한 속을 다 해소하진 못했다. 지금도 괜히 속이 간질한 불편함을 꿀꺽 삼키며 주하얀은 지난날들을 돌이켜 보았다.

“으으. 토할 것 같아….”

주량도 모르고 헤프게 술을 마신 다음 날 주하얀은 당연한 업보처럼 밀려오는 숙취에 배를 움켜쥐기 전에 까치집이 생겨 푸석한 머리를 쥐어뜯어야 했다.

물론 누군가 드릴로 뇌를 다지는 듯한 두통 탓도 있었지만, 그보단 간밤의 잔상이 문제였다.

‘아예 모르고 있던 것도 아니고.’

모든 기억이 다 선명하진 않다. 어느 순간은 영상을 돌린 것처럼 또렷하다가 어느 순간은 안개 낀 화면처럼 뿌옇다. 차라리 신이혁과 나눴던 대화가 휘발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얄궂게도 그 시간의 기억만이 비교적 뚜렷하게 남았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즈려 물었다 두툼한 두께감에 놀라 얼른 뱉어낸 주하얀은 마른 입술을 손등으로 벅벅 문질렀다. 가뜩이나 폭음의 여파로 퉁퉁 부은 얼굴에서 입술만 발갛게 오른 모양새가 됐다.

“후우우.”

주하얀은 우선 마음을 진정시켰다. 구석구석 두드려맞은 듯 아픈 몸을 이끌고 느릿하게 일어난 후에 찬찬한 심호흡만으로 한참의 시간을 보낸 주하얀은 나무늘보처럼 움직여 방 맞은편의 욕실에 들어갔다. 간단하게 몸을 씻기 위해 세면대 앞에 섰는데 거울로 비치는 몰골이 가관이다.

양치를 하는 동안 못난 얼굴을 손으로 비비적거려 봤지만 행색이 나아지는 일은 없었다. 머리를 숙이는 것도 어지러워 물 적신 손으로 고양이 세수를 했다. 그 와중에 깔끔을 떤다고 연거푸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결국 잠옷 상의가 다 젖을 정도로 찬물을 맞은 후에야 만족하고 부드러운 수건에 얼굴을 닦았다. 묘하게 뿌옇던 머리가 제법 개는 느낌이다.

욕실을 나온 주하얀은 잠시 고민하며 복도를 서성이다,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계단 난간 가까이 다가갔다. 목을 아래로 푹 숙여 1층을 내려다보았다.

“…….”

일단 시야로 사람이 보이지는 않았다. 안심한 주하얀은 귀를 쫑긋 세워 소음까지 면밀히 확인하곤 계단을 내려갔다. 평소에도 조심하는 계단을 더 신중하게 밟았다. 혹시 소음이 날까 싶어 깨금발을 들까도 했지만, 너무 나갔나 싶어 그만두었다.

그렇게 조심해서 주위를 살폈건만, 1층으로 막 내려와 바닥에 발을 내리자마자 나름의 노력은 무용이 되어버렸다. 눈에 바로 걸리는 거실 소파에 어제와 같은 자세로 늘어져있는 남자를 발견한 것이다.

소파 쿠션에 팔을 늘어뜨리고 등받이에 고개를 기대 천장을 올려보는 신이혁은 부드러운 긴팔과 면바지 차림이었다. 흐트러진 주하얀의 꼴과는 상반되는 모습이다. 잠시 그 자리에 멈칫하고 섰다 천천히 다시 발을 옮겼다. 그 사이 인기척을 느낀 그는 뒤로 푹 기댔던 고개를 들었다. 사람을 확인하자마자 눈을 접어 웃는다.

“일어났어?”

“…네.”

“속은.”

쭈뼛쭈뼛, 어색하게 주춤대며 다가오는 주하얀을 살핀 신이혁은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갔다. 가까이 왔다 멀어지는 행적을 눈으로 따라갔다. 옆을 스칠 때 보니 샤워를 했는지 머리 끝이 젖어있다.

“음….”

사실 눈을 뜰 때부터 미어지던 속은 빈말로도 괜찮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막상 스스로 아니라고 답하려니 기분이 애매했다. 말을 끄는 주하얀을 보곤 답을 듣지 않아도 충분했는지 그는 물을 한 컵 따라 내밀었다.

“많이 마시진 말고. 밥 먹어야 하니까.”

“네.”

유리컵을 건넨 신이혁이 습관처럼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들었을 때, 물을 마시려던 주하얀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이며 몸을 뒤로 물렸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지만 동시에 의식한 몸짓이었다.

주하얀은 당황해 얼른 물 잔을 기울여 얼굴을 가렸다. 신이혁은 무언가 알아챈 얼굴로 웃더니 그냥 뒤를 돌았다.

속이 쓰린 데만 신경 쓰느라 몰랐는데 막상 물을 마시니 자신이 꽤 갈증 났음을 알았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갈 때면 미약하게나마 울컥거리는 속이 잠잠해졌다. 결국 큰 컵의 물을 반이나 비운 주하얀은 숨을 헐떡이며 젖은 입가를 닦았다.

“하아. 이제 좀 살겠다.”

“많이 힘들었나 보네.”

저도 모르게 중얼대며 어깨를 들썩이는 것을 보고 상대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신이혁은 주하얀을 이끌어 식탁 의자에 앉도록 했다.

안 그럴 것 같이 생겨서 부엌을 오가는 모습이 꽤 자연스럽다. 부지런히 식탁을 채운 신이혁은 마지막으로 두 개의 국그릇을 들고 다가와 주하얀과 제 자리에 하나씩을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았다. 김이 풀풀 올라오는 콩나물국이었다.

“밥은 남겨도 국물은 다 먹어.”

“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먹어.”

혹시 자신이 도울 일은 없을까 엉덩이를 들썩이던 주하얀은 감사인사를 하고도 잠시 눈치를 보다 신이혁이 먼저 숟가락을 든 후에야 국을 한 술 떠먹었다. 입으로 후후 불었음에도 뜨거워 입천장을 따갑게 했지만, 맛은 아주 좋았다. 주하얀이 숟가락을 휘저어 김을 날리다 세 숟갈을 연달아 국을 마시자 곁눈으로 살피던 신이혁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식사는 조용히 이어졌다. TV 소리도 없는 집엔 식기 소리와 끊어졌다 이어지길 반복하는 대화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이따금 젓가락이 같은 반찬에 닿는다거나 눈이 마주칠 때면 주하얀은 필요 이상으로 몸을 사렸고, 그는 태연하게 밥을 푼 숟가락 위에 반찬을 올려주었다. 그럴 때마다 주하얀은 감사하다고 형식적인 인사를 하면서도 곤란한 표정을 했다.

“저…. 오늘 집에 가보려고요.”

“왜?”

“어, 아무래도 집을 오래 비우기도 그렇고. 집에서 쉬는 게 더 편할 것 같아서요….”

직접 언급하지 않는 선에서 표현한 완곡한 요청이었다. 다행히 주하얀의 눈치를 확인한 그는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 집요한 물음도, 저지도 없었다.

하지만 도둑이 제 발 저려 그런가. 함께하는 식사가 끝나고 집에 갈 채비를 하는 내내 주하얀은 슬쩍슬쩍 신이혁의 기색을 살폈다. 그리곤 특별히 못마땅해하지 않음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데려다줄게.”

들어올 때와 같이 제 몸만 챙긴 주하얀이 쭈뼛대며 인사하자 거실에 있던 신이혁이 말했다. 금방이라도 차 키를 찾으러 방에 들어갈 기세이기에 얼른 팔을 잡아 저지하고 곧장 현관으로 향했다. 배웅하려는지 한걸음 뒤로 따라 나온 신이혁은 주하얀이 신발을 신느라 몸을 쭈그리자 현관 아래까지 함께 내려왔다. 그리곤 몸을 일으키자마자 뒤에서부터 손을 뻗어와 문을 열어주었다.

“……?”

잠금을 해제하고 열리나 싶던 문은 발 한 짝이 겨우 들어갈 만큼의 틈을 만들곤 그대로 멈추었다. 그는 문고리를 쥔 채 연 것도, 닫은 것도 아닌 상태에서 미적거렸고 영문을 모르는 주하얀만이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들었다.

등 뒤론 굳건히 선 남자가, 눈앞엔 열릴 기미가 없는 문이 있다. 졸지에 길이 가로막혀 팔 안에 갇힌 주하얀을 잠시 내려다보던 그는 문득 고개를 숙였다.

미처 도망칠 시간도 없이 말간 눈가에 입술이 찍힌다. 눈꼬리 끝에 닿은 입술은 잠시 표피에 닿는 피부의 촉감을 즐기다 아쉬운 듯 눈썹과 관자놀이에도 닿았다.

“조심히 가.”

“…….”

“새벽에 얘기했던 건 잘 생각해보고.”

그의 말이 귀에 대고 속삭이듯 가깝다. 덩달아 그 숨결까지 전해지는 듯 해 절로 어깨가 치켜 올라간다. 놀란 고슴도치처럼 몸을 만 주하얀이 막 눈을 올려 뜨려는 순간 신이혁은 바투 붙였던 몸을 떨어뜨렸다. 잡고 있던 현관문도 놓고 미련 없이 멀어지더니 주하얀의 등을 부드럽게 밀어내기까지 했다.

“어…….”

방금까진 얼싸안을 것처럼 가까이 왔으면서 눈 깜빡하는 사이 덩그러니 남았다. 얼결에 집 밖으로 떠밀린 주하얀이 문을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당황스레 뒤를 돌아보자 그는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잘 가.”

그 사이에도 벌어졌던 틈은 착실히 줄어들어 곧 쾅하고 닫힌 문을 잠시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분명 자신이 먼저 나간다고 했는데도 묘하게 축객령을 당한 기분이다.

“…뭐야?”

(다음 편에서 계속)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2)============================================================

디어 마이 세큐리티

(Dear my security)

잔희 장편 소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