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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33화 (33/61)

33화

어쨌든 바라던 바였으니 휑한 현관을 지나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주하얀은 몇 번이고 닫힌 현관문을 돌아보았다.

본래는 머리를 식힐 겸 1시간이 걸리든, 2시간이 걸리든 집까지 걸어가려고 했는데, 도통 몸이 주인의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얼마를 걸었을까. 가신 줄 알았던 숙취가 스멀스멀 올라와 울렁이는 속을 이기지 못한 주하얀은 중간도 못가 가까이 보이는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후욱, 후.”

메슥거리는 속을 달래기 위해 찬 공기를 한입 가득 삼켰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한 번에 내쉬며 입김을 가지고 장난을 치던 주하얀은 입술을 좁게 다물어 숨을 길게 내뱉었다. 얇고 길게 뻗어가는 입김이 언뜻 신이혁이 담배를 피울 때 뱉던 담배연기 같기도 했다. 내친김에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려 그럴듯한 시늉을 하다가 문득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은 민망함에 괜히 머리를 털었다.

다행히 길가에 있던 모르는 정류장에는 빌라촌을 지나는 노선이 있었고 버스는 10분이 채 되지 않아 정류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노란색 소형 마을버스는 덜컹이는데다 빠르기까지 해서 겨우 집에 돌아온 주하얀은 탈 것을 이용한 보람이 없게도 남은 하루를 꼬박 숙취에 뒹굴거리는 데 써야 했다.

물 먹는 하마처럼 냉수만 들이켜고, 당연하게도 자주 들락거린 화장실에선 물때 낀 타일벽이 꿀렁거리는 착시를 겪어야 했다.

울렁울렁. 마음도 몸도 모두 중심 없이 흔들린다. 일렁일렁. 도배지가 노랗게 빛바랜 천장으로 자꾸만 한 인영이 흐릿하게 떠오른다.

울렁울렁. 일렁일렁. 어른의 맛이란 어지럽구나. 고달픈 20살은 마음이 혼란해 차라리 눈을 감았다.

“에휴.”

바닥을 구르는 숙취가 잠잠해진 후엔 다시 술집을 찾았다. 낡은 주막 콘셉트의 가게 안쪽 좌석에 나란히 앉은 주하얀과 이종훈은 각각 유리잔과 막걸리 사발을 앞에 두었다.

“줘?”

“아니. 난 별로.”

중앙에 놓인 김치전을 크게 찢어 입에 욱여넣더니 사발에 막걸리를 따르던 이종훈이 반 정도 빈 술병을 들이민다.

이제 술이라면 질색이다. 주하얀은 대번에 됐다고 손사래를 치며 사이다가 든 잔을 들어 보였다. 고개를 끄덕인 이종훈은 막걸리 병을 내려놓더니 사이다를 가져와 자신의 사발에 따라 달짝지근해진 술을 한 모금 마신다. 보기만 해도 속이 뒤집힐 것 같은 기분이다.

“아직도 속 안 좋냐?”

“그건 아닌데 아직은 술이 안 당긴다.”

“뭐 얼마나 마셨길래 그렇게 숙취가 심해.”

“몰라. 그냥 양주.”

“와. 존나 비싼 것도 먹었네.”

촐싹대는 호응에도 혹여 더 집요한 물음이 나올까 주하얀은 대충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원래 밤늦게 술이나 한잔하자는 이종훈의 말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일단 평일 아르바이트가 끝나는 시간은 매우 늦었으며, 퇴근할 즈음엔 언제나 파김치가 되어 집에서의 휴식이 절실했다. 아무리 친한 친구와의 만남이라도 단번에 수락하기 쉽지 않은 조건이다.

하지만 주하얀이 만남을 주말로 미루지 않았다. 순전히 변덕 때문은 아니었는데, 홀로 집에 돌아와 잠들기 전까지의 시간이 썩 달갑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더 정확히 한다면 고요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때에 자꾸만 빠져드는 생각이 문제다.

“너는 그럼 학교 근처에서 자취할 거냐?”

“모르겠는데. 안 하지 않을까. 너는.”

“난 택도 없지. 여기서 역 몇 개만 가면 되는데. 엄마가 절대 안 된대.”

“그래. 같이 사는 게 오히려 편할 수도 있어.”

이종훈은 일주일 전 우상동에서 멀지 않은 지역에 있는 대학교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았다. 본래 목표로 했던 곳보다 입결이 높은 대학이었기에 이종훈은 흥분에 겨워했다. 합격 발표가 난 날 나눈 통화에서 환호성으로 무려 삼십 분 동안이나 주하얀의 귀를 괴롭게 했을 정도였다.

지금도 자취가 새내기의 로망인데 깨져 아쉽다고 쉰소리를 하면서도 목소리에 은근한 기쁨이 묻어난다. 같은 수험생이었던 입장에서 그 행복감을 모르지 않기에 주하얀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근데 넌 여기서 다니기에 좀 멀지 않냐? 기숙사도 못 들어가?”

“거리순 배정인데 아예 다른 지방이 아닌 이상 들어가기 힘들다더라. 여기는 좀…. 애매하게 가까워서.”

“그래? 자취는 절대 안 된다셔?”

“뭐….”

주하얀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안 된다고 할 만한 사람이 있는 건 아니다. 있다고 해도 지금 병원에 누워있으니 자식에게까지 관심을 쏟기엔 무리지 않을까.

다만 섣불리 굴 수도 없었다. 일단 자신은 담보 신세니까. 스스로를 순순히 물적 대상 취급하려니 기분이 묘하긴 했으나 괜히 말을 꺼냈다가 상대가 도망이라도 치려는 줄 오해하면 일이 귀찮아진다.

주하얀은 자신이 떠올려놓고도 너무 순종적 태도를 보였나 싶어 괜히 머쓱하게 말을 얼버무렸다.

“아직 얘기 안 해봐서 잘 몰라.”

후끈한 히터 열기에 미지근한 볼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대충 마무리된 주제에 대화 소리가 잦아들고 각자 몫의 음료를 마시고 안주를 주워 먹었다. 둘 사이로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 지나간다.

차가운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긁어내며 잠시 골몰하던 주하얀은 곧 어려운 물음을 꺼내듯 고개를 기우뚱했다. 어디까지나 생각난 김에, 별 뜻 없이 꺼내는 그저 그런 화젯거리일 뿐임을 새기며 더듬더듬 말머리를 내놓았다.

“이종훈. 만약에 있잖아.”

“응.”

“만약에 네가 지금 정말 필요한 게 있어. 근데 어떤 사람이 너한테 필요로 하는 도움을 주겠다고 한 거야. 그 사람이 막 좋은 사람은 아니거든? 그러면 그 사람한테 도움을 받을 거야?”

충동적인 질문은 정리가 되지 않아 매끄럽지 않게 나왔다. 말의 앞뒤를 떠올리느라 ‘음……. 어…….’하는 주저음이 군데군데 박혔다.

뱉어놓고 보니 맥락이 숭덩 잘려나가 불친절한 물음이다. 부연설명을 해야 하나 망설이는데 다행히 대충의 뜻은 이해했는지 이종훈은 잠시 고민했을지언정 되묻는 일은 없었다.

“진짜 꼭 필요한 거야?”

“응.”

“그럼 받아야지.”

“근데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은 아니야.”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나중에 해코지하면 어떡해.”

“그러면 받지 말든가.”

“근데 지금 진짜 도움이 필요하긴 해.”

선택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무슨 답을 하든 자꾸만 말꼬리를 잡고 이어지는 반박에 결국 이종훈이 울컥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 뭐 어쩌라는 거야 미친놈아. 그냥 니 꼴리는 대로 해. 시발. 물어보지 말고!”

당장 쥐고 있는 나무젓가락을 휘두를 기세에 주하얀이 얼른 손을 앞으로 뻗어 제지했다. 미안. 내가 고민이 많아서. 단번에 돌아온 사과에 잠시 더 씩씩대던 이종훈이 화기를 진정시키려는지 콧바람을 휭 불었다. 그리곤 여즉 심각한 기운을 내뿜는 주하얀에게 턱을 까딱였다.

자신이 들어줄 테니 자세히 얘기해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번엔 제 결정에 토 달지 말라는 말도 곁들였다.

팔짱까지 끼고 경청의 자세를 취함에 주하얀이 조금 긴장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자신이 이 자리에서 밝힐 수 있는 선이 어디인지 헤아리며 시작한 이야기는 아까보다는 제법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러니까…. 우리 집이랑 아는 사람인데. 그렇게 썩 좋은 사이는 아니야. 사람 자체는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아무래도 관계상 찝찝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선뜻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는데 덥석 받기엔 좀….”

“좀?”

“좀 의도가 불순해서.”

“무슨 의도가 어떻게 불순한데. 왜. 나중에 몇 배로 갚으래?”

“그건 아닌데. 음….”

주하얀은 눈썹을 찡그려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하다.

아마도…, 그 사람의 의도는 자신일 거다. 신이혁이 원하는 바는 주하얀 같았다.

“다른 바라는 바가 있는 것 같아.”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어 말을 해놓고 붉어진 귀를 벅벅 문질렀다. 컵에 조금 남은 사이다도 마시고 테이블의 문양을 관찰하며 딴청을 피우는데, 내내 조용히 고심하던 이종훈이 젓가락으로 간장종지 귀퉁이를 쨍 두드린다.

“네가 하는 말이 무슨 소린지는 대강 알겠거든? 야 근데 생각을 해봐.”

이종훈은 짐짓 단호한 척 제 주장을 설파했다.

“그 사람이 너한테 지금 정말 필요한 도움을 준다고 했다며. 근데 너는 가질 수가 없는 거고. 맞아?”

”맞아.”

”그럼 그 도움이라는 게 남이 쉽게 해 줄 수 없는 종류 아니야?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지.”

“그래. 그런 걸 선뜻 내주면서 어떻게 대가도 안 바라냐? 무슨 자선 사업가도 아니고. 네가 빌리는 입장 말고 빌려주는 입장이라고 생각해봐.”

“그건 그렇지…?”

사실 신이혁에겐 그렇게 큰 부담이 아닐지도 몰랐지만, 이종훈의 기세에 밀려 고개를 끄덕였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본다면 주하얀은 절대 줄 수 없는 형태의 도움이긴 했다.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라고. 진짜로 필요한 거라며. 그러면 다른 건 감수한다 생각하고 받아야지. 만약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으면 그냥 빨리 됐다고 해. 관심 끄쇼 하든가.”

“…….”

“뭔진 모르겠지만 빨리 해결해라. 원래 고민 끝이 길면 안 좋다.”

기본 안주로 나온 마카로니를 아작거리던 이종훈이 검지를 세워 허공을 쿡쿡 쑤셨다. 그리곤 심각한 얘기는 치우라며 막걸리를 들이켠다. 그 앞에서 주하얀도 따라 과자를 집어 먹다 턱을 괴었다.

복잡하다. 만약 상황이 보다 간단했다면 자신도 간단하게 대응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생각해보면 결국 선택은 간단한 법이다. 이종훈의 말대로 고민이 길어져봐야 뒤로한 선택지에 아쉬움만 진하게 남는다.

“들어가라.”

“그래. 가라.”

결국 상담 값으로 이종훈에게 막걸리 한 병을 사준 주하얀은 뾰족한 수를 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고요의 시간이 싫어 술자리에 나간 것인데 노력이 무색하게도 잠이 들기 전 관문처럼 생각이 거듭된다.

신이혁은 집을 떠나기 전 주하얀에게 자신의 제안에 대해 고민해보라고 당부했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그의 말이라면 제법 잘 따르도록 습관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룻밤이 지나 다시 해가 하늘 한가운데에 가까워진 지금도 그의 생각이 깊은 걸 보니.

“결정이야 한다 치면 그다음은.”

주하얀이 우려하는 건 선택 자체보다는 그 후에 딸려올 여타였다.

사실 이미 결과는 나와있다. 다른 방도가 없다. 그 돈만 있으면 주하얀은 걱정 없이 대학 등록금도 낼 수 있고, 벌써 밀려있을 병원비도 낼 수 있다. 결국 지금 주하얀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지긋지긋한 돈이다.

신이혁은 주하얀의 열악한 조건을 다 감안한다고 했다. 어쩌면 아예 상환을 면제해줄지도 모른다. 그는 주하얀에게만큼은 다정했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자신을….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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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세큐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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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희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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