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하아.”
하지만 그 점이 주하얀을 망설이게 했다. 그는 변덕스럽다. 처음엔 무섭게 굴더니 어느새 온순한 척을 했다. 만약 그가 다시 변심해 주하얀에게도 이빨을 세운다면. 순전히 타인의 호의에만 기대 일을 벌이는 것은 어리석다. 더구나 그 ‘일’이라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결국 주하얀은 이번에도 결론을 짓지 못하고 병원 밖 벤치에 앉아 꽁꽁 얼어가는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밖에 머물렀는지 볼이 다 얼얼하다. 수요일 아침임에도 병원은 사람으로 붐볐다. 환자복을 입은 사람과 방문객이 섞여 엘리베이터 앞이 북적인다.
하다못해 과일주스병이라도 든 방문객들을 살피며 주하얀은 가벼운 제 손을 주머니에 넣어 숨겼다. 조용히 생각할 곳을 찾다 무심결에 향한 곳이다. 오후가 되기 전에 알바를 위해 떠나야 했기에 어느 짐도 챙겨 오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봐도 시간 낭비를 한 격이다. 결국 병원에서 머무르는 시간보다 도로에서 버린 시간이 더 많게 생겼다.
“612호……. 612호.”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주하얀은 곧장 벽에 붙은 호실 안내표를 찾았다. 지난번 방문 때 호실 번호를 살핀 게 다행이었다.
벽에 그려진 안내를 따라 복도 안쪽으로 들어간 주하얀은 612호를 발견했다. 다른 환자 간병인이 닫는 걸 잊은 건지 열려있는 병실 문에 곧장 안으로 들어서려던 주하얀은 문턱 코앞에서 우뚝 발을 멈추었다.
병실의 안쪽 창가 자리 침상 주위로 남자 세 명이 둘러 앉아있다. 짧게 깎은 머리, 두툼한 겉옷 때문에 더 커 보이는 체격.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한번 마주친 적 없는, 앞으로도 마주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다.
주하얀은 다급하게 뒤를 돌았다.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하지만 초조한 나머지 미처 뒤를 살피지 못한 탓에 채 한 걸음을 내딛지도 못하고 누군가와 부딪혀버렸다.
“아이, 죄송합니다.”
“감사합…. 니….”
불시에 부딪혀 휘청이는 주하얀의 팔을 잡아 세워준 건 충돌의 상대방이었다. 살집이 있어 두터운 손을 내려다본 주하얀이 감사인사를 전하다 문득 말꼬리를 흐렸다. 고개를 들어 마주한 상대는 자신을 다 가릴 만큼 큰 풍채를 가졌다.
남자는 계절에 맞지 않은 화려한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것도 윗단추 두어 개를 풀어 목덜미가 훤했다. 그 안에 찬 금목걸이는 전형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왁스로 삐죽하게 올린 짧은 머리까지 갈 것도 없이 옷차림이 말해주었다. 그러니까,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사람과 같은 부류임을.
“먼저 들어가세요.”
“네?”
“병실 들어가시려던 거 같아서.”
“아. 아, 네. 아니요, 어, 그러니까, 병실을 잘못 찾아서.”
놀람과 동시에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주하얀은 얼른 손사래를 치며 앞을 가로막은 남자의 말을 부정했다. 물론 당황해 반응한다는 게 되려 수상쩍었음을 뒤늦게 알아챘다. 남자도 이를 알아챘는지 눈가를 찡그렸다.
주하얀은 그 험악한 얼굴에 어깨를 딱딱하게 굳히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부디 이번엔 자연스럽기를 바라며.
“그, 그럼 전 이만.”
덩치가 큰 남자의 옆을 비집고 지나가려 주하얀은 몸을 한껏 웅크렸다. 제발 자신의 의심을 기우 취급해주길. 어색해 보일까 무서워 허둥대지도 못하고 천천히 발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
“잠시만.”
막 남자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치려는 찰나 주하얀은 방금 전 잡아 채였던 팔뚝을 그대로 잡혔다. 아까와 꼭 같은 억센 힘으로.
삐죽 머리의 남자는 시선을 들어 주하얀의 뒤쪽 벽에 걸린 호실 번호와 그 아래 환자 이름표를 훑었다. 이대로 정체가 들통나면 곤란하다. 당황으로 구겨진 얼굴로 길쭉한 눈이 내려온다.
“병문안 온 거 아니에요? 들어가서 얼굴이라도 보고 가지.”
“병실을 잘못 찾았다니까요. 놔주세요.”
“그런 것치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이쪽으로 오던데.”
차라리 지레짐작하거나 추궁하는 투였으면 나았을 텐데. 남자는 다 안다는 듯 평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태도가 되려 반박의 여지도 남겨주지 않았다. 주하얀은 훅 끼치는 막막함에 눈을 꾹 감았다. 젠장! 하필 처음부터 길이 겹쳤나 보다.
“아빠 보러 온 거 아니야? 왜 바로 가.”
이쯤 되니 남자는 자신의 앞에 선 소년이 저기 누워있는 환자의 아들임을 확신했다. 어설픈 거짓말이 통하지 않았음은 주하얀도 알 수 있었다. 방금까지 정중한 사내인 척 붙이던 존대도 떼어내고 노골적으로 주하얀을 살핀다.
“무슨 소리세요. 이거, 놔요!”
“왔으면 얼굴이라도 보고 가라는 거지. 긴히 할 말도 있고.”
“누구시길래 지금……! 여기 병원이에요.”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다는 건지 정말 궁금해하는 표정이다. 거리낌 없는 남자의 눈을 보자마자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변명을 잘못 골랐다. 장소나 시선 따위에 신경 쓸 작자가 아닌데. 주하얀은 다급히 남자의 어깨너머로 주위를 살폈다.
하필 복도 안쪽 병실이라 데스크와 거리가 있다. 냅다 소리를 지를까 싶다가 까딱하면 병실 안의 패거리도 불러들이는 꼴이 될까 저어되었다. 그렇다고 남자의 손에 조용히 끌려갈 수도 없다. 주하얀은 정말, 더 이상은 제 잘못이 아닌 건으로 수모를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런 두려운 경험은 한 번으로 족했다.
“어떻게 알아낸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를 먼저 찾아온 건 그쪽이야. 그럼 당연히 우리 쪽 요청에도 응해야지 않겠어?”
남자의 말은 이미 귀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힘주어 흔들어봐야 꿈쩍도 않는 남자의 손을 밀어내며 다급히 시선을 돌렸다. 어쩌지 싶어 입술만 씹어대는데 마침 복도 입구 쪽 병실 문이 열리더니 간호사가 나오는 게 보였다.
“내가 해코지 한다는 게 아니잖아. 그냥 얘기나 좀,”
“간호사님!”
주하얀은 타이밍을 잴 것도 없이 불쑥 손을 들었다. 혹시나 자신을 못 보고 지나칠까 복도가 울리도록 큰 소리를 냈다.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는 남자의 팔이 조금 느슨해진 틈에 재빨리 손을 뿌리친 주하얀은 채 잡을 새도 없이 남자의 옆을 빠져나왔다. 이렇게 필사적인 뜀박질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탁탁, 빠른 발걸음 소리가 시끄럽게 복도를 울린다. 고등학생 때 체력장이면 단거리 달리기로는 반에서 손꼽던 실력이 이렇게 도움이 된다. 불시에 불려 복도 쪽을 돌아본 간호사의 당부도 덩달아 “병원에서 소리 지르시면 안 돼요.”에서 “뛰면 안 돼요!”로 바뀌었다. 자신을 향해 전력투구하여 달려오는 꼴을 보고 놀라 눈을 커다랗게 뜬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간호사의 옆을 지나치며 헐떡이는 결에 죄송하다고 사과한 주하얀은 그대로 속도를 줄이지 않고 비상계단으로 뛰어들어갔다. 달음박질하는 걸음이 구르듯 계단을 뛰어 내려간다.
“헉, 허억…. 컥, 흐.”
남자가 따라 내려올까 두려워 3층까지 반쯤 굴러 내려온 주하얀은 구름다리를 타고 다른 동으로 옮겨갔다. 턱까지 숨이 차다 못해 매웠고 심장이 괴롭게 두방망이질 친다. 도중부터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향하는 중에도 수시로 불안스레 주위를 훑었다.
그럼에도 안심이 되지 않아 병원 건물을 빠져나와 어딘지도 모를 골목을 두 개나 돌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병원은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리 있었다.
“헉, 끅…….”
순간 미약한 안도감이 들자마자 무릎을 짚으며 몸을 무너뜨렸다. 숨이 차 골목이 울리도록 기침을 하던 주하얀이 다급한 손으로 주머니를 더듬었다.
혹시 잃어버릴까 지퍼까지 잠가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주하얀은 주소록을 뒤졌다. 많지도 않은 목록에서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거는 데에도 떨리는 손을 몇 번이고 쥐었다 펴야 했다.
뚝-
“여, 허억……. 여보세요.”
-네 여보세요.
“콜록, 저, 주하얀인데요.”
-알아.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숨 차.
“저 할…. 케헥, 커……, 게요.”
-하얀아?
“후우, 후……. 저 할게요.”
-뭐?
“그 계약, 이요. 그거 할게요.”
후웁, 후웁. 주하얀은 입가를 손바닥으로 덮어 허덕이는 숨을 골랐다. 쿵쿵 내달리는 심장이 갈비뼈를 아프게 두드리고, 갑작스러운 격한 운동에 온몸이 후들거린다.
그 산란한 와중에도 주하얀은 귀에 댄 핸드폰 스피커에만 집중했다. 잠시 말을 멎었던 신이혁은 예상처럼 기쁘거나 만족스러운 내색을 비추지 않았다. 그저 주하얀에게 물었을 뿐이다.
-…그래. 지금 어디야.
“저 병, 원이요. 후.”
-병원……. 주길우 씨 있는? 잠시만.
시간이. 뒷말이 멀어진다. 시계를 확인하는지 수화기 너머의 남자는 잠깐 말을 멈췄다. 주하얀도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내 시간을 확인했다. 두 시간 후면 출근해야 할 시간이다. 지금 바로 출발해야 겨우 늦지 않을 정도였다.
“그냥 잠시 들르려고 왔던 건데 병실에 모르는 사람들이….”
-아.
신이혁은 주하얀의 우왕좌왕한 설명에도 모든 정황을 이해한 듯했다. 더불어 주하얀이 불쑥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도.
-하얀이 무서웠구나.
“…….”
-그래서 어떻게 했어.
“이, 일단 도망쳤어요. 어 지금은 병원 옆 골목인데. 혹시 찾으러 올까 봐 숨느라….”
-그래 잘했어. 음…. 내가 지금 출발해도 도착하려면 한 시간 반 이상은 걸릴 거야. 그러면 출근에 늦을 것 같은데.
잠시 말을 끌던 신이혁이 곤란한 투로 말했다. 아이를 달래듯 다정하고 어딘가 미안한 기색이었다. 그 말을 들은 주하얀은 아……. 하고 말을 끌다 제풀에 깜짝 놀라버렸다. 신변이 위태로운 결에 안전한 곳을 찾듯 전화를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외에 자신도 모를 기대를 하고 있었나 보다.
“데리러 오라는 말은 아니었어요. 집에는 혼자 갈 수 있어요.”
-괜찮겠어?
“네…. 괜찮아요. 이제 좀 진정됐어요.”
주하얀은 핸드폰을 쥐지 않은 손을 내려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아직 잔떨림이 남아있지만, 이 정도면 괜찮다.
-그래. 혹시 모르니까 주위 잘 보고 오고. 바쁜 일 마무리되면 들를게.
“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네…. 감사합니다.”
-그래. 끊는다.
머뭇거리며 덧붙인 감사의 말에 신이혁은 웃음을 흘렸다.
전화를 마무리하자마자 후들거리는 다리에 그대로 더러운 벽을 타고 주저앉은 주하얀은 아직도 차오르는 숨을 헐떡였다.
아깐 무서움에 자신도 모르게 번호를 눌렀는데 통화를 마치니 무슨 짓을 했는지 뒤늦게 실감이 난다. 물론 제정신으로, 자신의 의지로 한 일이니 후회는 하지 않는다. 촉매가 있었다 해도 분명히 그의 번호를 누르고 전화를 청한 건 자신이다.
다만 그리 오래 고민했던 게 좀 무효한 느낌이다. 사실 등 떠밀어줄 사건을 기다리고 있었나. 두려움의 감성이 이성을 앞선 순간, 무의식 중에 바라던 일을 행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읏.”
그렇게 주하얀은 한참이나 더 그 좁은 골목에 쭈그려 앉아있다 일어섰다. 경직되었던 몸이 풀리며 온몸의 근육이 아우성을 쳤다. 걸음마다 조마조마하게 주위를 살피느라 고개를 돌려대 버스에 올라탔을 때는 옅은 두통이 일 정도였다.
역시 오는 게 아니었다. 평생 피난처 한번 되어주지 못한 사람에게 무슨 안식을 바라 찾아간 건지. 자신의 미련함에 혀가 차인다. 버스에 올라타 멍한 눈을 꿈뻑일 때도, 아르바이트 시간에 아슬하게 도착했을 때도 내내 우울한 생각이 머리를 무겁게 했다.
그날 병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환자의 전원 일자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간단한 응답 후 통화를 끝내고도 주하얀은 한동안 감감한 화면을 만지작거렸다. 핸드폰엔 기다리는 연락 하나 도착해 있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내쉬어 어깨가 들썩인다.
“기다리라잖아….”
주하얀이 신이혁을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꼬박 이틀이 더 지난 금요일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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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희 장편 소설